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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신문 박지수 기자】 2012년 4월 아무도 몰랐던 비밀을 언론에 밝힌 한 남자는 세상에서 제일 치사한 보복을 당하게 된다.

해당 비밀을 밝히기 전만해도 이 남자는 영업도 하고 인터넷 수리를 하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한창 공부하는 아이 둘, 아내와 단란한 가정을 꾸린 평범한 가장이기도 했다. 그런데 진실을 세상에 밝힌 후 그는 평범한 회사원으로의 삶과 평범한 가장으로서의 삶을 모두 잃게 됐다.

국민 상대로 사기극 벌인 회사 세상에 알려
정직·강제전보·해임 등 징계처분 거듭 당해
공익제보자 현주소 인식… 서러움 극에 달해 소송
버거운 생활 지속… 통장잔고 0원·늘어가는 빚
“부당하다” 판결 받아… 감봉 등 잇따른 징계

2012년 1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참여할 정도로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벤트가 끝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당시 국내 유명 통신사 새노조 위원장을 맡고 있던 나에게 모 방송사 취재진들이 찾아와 해당 이벤트에 대해 물었다. 미심쩍은 부분이 여러 가지 있는데 그 중 혹시 전화투표에 대해 아는 바가 있냐는 내용이었다. 사람들이 전화투표를 통해 이벤트에 참여할 수 있게끔 당시 내가 다니던 회사가 전송망을 설치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모른다고 답했다. 정말 아는 바가 없었으니 이렇다 할 답을 주지 못한 채 일단 취재진들을 돌려보냈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내내 ‘숨겨진 사실이 있는 건가’하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이벤트가 한창 진행되던 때, 전화투표를 담당했던 부서 직원들 사이에서 ‘사실은 회사에서 거짓말 하고 있는 거야’라는 말이 나돌았다는 것을 소문으로 들은 바 있어 무엇인가 꺼림칙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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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은 틀리지 않았다. 진실은 ‘대국민 사기극’이었다. 우리 회사가 국민들을 상대로 사기를 친 것이었다. 회사는 국내투표를 국제투표라고 거짓말해 비싼 수신료를 챙겼고 국민들은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전화투표 비용을 다 감당했다.

아무리 돈에 눈이 멀어도 뻔히 드러날 진실을 경영진 몇 명이 가리려고 했다니 기가 찼다. 돈 되는 일이라면 국민 속이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회사가 진실이 드러날 경우 깊게 반성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난 ‘공익제보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실행에 옮겼다.

이때만 해도 회사의 잘못을 알린 대가가 그토록 쓸 줄 몰랐다.

“2개월 정직 처분입니다”

회사는 나에게 정직 처분을 내렸다. 또 정직기간이 끝나기 무섭게 거주지에서 90km 이상 떨어진 경기 가평지사로 전보 조치했다. 그래도 ‘알면서도 모른 척, 싫으면서 좋은 척하는 무기력한 직장인이 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나’하는 생각에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받아들여야만 했다. 처자식을 생각하면 정직이든 전보 조치든 감수할 수밖에. 서러운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

5시간이 넘는 출퇴근 시간도 꿋꿋하게 잘 견뎌냈고, 가평지사에서 맡은 새 업무인 전봇대에 올라 통신 상태를 점검하는 일도 50대가 돼 처음 해보니 근력이 부족해 애를 먹긴 했으나 견딜만했다.

공익제보자라는 타이틀이 따라붙어 가평지사 직원들과의 사이가 데면데면한 건 회사 생활을 얼어붙게 했다. 공익제보로 전보 조치가 됐다는 사실을 회사 내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기에 팀장, 지점장 등 상사들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동료들이 나에게 말 한마디조차 건네는 일이 없었다. 퇴근 시간이 오래 걸리는 탓에 회식자리조차 거의 참여하지 못하니 동료들과의 거리는 좀처럼 가까워지기 힘들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허리 디스크였다. 전보 조치를 당하던 해 10월 본래 겪고 있던 허리 디스크가 오랜 출퇴근 시간으로 더욱 심해진 것이다.

“병가 신청 안돼”

병가 내기를 희망했는데 회사는 이조차도 거부했다. 정상 출근을 요구했다. 그러나 심해진 허리 디스크 때문에 더 이상 운전을 할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통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에 회사는 같은 해 12월 무단결근·조퇴 등을 이유로 날 해고시켰다. 무기력한 직장인이 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으며 가족들 생각에 서러움도 애써 눌러 담으며 일했는데 해고라는 청천벽력같은 조치를 당한 것이다.

회사는 과거 잘못에 대해 사과는커녕 나에게 어떤 처벌을 내릴까 궁리하기 바빴다. 이는 명백한 회사 측의 앙갚음이었다. 회사와 맞서 일자리를 되찾아야 했다.

법정에서 만난 회사 경영진들은 야비하기 그지없었다. 나를 향해 “회사를 골탕 먹이려 하는 이상한 사람”이라고 외쳤고 이를 입증하겠다며 동료들로부터 서명을 받아와 법정에 제출했다.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그 사이 바닥을 보이는 통장 잔고는 무거운 삶의 어깨를 더 짓눌렀다. 어느덧 대학생이 된 두 아이는 담담한 척 아빠인 나에게 별다른 불만을 표하지 않았지만 늘어가는 빚은 버거운 우리 가족의 생활을 적나라하게 확인시켰다. 그나마 내가 몸담고 있던 노조의 지원으로 근근이 생활을 꾸려 나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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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지난 1월 법원은 최종적으로 나의 손을 들어줬다.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지 3년여 만이다. 회사에서 내린 전보 조치와 해임 처분은 보복성 조치로 위법이라고 했다. 판결 이후 근무지를 서울로 옮겨 복직했다. 이렇게 회사와의 고통스러운 시간은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복직 17일 만에 회사는 날 또 궁지로 몰아 세웠다. 법원에서 무단결근·조퇴에 따른 처벌로 해임이 과하다고 했을 뿐 무단결근·조퇴에 대해서는 인정했다며 감봉 1개월의 징계를 내렸다. 집요한 회사의 보복에 할 말이 없었다.

이 또한 국민권익위로부터 정당하지 못하다는 판결을 받아 징계 취소 조치 됐지만, 회사의 정직, 전보, 해임, 감봉 등의 일방적인 갑질이 끝났다고 장담할 수 없다.

공익제보자들 간의 ‘고발은 짧고 고생은 길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지금까지 회사의 끊임없는 보복 행태를 생각하면 이 말이 절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다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인가” 주변에서는 이 같은 질문을 나에게 종종 한다. 나 역시 아주 가끔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아무리 고발 후 눈물로 지새우는 날이 많다고 하더라도 당시 내 선택에 후회를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문제점을 바로 잡는 것보다 더 값진 일이 어디 있으랴. 문제가 있으면 있다고 말하는 게 진짜 ‘삶’이다.

   
▲ KT 이해관 전 새노조 위원장이 KT의 보복 조치를 규탄한다는 내용이 담긴 피켓을 들고 있는 모습. 자료제공 이해관 전 새노조 위원장

이 이벤트는 바로 2010년과 2011년 2년에 걸쳐 진행된 이른바 ‘제주도 세계7대자연경관 선정’ 이벤트다. 이해관 당시 KT 새노조 위원장은 올해 1월 기나긴 소송전 끝에 승소했다. 재판부는 “KT가 징계권을 남용해 보복성 조치로 해임 징계를 내린 것”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현재 이 전 위원장은 KT에서 광케이블 유지 보수 업무를 맡아 안정적으로 일하고 있다. 최근에는 KT를 상대로 5000만원, 징계를 내린 직속상사를 상대로 100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손해배상을 받으면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하는 직원들을 구제하는 기금에 전액 펀딩할 계획이다. 또한 이를 통해 아직까지도 국민들을 속인 점에 대해 사과하지 않은 KT가 보복 조치를 내린 것과 함께 진정으로 반성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이 전 위원장은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KT는 <투데이신문>과의 통화에서 이 전 위원장에 대한 징계가 보복성 조치가 아니라는 점을 주장했다. KT 관계자는 “보복성 조치가 절대 아니다”라며 사과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설명했다.

또 “가평지사로의 전보 조치는 이 전 위원장의 출장비 부당편취에 따른 징계”라며 “나머지 징계들은 무단결근·조퇴에 따른 징계다”라고 강조했다.

한편, 참여연대에 따르면 공익제보자 10명 중 7명이 공익제보를 했다는 이유로 해고 등의 징계를 당해왔다고 한다. 이는 사회 곳곳에 이 전 위원장과 같은 눈물의 희생자가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공익제보자에 대한 회사의 보복 조치가 더 이상 내려지지 않기 위해서는 근로자 모두가 한마음이 돼 옳지 않은 회사 방침에 “아야!” 소리를 내는 공익제보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이 목소리는 더욱 커져 근로자들의 처우 개선에 힘을 모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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