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소녀상 미니블록’ 제작 평택평화나비 김지학 사무국장

   
▲ 평택평화나비 김지학 사무국장 ⓒ투데이신문

우연히 만든 소녀상 미니블록...인기 예상 못해
‘위안부’ 문제 알리고자 보다 다양한 활동할 것

한·일 외교 아닌 법적문제로 다뤄야 할 ‘위안부’
가해자·피해자 관계로 보고 정확히 책임 물어야

당당히 밝히지 못하는 피해자들 전국에 있을 것
곳곳에 소녀상 두고 ‘위안부’ 문제 관심 가졌으면

【투데이신문 최소미 기자】 1992년 1월 8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인권과 명예회복을 위해 수요시위가 시작됐다. 지금까지도 매주 수요일 12시가 되면 피해자 할머니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일본대사관 앞에 모여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고 외친다.

그리고 이곳에는 한 소녀가 일본영사관을 향해 앉아있다. 시민들은 이 소녀를 안아주고, 추운 날엔 목도리와 장갑을 선물해주기도 한다. 2011년 12월 14일 수요집회 1000회째를 맞아 김서경·김운성 작가 부부가 만든 ‘평화의 소녀상’이다.

주먹을 꽉 쥔 채 앉아 일본영사관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소녀의 모습은 많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기억하기 위한 가장 평화로운 목소리로 기억되고 있으며, 이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전국에 37개의 소녀상이 설치됐다.

그러나 지난 연말 부산에 ‘평화의 소녀상’ 설치를 두고 경찰과 시민단체 사이에 마찰이 빚어졌다. 결국 경찰의 소녀상 설치 허가가 내려졌지만 이에 대해 일본 아베 신조 총리는 지난 2015년 체결된 ‘한일 위안부 합의’를 거론하며 소녀상에 대해 불편한 입장을 표했다.

이와 같은 소녀상 탄압 속에서 책상 위에도 놓을 수 있는 작은 크기의 소녀상이 등장했다. 미니블록으로 만들 수 있는 ‘소녀상 미니블록’이다. 특히 ‘일본도 철거하지 못하는 소녀상’이라는 애칭까지 얻으며 이 블록은 두 번의 크라우드펀딩에서 각각 목표 금액의 332%, 2709%를 달성하며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이 소녀상은 어떻게 태어났고, 소녀상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리고 이 소녀상을 보며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할까. <투데이신문>은 소녀상 미니블록을 제작한 평택평화나비 김지학(28) 사무국장을 만나봤다. 

   
▲ 두 종류의 소녀상 미니블록 ⓒ투데이신문

Q. 평택평화나비에 대해 소개한다면.
평택청년회에 소속된 단체다. 2015년 12월 28일에 있었던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에 평택 지역 내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관심을 가지고 작은 행동이라도 실천해보자는 취지에서 2016년 초 처음 만나게 됐다. 나는 평택청년회 소속도 아니었고 평택에 거주하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는데 버스정류장에서 평택평화나비 모집 포스터를 보고 들어오게 됐다. 연령대에 제한을 두지 않아 청년들과 고등학생 친구들도 있고 현재 20명 안팎의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다. 우리들끼리는 서로를 나비라고 부르기도 한다.

Q. 평택평화나비는 어떤 활동을 했는지.
처음에 모였을 땐 공부부터 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윤미향 대표님이 쓰신 책 <25년간의 수요일>을 토대로 일본군 위안부와 관련된 역사적 배경부터 현재 남은 문제, 해결책에 대한 고민까지 매주 모여서 세미나를 가졌다. 발제하고 요약하고 프레젠테이션도 만들고. 그러다 평택시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기억해야 한다는 걸 스스로 통감하면서 조그만 활동들을 했다. 평택역에서 피켓을 들고 구호도 외치고 시민들을 대상으로 투표도 진행해보고 조그맣게 가두행진도 했다. 5월 이후 ‘평택 지역에도 평화의 소녀상을 세우자’는 얘기가 본격적으로 나왔다. 무작정 거리에 나가서 버스킹도 하고 모금활동도 했다. 정대협에서 판매 중인 나비 배지를 사서 평택 시민들에게 판매하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해 정대협에서 추진 중인 세계 1억인 서명운동도 갖고 와서 진행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청년들과 청소년들로 이뤄진 모임이다 보니 재정적인 문제 때문에 많은 활동은 하지 못했다.

Q. 평화의 소녀상 미니블록은 어떻게 만들게 됐는지.
평택 거리에서 무작정 매번 모금활동을 하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해 우리만이 할 수 있는 걸 찾고 싶었다. 로고나 캐릭터도 그려보자는 의견도 나왔는데, 우연히 평화의 소녀상을 미니블록으로 만들어보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이 나왔다. 당시엔 모두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자본도 없고. 모두가 무슨 소리냐면서 웃었다. 그러다 ‘한 번 해보기나 하자’라는 마음으로 인터넷을 뒤졌다. 몇몇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만든 소녀상 블록은 있지만 일반인들이 손쉽게 구매할 수 있는 방식의 소녀상 블록은 없었다. ‘없으면 한 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정말 뭔가에 홀린 듯이 시중에 파는 미니블록 중 까만색과 흰색이 많은 제품을 하나 사봤다. 즉흥적으로 2시간 만에 소녀상을 블록으로 만들었다. 만들고 보니 기분이 좋았다. 이후에 본격적으로 이걸 가지고 뭐라도 해보자는 얘기가 나온 것 같다.

Q. 막상 만들려니 어려웠던 점도 있었을 것 같은데.
아무 계획도 없이 무작정 소녀상을 블록으로 만들긴 했는데 이걸 본격적으로 판매하려면 다시 분해해야 했다. 하다못해 부품이 되는 블록 개수라도 알아야 하는데 차마 부술 수가 없었다. 다시 못 만들 것 같았다. 제일 먼저 문을 두드린 건 개인이 디자인한 미니블록을 상품으로 만들어주는 업체였다. 상담도 받아봤지만 돈이 가장 큰 문제였다. 결국 우리 평택평화나비 회원들이 일일이 다 해보자는 결론이 나왔다. 우린 돈은 없고 시간은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블록을 일일이 다 샀다. 그런데 이젠 설명서가 문제였다. 회원들 모두 문과였다. 디자인 툴을 다룰 줄 아는 사람도 없었다. 재능기부자를 찾는다는 홍보도 했다. 3D 디자인이나 블록에 관심이 있으면 와 달라, 우리보다 더 높은 대우를 해드리겠다, 전용 컴퓨터도 놔드리고 매일 커피도 타드려야지 할 정도로 절박했다. 그러나 사람은 오지 않았다. 결국 한 회원 분이 어설픈 포토샵 실력으로 밤을 새워가며 작업에 임했다. 동그라미와 네모를 그려 블록 한 칸을 만들고 이걸 복사해서 두 칸, 또 복사해서 네 칸. 일일이 하나씩 그렸다. 그렇게 설명서가 만들어졌다. 블록을 담을 OPP종이와 박스도 방산시장을 한참 돌아다닌 끝에 구입했다. 이렇게 기본적인 틀이 갖춰졌다. 우리는 정말 무식하고 비효율적인 집단이다.

   
▲ 평택 평화의 소녀상 건립을 위한 모금 버스킹. 사진제공=평택평화나비

Q. 처음엔 블록을 길거리에서 판매했다고 하던데.
최소 수량으로 만들어서 SNS나 주변 지인들을 대상으로 판매하고 모금활동에도 갖고 나갔다. 결과물이 있으니 자신감이 생겼다. 팔릴 줄 알았다. 그렇지만 생각을 해보자. 길거리에서 파는데 디자인도 별로고 박스도 후지고. 아마추어 같은 물건을 만원에 판다고 생각해보라. 나 같아도 안 산다. 더군다나 위안부 문제에 관심이 많은 건 주로 젊은 친구들인데 이들은 돈이 없다. 청소년들에게 만원은 너무 비싼 돈이다. 나조차도 고등학생 때 만원을 의미 있는 곳에 써본 적이 없다. 나이 많으신 분들은 이게 뭐라고 만원에 사냐는 말씀도 하셨다. 그날 2~3시간 동안 3개 팔았다. 그때 사주신 평택 시민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Q. 크라우드펀딩을 시작한 계기는.
길거리에서 무작정 블록을 파는 건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더 공감할 수 있는 환경과 플랫폼이 필요했다. 아주 작은 행동으로 함께할 사람들을 만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의미 있는 일에 사람들이 분명 동참해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크라우드펀딩 사이트인 ‘텀블벅’으로 옮기게 됐다. 텀블벅의 재밌는 원칙은, 목표 모금액이 100% 모이지 않으면 프로젝트가 무산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겁이 났다. 사람들이 공감을 안 해주면 어쩌지 하는 마음이었다. 사이트에 우리 이야기가 올라가고 나서 평택청년회와 평택평화나비 회원들 모두가 SNS에 공유하기 시작했다. 무슨 디도스 공격하듯이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웹사이트와 게시판에 정말 열심히 홍보했다.

Q. 첫 번째 크라우드펀딩은 966만원이 모이며 목표액의 332%를 달성했다. 인기를 예상했는지.
처음엔 300만원을 목표로 펀딩을 진행했다. 인기가 이렇게 높아지고 나서 말하는 게 의미 없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살짝 자신 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판매했을 때 반응이 굉장히 좋았기 때문이다. 믿음이 있었다. ‘평택평화나비가 될 거다’는 느낌보단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거다’는 느낌이었다. 100% 목표는 달성할 것 같았다. 300만원을 목표액으로 잡긴 했지만 500만원 정도는 달성할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이렇게까지 인기를 얻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떤 여초카페에서 공유해주신 후로 갑자기 판매량이 급증했다. 아무래도 젊은 여성분들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으신 것 같고, 무엇보다 시기도 잘 맞았던 것 같다. 2016년을 돌아봤을 때 여러 가지 안타까운 사건들이 있었고 이로 인해 한국에 젠더 감수성과 성평등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부쩍 높아진 것 같았다. 시민들의 의식 수준 변화에 우리가 잘 편승한 것 같기도 하다. 정말 감사하다.

   
▲ 첫번째 크라우드펀딩 당시 블록을 포장하는 평택평화나비 회원들. 사진제공=평택평화나비

Q. 펀딩 후 힘든 점이 있었다면.
포장하는 과정이 힘들었다. 20명 안팎의 사람들이 각자 노란색 부품 몇 개, 검은색 몇 개, 하얀색 몇 개를 일일이 셌다. 한 명은 옆에서 박스 접고, 또 누구는 설명서 접고. 이것도 힘들었지만 더 힘든 건 불량을 잡는 거였다. 아무래도 숙련된 노동자가 아니라서 부품을 잘못 셀 수 있다. 부품이 정상보다 많거나 적게 들어갔다는 걸 판단하기 위해 포장을 다 하고 무게를 쟀다. 무게가 넘으면 부품이 많다는 소리니 안심이긴 하다. 그런데 무게가 부족하면 소위 말해 ‘멘붕’된다. 그 포장을 다시 엎고 일일이 셌다. ‘그런 불량이 얼마나 되겠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많았다. 지인들까지 합세해 작업을 진행했다. 그렇지만 모두들 퇴근하고 몸이 지친 상태에서 일하다 보니 너무 힘들었을 거다. 주말도 다 반납하고 하루 종일 일했다. 고등학생 친구들이 참 고맙다. 어떨 땐 야간자율학습도 빼고 와서 밤늦게까지 작업했다. 그 친구들이 주말을 이 일에 반납하지 않았으면 못했을 거다. 그렇지만 미처 우리 선에서 잡아내지 못한 불량은 펀딩 후원자분들의 손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분들에게서 부품이 부족하다는 메시지를 받으면 우리는 A/S 차원에서 모자란 부품을 따로 보내드렸다. 우리의 불찰이지만 감사하게도 그분들이 기다려주셨다.

Q. 이후 두 번째 펀딩도 진행했는데.
텀블벅 펀딩 달성 완료된 후에도 많은 분들의 요청이 있었다. 텀블벅을 통해 보신 분들, 소문을 듣고 뒤늦게 두 번째 펀딩을 요청하신 분들도 많았다. 그렇지만 내가 강력하게 반대했다. 피해자 할머니 분들의 사연이 담긴 평화의 소녀상이 너무 상업적으로 가는 것 같아 무서웠다. 의미가 훼손될까봐 두려웠다. ‘이 문제가 언젠간 해결돼야 하는 문젠데 돈을 버는 수단으로 사용하냐’는 비난을 들을까봐 주저했다. 그렇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우린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게 목적이었고 궁극적으로는 두 번째 펀딩이 할머니들에게 더욱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는 결론이 났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다는 기대 속에서 두 번째 펀딩을 시작했다.

Q. 두 번째 펀딩에서는 목표금액의 2709%를 달성해 1억 3500만원이 모였는데.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솔직히 첫 번째 펀딩 때 모인 금액인 900만원이 넘어갈 때부턴 정신이 아득했다. 앞서 말했듯 포장하는 과정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수작업이 절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받는 분들의 불편함도 있었다. 불량이 더 많이 발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중국 공장에서 블록을 생산하고 일부포장까지 하는 쪽으로 계약을 맺었다. 며칠 전 두 번째 펀딩이 끝나고 공장에서 생산한 부품이 배송돼왔다. 블록 1만개 정도를 위한 부품들이다. 평택청년회 사무실 한 쪽 벽을 가득 메웠다. 사무실은 또다시 행복한 수난시대를 겪고 있다. 현재 박스에 설명서와 블록을 넣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지금도 나를 제외한 회원들은 열심히 일하고 있을 거다. 오늘은 인터뷰 관계상 빠지는 대신 동생을 보냈다. 그렇게 삼삼오오 모인 주변 지인들의 힘으로 블록이 완성돼가고 있다. 매일 새벽1시까지 작업하는 것 같다.

   
▲ 두번째 펀딩 후 블록을 포장하는 평택평화나비 회원들. 사진출처=평택평화나비 페이스북

Q. 펀딩을 통한 수익금은 어떻게 쓰일 예정인가.
첫 번째 펀딩 수익금은 이미 정대협에 기부했고 내역도 공개했다. 두 번째 펀딩 수익금은 평택 평화의 소녀상 건립을 위한 기부에 주로 쓰쓰고 지난 연말 추진했던 ‘평택평화나비 평화콘서트’ 비용도 충당할 것이다. 두 번째 펀딩 수익금 사용내역도 투명하게 공개해 함께해주신 분들의 소중한 마음이 훼손되지 않도록 최대한 의미 있게 사용하려고 한다.

Q. 블록을 제작하면서 보람을 느꼈을 때는 언제였는가.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김서경 작가님이 디자인하신 평화의 소녀상에서 의자에 앉은 소녀는 발꿈치를 들고 있다.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부모도 없고, 고향은 완전히 바뀌어버려 고국 땅을 채 다 밟지 못한다는 아픈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어떤 분이 소녀상 블록을 받고 리뷰에 발이 땅에 안 닿는다면서 ‘할머니들의 아픔까지 블록에 표현하다니 대단하다’고 쓰셨다. 그런데 우리 블록을 완성하면 발이 땅에 닿아야 한다. 그분이 받은 제품이 불량이었던 거다. 정말 죄송하다고, 주소 알려주시면 보내드리겠다고 댓글을 달았다. 감사하게도 기분 나빠하지 않으시고 기다려 주셨다. 우리 실수인데도 이해해주시고 새로운 의미까지 넣어주신 것에 대해 감동했다. 2차 펀딩을 진행하면서는 수많은 댓글들을 보며 보람을 느꼈다. 아이들과 함께 조립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기억하고자 후원해주신 학부모들도 계셨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고맙다는 얘기를 해주셨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은 하지만 용기 내서 하지 못하는 일들을 나서서 행동에 옮긴 게 고맙다는 말이었다. 우리는 후원해주시는 분들이 고마운데, 그분들은 오히려 우리에게 고맙다고 하셨다. 한편으로는 책임감도 느끼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도 가졌다.

Q. 앞으로도 소녀상 미니블록 프로젝트와 관련해 계획이 있는지.
지금 가장 큰 고민이다. 일단 오프라인 판매는 서울 마포구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서 진행하려고 생각 중이다. 정대협과도 논의하고 있다. 의미가 훼손될 수 있기 때문에 상품화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모두들 부정적인 의견이다. 쇼핑몰 같은 곳에서 간단하게 판매하는 건 배제하고 있다. 박물관에서만 판매한다면 해외나 도서 지방에 사시는 분들에겐 힘들 수 있다. 많은 분들에게 의미도 훼손하지 않고 아픔을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신중하게 온라인 판매 루트도 고민하고 있다. 또한 평택평화나비는 블록 판매에만 그치고 싶지 않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은 더 무궁무진할 테니까. 블록만큼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더 의미 있는 일을 멈추지 않을 거다.

Q. 소녀상 블록 이후 평택평화나비에서 다른 활동을 했는지.
평화의 소녀상 블록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평택평화나비 회원들이 더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봤다. 그러다 평택 지역에 콘서트를 열자는 얘기가 나왔다. 들떠서 가수 섭외 얘기도 많이 나왔지만 생각보다 준비가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학생회 활동 경험이 있는 회원을 통해 축제기획사에 연락해 최근 가장 인기 있는 인디밴드 ‘볼빨간사춘기’의 섭외가 이뤄졌다. 사실 가수 입장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참여한다는 사실이 좀 꺼려질 수도 있을 텐데 나서주셔서 무척 감사했다. 물론 가수에 의존하지 않고 다양한 문화제도 진행하고자 했다. 서포터즈를 모집하고 무대연출을 담당하는 무대팀, 부스활동 기획하는 부스팀, 동영상 제작하는 동영상팀으로 나눠 활동했다. 그렇게 지난달 10일 평화콘서트를 개최했다. 기획사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평택평화나비가 만든 콘서트라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올해도 콘서트를 개최하고 싶어서 콘서트를 마치며 ‘내년엔 문제가 해결돼서 축하콘서트를 열고 싶다’는 멘트를 했다.

   
▲ ⓒ투데이신문

Q. 평택평화나비에 소속되기 전에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졌는지.
딱 교과서에 나오는 만큼만 알고 있었다. 표면적인 역사이자 과거에 일어난 일, 씻을 수 없는 아픔 정도로 기억하고 있었다. 평택평화나비에 들어온 후에야 할머니들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보게 됐다. 우리가 역사라고만 알고 있는 ‘위안부’라는 이름 속엔 한 소녀가 있었고, 그저 교과서 속의 소녀에 불과하지만 그 주인공은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뺏긴 상태였다. 그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울리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 그들의 목소리로 기억해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다.

Q. 일본군 위안부의 정식 명칭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다. 또 이를 표기할 땐 작은따옴표를 붙여 ‘위안부’라고 표현해야 한다는데.
나는 관점을 달리 하고 싶다. 정식 명칭보다 할머니 입장에서 생각하는 게 중요하다. 사실 ‘성노예’라는 말이 가장 정확한 표현이다. 자발성이 배제된 단어다.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정신대’는 사실 큰 범위에서 근로를 하러 가신 분들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근로 정신대에도 아픈 내용이 있지만 성노예로 끌려가신 분들을 지칭하는 말은 아니니 배제한다. ‘종군 위안부’라는 말도 있다. 따를 종(從)을 쓴다. 군을 따라갔다는 말이다. 이건 정말 잘못된 표현이니 웬만하면 정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성노예란 단어를 써야 하느냐. 이건 할머니들의 입장을 생각해봐야 한다. ‘당신 성노예인가요?’란 말을 들으면 누가 놀라지 않겠는가. 노예라는 말도 충격인데, 특히나 할머니 세대는 성이라는 말을 감히 담을 수도 없을 만큼 민감한 세대다. 굉장히 충격적인 단어다. 그걸 완화시키는 표현으로 ‘위안부’가 있다. 작은따옴표를 붙인 ‘위안부’는 따옴표가 없는 위안부와는 차이가 있다. 가해자인 일본군이 작성한 문서에 등장한 이 단어를 인용했다는 의미가 담겼다. 일본군에게 충분히 책임이 있다는 의미다. 또 따옴표를 표기하면 그 단어에 주목하게 되기도 한다. 단순히 지칭하는 걸 넘어서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는 표시도 될 수 있겠다. 그래서 위안부를 표기할 땐 꼭 작은따옴표를 붙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 이번달 초 25주년을 맞은 수요집회 ⓒ뉴시스

Q. 2015년 12월 28일 체결된 한일 위안부 합의 폐기를 주장한다. 이 합의의 문제점은 무엇인지.
얼마 전에 아베 신조 총리가 한일 위안부 합의를 거론하며 ‘10억엔 냈으니까 소녀상 철거하라’고 말했다. 대놓고 압박한다. 그렇지만 그 10억엔은 전혀 피해자 할머니들을 고려해서 나온 게 아니다. 할머니들이 25년째 요구하고 있는 7가지 사항이 하나도 반영되지 않았다. 또 어떤 문제의 해결은 가해자와 피해자, 중재자가 만나서 해결하는데 이 합의에서 정작 피해자는 배제되고 가해자와 중재자만 있는 상태에서 문제를 그냥 봉합해버렸다. 게다가 그 10억엔도 ‘거출금’이라는 이름으로 내놨다. 마음 착한 일본인들이 재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정도의 느낌인 거다. 그렇지만 할머니들은 돈을 받고 싶은 게 아니라고 계속 얘기해오셨다.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들으라는 거다. 일본은 자신이 정확한 가해자임을 인정하고, 법적 책임을 지고 ‘보상’이 아닌 ‘배상’을 해야 한다.

Q.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사이에 둔 한일관계에서 올바른 방향은 무엇일까.
한 번은 뉴스를 조사하다 이런 문구를 봤다. ‘한국과 일본의 외교관계에 걸림돌이었던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합의됐다’는 멘트였다. 충격적이었다. 이건 정부 대 정부 같은 외교 문제로 치환할 게 아니라 법적 문제로 가져가야 한다. 피해자 길원옥 할머니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사람이 응당 잘못을 했으면 잘못했다고 사과라도 하는 게 맞다. 그게 사람 된 도리다.’ 사람으로서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를 받고 싶다는 말이다. 그 말은 곧 피해자 할머니들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으로밖에 안 보이는 거다. 외교 문제라고 표현하지 말고 법적인 차원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명확하게 짚고,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충분한 사과와 책임을 질 수 있는 방향으로 가는 게 올바른 방향이다. 그렇게 할머니들이 25년을 싸워오셨다.

Q.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할머니들이 연세가 많으시다. 할머니들의 삶이나 복지에 대해 더욱 세세하고 현실적인 도움을 줘야 한다. 물론 그분들을 완전히 위로해드릴 순 없다. 하지만 남은 생이라도 정말 조국에서 행복하고 잘 살아가실 수 있게 현실적인 도움을 드릴 수 있는 정책을 정부 차원에서 고민해야 한다. 또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학술적 연구도 많이 이뤄져야 한다. 피해에 대한 더 많은 문서와 증거들이 나와야 한다.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이에 임했으면 좋겠다.

Q. 지난달 부산에 평화의 소녀상 설치를 두고 마찰이 있었고, 건립 이후에도 일본 측의 압박이 들어오고 있는데.
우선 실천하며 살겠다고 했던 사람으로서 그 일이 있을 때 현장에 내가 못 갔다는 부분이 안타까웠다. 사회는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으며 아픔은 공유되고 공감될 때 해결에 더욱 가까워진다. 그렇지만 그때 내가 가까이 가지 못했던 게 참 안타깝고, 몸 써서 소녀상을 지켜주신 많은 시민들 덕분에 자리를 찾았다는 점에서 무척 고맙다. 부산은 아무래도 일본에 더 가깝고 일본인들도 많이 온다. 그렇다면 더더욱 부산에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져야 한다. ‘용서는 하지만 잊지는 않겠다’는 말이 있다. 유대인들이 많이 하는 말이다. 독일 정부는 나치 행각에 관해 매번 사과한다. 진정으로 사과는 했으니까 용서는 하는 거다. 그렇지만 독일에 일부러 수용소와 게토를 남겨둔다. 대대손손 보여주겠단 의미다. 평화의 소녀상도 동일하다고 본다. 일본이 진정성을 갖고 이 문제에 대해 할머니들에게 정중히 사과하고 할머니들의 요구를 정확히 지킨다면, 그 사과를 받아들일 수는 있을지는 몰라도 영원히 잊지는 말아야 한다.

   
▲ 부산 소녀상 철거를 막는 시민들 ⓒ뉴시스

Q. 평화의 소녀상은 가장 평화적인 목소리인 것 같은데 전국 건립을 반대하는 입장도 있다.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현재까지 총 239명이다. 지난달 6일 박숙이 할머님이 돌아가신 후 39분의 생존자가 계신다. 그렇지만 이게 전부가 아닐 거다. 자신이 피해자인데도 고백하지 못하시는 분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일본군이 우리나라에서 그분들을 서울에서만 데려갔겠냐. 전국에서 데려갔을 거다. 소녀상이 전국에 세워져야 한다는 의견에 반대하는 분들은 ‘아픈 과거를 왜 들춰내냐’고 말씀하신다. 왜 들춰내야 할까. 우리 평택 땅에서도 끌려가신 분들이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미신 같은 개념이 아니다. 그분들의 의미를 기리는 거다. 마치 6·25 참전용사들에 대한 동상이 전국 곳곳에 서 있는 것처럼. 우리도 똑같이 기리는 거다. 할머니들은 이제 나이 먹어서 나와서 활동하는 게 힘들다고 하신다. 자꾸 어렵다고 하시면서도 왜 나오시냐고 여쭈었더니 ‘앞으로 이런 일이 없어야 하니까’라고 하셨다. 후손들이 이런 일을 알고 몸으로 체험해야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다.

Q. 전 세계 각지에도 소녀상이 설치되고 있는데.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여러 국가에게 아픔을 남겼다. 일종의 책임으로서 소녀상이 세계적으로 퍼지는 걸 좋은 현상으로 보고 있다. 지난해 10월 소녀상을 설치한 중국의 사례가 참 의미 있다고 본다. 중국 전통복장인 치파오를 입은 소녀상이 세워졌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수탈당한 민족의 모습을 상징할 수 있는 쪽으로 의미를 더 부여해서 세워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각에서는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이 위안부 문제 일으킨 것에 대해 한국정부가 책임을 지지 않았는데, 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만 책임을 묻느냐고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그렇지만 다른 문제다. 한국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국 정부는 당연히 사과해야 한다. 한국은 한국대로 사과하고, 일본은 일본대로 사과해야 한다. 베트남에도 한국군 위안부와 관련해 한국군의 이름이 적힌 증오탑이 설치돼 있다. 가슴 아프지만 우리도 그걸 보고 잘못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비슷한 의미에서 세계적으로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지는 것도 좋은 현상인 것 같다.

Q. 개인적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바라는 사회가 있다면.
피해자 할머니들의 연세가 높아지고 있다. 할머니들의 직접적인 목소리로 활동하는 게 더 어려워지고 있다. 자칫 잘못하면 쉽게 잊힐 수 있고, 마치 박물관에 있는 유물이나 고대 문서처럼 박제돼버릴 수도 있다. 정말 영원히 기억되고 그 이야기가 이어졌으면 좋겠다. 우리나라에서 힘들게 사셨던 할머니 한분 한분의 삶이 우리의 삶에도 자연스럽게 녹아들어야 한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고 교육과정에서도 상세하게 다뤄야겠다. 각 지역에서도 소녀상을 통해 더 보고 이해하고 대대로 전달될 수 있으면 좋겠다. 또 이게 더 나아가 전쟁터에서 아픔 받고 있는 여성들에게도 전달돼서 그분들도 피해로부터 벗어나는데 큰 힘이 됐으면 좋겠다. 1919년 일어났던 3·1운동이 인도를 비롯한 여러 독립운동에 영향을 줬다.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영향을 미쳤던 민족이다. 이처럼 우리의 좋은 사례가 앞으로 전쟁으로 고통받고 있는 여성의 인권에도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한국 사람들의 삶 속에 더 정확하고 올바르고 아름답게 이 문제가 잘 뿌리내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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