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강의전담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혁명’이라는 단어는 조금 두렵고 낯선 단어일지도 모른다. 아마 한국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과 이로 인한 사회 불안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지난 11월 8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춘천을 지역구로 하고 있는 새누리당 소속의 김진태 의원의 ‘무슨 혁명 하겠다는 거예요. 공산주의 혁명, 사회주의 혁명, 두 가지 말고 또 뭐가 있어요?’라는 발언도 아주 약간은 이러한 두려움에서 비롯됐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혁명’이라는 단어는 유학의 고전인 『맹자(孟子)』에서 비롯됐다. 천자(天子)는 하늘의 명, 즉 천명(天命)과 백성의 승인이 있을 때 비로소 오를 수 있는 자리라고 했고, 천자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 이것을 어겼을 때 천자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 바로 혁명이다.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없었던 시대에도 백성들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은 군주의 자리를 유지할 수 없다는 생각이 있었다. 혁명이라는 단어에 대해 전혀 부정적인 시각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나라는 혁명의 역사가 없었을까? 그렇지 않다. 길게 보면 민주주의가 도입되기 전부터 우리나라에서는 끊임없는 혁명의 시도가 있었다. 고려시대 천민(賤民)이었던 망이·망소이의 난, 만적의 난, 조선시대의 진주민란, 동학농민전쟁, 이제수의 난 등은 모두 당시 존재했던 신분의 차별에 대한 반발이었고,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해 달라는 요구였다. 단지 그 시대적 배경 때문에 ‘난(亂)’으로 기록되었을 뿐이다.

일제강점기도 다르지 않다. 3.1운동은 일제 압제에 저항하면서 독립만세를 외치는 시위가 아니었다. 세계적 시각에서는 제1차세계대전 이후 견고해진 제국주의에 저항한 일종의 혁명이었으며, 이후 중국의 신해혁명(辛亥革命)과 인도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에 영향을 끼진 세계적 사건이었다. 이후 있었던 다양한 독립운동 역시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로 무장했던 일제에 저항했던 일종의 혁명이라고 볼 수 있다. 일제의 입장에서 3.1운동도 근대 이전의 여러 ‘난’처럼 반란으로 여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입장을 우리가 대변할 필요는 없다.

해방 이후에도 우리나라는 계속해서 혁명이 있었다. 4.19 혁명은 장기 독재를 꿈꿨던 이승만과 그 부역세력의 부정선거에 전 국민적으로 저항했던 사건이다. 학생들을 시작으로 일반 시민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우리 군까지 엄정한 중립을 지키겠다고 선언함으로써, 폭압적 진압을 가했던 경찰과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1987년에 있었던 87항쟁은 신군부의 독재와 장기집권 음모에 전 국민적으로 맞섰던 혁명이다. 4.19 혁명과 마찬가지로 학생들을 시작으로 종교계와 “넥타이 부대”로 대표되는 직장인들까지 신군부의 독재에 맞섰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역시 혁명적 사건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와 같이 ‘혁명’이 많이 있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혁명, 특히 해방 이후 있었던 혁명들은 그 이후 등장했던 지배 세력에 의해서 그 가치가 많이 폄하됐다. 4.19 혁명은 “4.19 학생 의거”라고 명명되었던 시기가 있었다. 이것은 전 국민이 참여했던 혁명을 학생 일부의 “의로운 일어남”으로 그 의미를 격하시키는 명명이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광주사태”라고 일컬어졌던 시대가 있었다. 이것 역시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일부 간첩들의 선동에 의해서 일어난 일종의 반란으로 평가하려는 사람들의 의도에서 이와 같이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왜 이러한 폄하가 일어날까?

가장 큰 원인은 혁명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정권 교체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근대 이전의 혁명들은 모두 국가에 의해 폭압적으로 진압됐다. 3.1 운동은 우리의 해방을 가져오지 못했고, 4.19 혁명 이후에는 짧은 정권교체 후 박정희에 의한 군사쿠데타가 발생했다. 87항쟁의 결과는 타도의 대상이었던 신군부의 주축 중 한 명인 노태우의 대통령 당선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이 지지하는 세력들의 분열이 있었다. 3.1운동으로 인해 세워진 임시정부는 다양한 계파 사이의 다툼이 있었고, 4.19 혁명 이후 집권했던 민주당은 신파와 구파 사이의 갈등이 있었다. 87항쟁 이후에는 김영삼-김대중 사이의 분열이 있었다. 정권 교체에 실패는 곧 혁명에서 타도 대상이 재집권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의 장기 프로젝트에는 혁명의 의미를 격하시키려는 노력이 들어있을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의 상황을 바라보면서 ‘혁명과 역사의 한가운데에 있다’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얘기와 함께 사람들은 혁명의 실패를 두려워하고 있다. 역사는 “이번 혁명에 실패하지 않을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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