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6.8 혁명
[칼럼] 6.8 혁명
  • 이종우 칼럼니스트
  • 승인 2016.12.01 09: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강의전담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6.8 혁명은 1968년 5월에 프랑스에서 파리대학 학생 및 청년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 사람들이 드골정부에 항의해 벌인 사회변혁운동이다. 1968년 5월에 시작됐기 때문에 다른 말로 5월 혁명이라고 일컬어진다.(사전에서 6.8 혁명을 ‘운동’으로 간주하는 것은 그 의미를 많이 축소하는 것으로 보인다. ‘운동[movement]’과 ‘혁명[revolution]’은 엄연히 그 의미가 다른데, 표제에는 ‘혁명’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풀이에서는 “운동”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잘못된 설명이다. 필자 주.)

6.8 혁명의 시작은 칸대학과 파리대학 낭테르 분교의 학생 시위였다. 1968년 3월 대학생 8명이 미국 베트남 침공에 항의하는 의미로 미국 회사인<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파리 사무실을 습격했고, 이들은 모두 체포됐다. 그 해 5월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대규모 항의시위가 이어지면서 6.8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학생들의 시위는 모진 탄압을 받는다. 경찰은 ‘살수차’와 ‘최루탄’을 쏘아댔고, 시위하는 학생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면서 시위를 진압한다. 그런데 이 장면이 텔레비전을 통해 프랑스 국민에게 비춰졌고, 학생이 아닌 프랑스 사람들이 학생들의 시위에 동참하기 시작한다. 노동자들은 학생들의 시위에 발맞춰 ‘총파업’에 접어들었다. 그 결과 총 400만 명이 파업과 공장 점거, 대규모 시위에 참여했다. 그리고 프랑스 곳곳에 프랑스 사람들이 설치한 ‘바리케이트’가 등장한다. 프랑스에 다시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드골 정부는 이러한 저항을 무마하기 위한 많은 노력을 시행했다. 강력한 진압과 함께, 노동자들에게 임금 인상안과 노동조합의 권위 신장 등을 제안하는 강온양면전략을 수행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오히려 프랑스 사람들의 저항은 다양한 면으로 확산됐다. 단순한 가두행진, 투석전, 점거농성 등 전형적인 시위의 형태만 있었던 것아 아니라는 의미이다.

록 음악을 통해 열정을 발산하기도 하고, 책이나 유인물을 펴내 자신들의 주장을 알리기도 하였다. 방랑이나 마약 흡입, 프리 섹스 같은 도발적인 행위로 기성세대의 가치관에 도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행위는 청년들뿐만 아니라 장애인이나 빈민 같은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자기 의사를 표현하고 뭉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휴머니스트, 2011.)

시위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적 형태로 확산되었던 6.8 혁명은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권 교체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드골은 국민에게 신임을 묻기 위한 총선을 실시했고, 그 결과 여당은 대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후 드골 정권은 제대로 유지될 수 없었고, 결국 1969년 국민투표에서 드골은 패배했다. 총선거에서 국민투표 사이 1968년 항쟁의 영향으로 정부에 대한 다양한 비판이 있었고, 그 결과가 투표로 이어진 것이다.

정권 교체에 실패했다는 측면에서는 6.8 혁명은 실패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영향력을 고려하면 6.8혁명은 실패한 혁명으로 평가될 수 없다. 우선 세계적인 영향을 미쳐서, 프랑스 이외에도 미국, 독일, 일본 등의 국가로도 확산됐다. 또한 이 때 시작된 문화적인 저항은 현대 문화를 만들어내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또한 프랑스 내부에서는 직업과 성별 등 다양한 기준에 따른 차별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상징적인 현상이 프랑스의 대학교들의 이름이 원래의 이름 대신 숫자가 붙기 시작한 것이다.

6.8 혁명은 단순히 폭력적인 진압에 대한 반발이 아니었다. 자유와 평등, 박애를 신조로 삼던 프랑스 사람들이 그 신조가 무너져가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보지 못해서 일어난 것이다. 드골은 제2차세계대전의 영웅이었지만 권위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정책을 폈다. 그 결과 프랑스에서는 내적으로는 대학은 서열이 매겨져 있었고, 직업과 성별에 따른 다양한 차별이 존재했고, 외적으로는 영국의 유럽경제공동체(EEC)가맹에 거부권 발동, 독자적인 핵무장, 미국지휘 아래에 있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서의 탈퇴 등 ‘위대한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민족주의를 부흥하기 위하여 주체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게다가 당시 냉전으로 인한 이념 대립을 핑계로 프랑스 사람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가 공공연히 시행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당시 프랑스 사람들은 사회와 교육의 모순과 관리사회에서의 인간 소외를 겪고 있었다.

6.8 혁명에서는 이러한 프랑스의 모습이 상징적으로 많이 드러난다. 대학생들이 베트남 전쟁에 반대한 것은 자유와 반제국주의의 상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가 식민지로 삼고 있었던 베트남에서의 미국이 수행하던 전쟁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우방인 미국에 대한 저항의 뜻이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공산진영이었던 당시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략에 대한 저항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시위에 대한 폭력적인 진압은 군인 출신인 드골로 대표되는 군국주의와 권위주의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시위가 확산되면서 프랑스 사람들이 설치했던 ‘바리케이트’는 루이 16세를 단두대에서 처형한 프랑스 혁명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다.

6.8 혁명은 국외의 약소국에 대한 침공에 저항하는 것에서 시작됐다. 그 과정에서 프랑스 내부에서 공공연히 퍼져있던 권위주의와 인권 침해, 불평등을 발견하고, 이것에 대한 저항이 일어난 것이 6.8 혁명이다.


인기기사
최신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