▲ 이석재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이석재 칼럼니스트】 예전 어느 기관에 몸을 담고 있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당시 나는 소속 부서가 아닌 다른 곳에 파견을 나가 일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원래 있던 곳의 직속 상사가 나를 조심스레 불러냈다. 그는 내게 일은 잘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분위기로 보아 단순한 안부 확인은 아닌 듯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았다. 혹시 제가 잘못한 거라도 있습니까.

상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내가 파견 나와 있는 곳의 책임자와 얼마 전 식사를 함께 했는데 그 자리에서 내 이야기가 나왔단다. 그런데 나에 대한 평가가 별로 좋지 않아 내내 고민하다 나를 직접 불러 물어보는 거라 했다. 당황스러웠다. 특별한 사고도 없었고, 그렇다고 업무 처리를 잘못했던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저한테 어떤 문제가 있다고 말씀하시던가요. 상사의 돌아오는 답변에 맥이 풀렸다.

“알아서 하는 맛이 없다 하더라고.”

그에 덧붙여 평소 질문하는 모습도 탐탁지 않았단다. 보통 지시를 받을 때면 내가 제대로 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지시사항을 재정리해 질문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것이 게으르면서도 도전적인 모습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앞으로는 윗사람의 의중을 알아서 살피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어떻겠냐는 조언으로 그날의 짧은 대화는 끝이 났다.

‘알아서 잘 하는 사람’은 어느 사회, 어느 조직에서든 환대를 받는다. 그 대상이 윗사람이든 동료이든 아랫사람이든 타인의 마음을 잘 읽어내는 것은 분명 중요한 능력이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는 그러한 능력을 지나치게 광범위한 영역에서 지나치게 높은 수준으로 요구한다. 그러다 보니 조금만 높은 자리에 올라가도 부하 직원에게 명료한 언어를 구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지시와 이행이라는 협동과정에서 아랫사람의 역할, 그러니까 윗사람의 뜻을 알아서 읽어내야 하는 임무가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윗사람이 모호하게 한 마디를 뱉어놓으면 질문을 통해 그 의미를 명확히 하기 보다는 의중을 해석하기 위해 머리를 굴려야 할 때가 많다. 혹여나 잘못된 질문을 했다가는 힐난을 듣거나 무능한 사람으로 낙인찍히기 때문이다. 알아보기 힘든 필체로 쓰인 메모를 받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 자리에서 되묻기보다는 예전에 윗사람이 남겼던 필기를 참조한다든가 혹은 그를 모셨던 다른 사람들을 불러 모아 대체 이게 무슨 글자인가 심각하게 의견을 나누곤 한다. 옆에서 보기에는 굉장히 우스꽝스러운 풍경이지만, 그 풍경 속의 인물들에게는 그 알아보기 힘든 글자 하나하나에 각자의 미래와 가족의 생계가 달려 있다.

지금의 대통령 역시도 질문 받는 것을 싫어한다. 요즘 SNS에서 회자되고 있는 전여옥 전 의원의 어록 중에도 이런 내용이 있다. “친박 의원들이 박근혜 대표의 뜻을 헤아리느라 우왕좌왕하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면 박 대표는 ‘제가 꼭 말을 해야 아시나요?’라고 단 한 마디 한다.” 그런데 이게 현 대통령만의 문제일까. 내가 꼭 말을 해야 알아먹겠냐는 식의 으름장은 우리 사회에서 예외보다는 보편에 가까운 모습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대통령은 지난 11월 4일 있었던 두 번째 대국민담화에서도 기자들의 질문을 받지 않았다. 모든 언론이 들고 일어났고, 여론이 들끓고 있는데도 그러했다. 다만 대통령의 그러한 모습은 담화 이전부터 예견된 탓인지 놀랍지는 않았다. 내가 충격을 받았던 것은 그 앞에 앉아 있던 기자들 역시 질문하지 않는 풍경이었다. 권력자는 질문을 받지 않고, 기자들은 질문을 하지 않은 가운데 그렇게 대국민담화는 허무하게 끝이 났다.

무엇이 기자들을 침묵하도록 만들었을까. 비겁하기 그지없는 기자들만이 우연히 그때 그 자리에 앉아있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권력자는 질문을 허용하지 않고, 우리 역시 질문하지 않고 복종한다는 이 사회의 불문율이 아직 강고하게 살아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권위는 추락했지만, 그를 권좌 위로 밀어 올렸던 우리의 풍토는 여전히 현실의 힘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 국면 너머에 어떤 세계가 펼쳐져 있을지 지금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이 질곡이 무엇 때문에 만들어졌는지 하나씩 차분히 돌아보지 않는다면, 지금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윗사람이 개떡같이 말해도 아랫사람은 찰떡같이 알아들어야 하는 사회는 결국 불행해진다. 시민들이 아무리 찰떡같이 알아들어도 결국 세상은 권력자의 개떡대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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