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강의전담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1216년(고려 고종 3), 거란족이 당시 고려 영토였던 강동성(江東城)에 들어간다. 고려와 거란의 관계는 많이 알려져 있다시피 매우 좋지 않았다. 고려는 발해를 계승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족에 대하여 적대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로 인해 작게는 거란족이 그들이 멸망시킨 발해 땅에 세운 요(遼)에서 친선 우호의 의미로 보낸 낙태를 다리 밑에 묶어놓고 굶겨 죽이기도 했다. 크게는 건국 초부터 고려는 요나라 사이에 크고 작은 전쟁을 많이 치렀다.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 서희의 외교담판 등 고려 초기 영웅들의 활약상은 모두 요(遼)와의 대립 속에서 등장하는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요나라는 세 차례의 고려 침공에서 고려를 복속시키지 못하고 결국 화의(和議)를 맺었다. 그리고 고려와 거란은 대등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그런 거란이 약 200여년이 지난 1216년에 고려와 거란 사이의 전쟁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거란이 다시 고려에 침공한 것은 거란과 몽골과의 전쟁에서 거란이 계속 밀렸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 대륙은 여진족이 세운 금(金)이 대륙에서 가장 강한 나라였는데, 몽골의 칭키즈칸이 몽골 부족들을 통일하고 세계 정복에 나서는 과정에서 금은 쇠퇴한다. 금나라가 쇠퇴하면서 금나라의 여진족과 요나라의 여진족이 연합해서 대요국(大遼國)을 세우면서 몽골에 대항했다. 그러나 1215년(고종 2) 칭기즈칸은 거란 토벌과 고려 구원의 명목으로 2만의 병력을 고려의 동북 접경 지역에 보냈고, 거란은 결국 다시 몽골에 쫓겨서 고려로 침입했다. 이렇게 패퇴한 거란은 약 3년 동안 다시 고려를 괴롭힌다. 고려에 침입해서도 내분과 고려 관군과의 전투에서의 잇따른 패배로 인해 결국 강동성으로까지 들어간 것이다.

강동성에 들어간 거란군은 성을 굳건히 지키는 전략을 취했고, 때마침 큰 눈이 내렸다. 강동성을 공격한 칭기즈칸의 군대는 보급 부족과 기상 악화로 큰 곤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칭기즈칸의 군대는 고려에 원군과 군량을 요청했다.

고려의 입장에서 당시 상황은 좋게 보면 일석이조(一石二鳥)의 상황이었고, 나쁘게 보면 불확실성에 투자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항상 거란이 눈엣가시였던 상황에서 다른 세력과 함께 힘을 덜 들이고 거란을 물리칠 수도 있는 상황이기도 했고, 중원을 휩쓸고 있는 가장 흉폭한 세력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몽골과 관계를 맺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었다.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고려는 고심 끝에 칭기즈칸 군과 형제의 맹약을 맺고, 그들의 요청대로 지원군과 군량을 보냈다. 그리고 강동성에서 농성하고 있던 거란을 함락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것은 고려 역사상 몽골과의 최초의 교류가 됐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교류를 시작한 몽골은 마치 자신들이 큰 은혜를 베푼 것처럼 굴었다. 몽골의 사신이 고려에 들어와서 오만한 태도를 보였고, 해마다 과도한 조공을 요구했다. 이렇게 시작된 양국 사이의 관계 약화는 결국 몽골의 고려에 대한 아홉 차례의 침공과 삼별초의 항쟁으로 이어졌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그래도 “만약”을 상정해보자. 만약 고려가 몽골과의 맹약 없이 거란을 축출했으면 어땠을까. 당시 거란은 그 자체도 내분이 심했는데, 긴장 관계에 있던 여진과 힘을 합친 상태였기 때문에 더욱 결속력이 부족했다. 그리고 몽골에게 쫓겨 온 상황이었기 때문에 더욱 힘이 부족했다. 고려 스스로도 충분히 거란을 쫓아낼 수 있지 않았을까.

왜 힘이 빠진 적을 왜 고려 스스로의 힘으로 물리치지 않았을까. 이것은 아마도 고려 내부 상황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고려는 최씨 무신정권이 들어선 상황이었다. 무신정권 시작 이후 복잡한 국내 사정으로 외부의 침공에 힘을 모으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내부의 혼란 때문에 외부의 더 큰 적을 끌어들이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의 결과를 낳은 것이다. 내부의 혼란은 외부의 힘 빠진 적도 물리치지 못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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