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현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김종현 칼럼니스트】 현대사회에 갑작스레 떨어진 원시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원시 틴에이저(Encino man. 1992)’라는 미국 영화가 있다. 빙하기의 원시인이 동굴 속에 갇혀 냉동 됐다가 현대에 발견되고 깨어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주인공 원시인 ‘링크’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많은 것을 접한다. 힙합을 듣고 전자오락을 하고 기계들과 마주친다. 그는 원시의 습성과 현대사회의 규칙 사이에서 좌충우돌 해가며 점차 20세기에 적응해 간다.

한 인물이 까마득한 과거의 한 지점으로 부터 현대의 한 지점에 ‘도착’하는 일은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두 지점 사이의 역사를 모를 때 그 것은 단순한 공간의 이동일 뿐이다. 세상이 어떤 변화들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는지 알 수 없다면, 그는 결코 현대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 영화의 상당분량은 현대문명에 익숙해져 가는 주인공을 그린다.

어느 한 문명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그 바탕에 흐르는 역사적 맥락에도 익숙해져 간다는 뜻이다. 역사는 동시대를 사는 각자의 경험들이 직조되어 만들어진 무늬다. 때문에 가까이서 감정의 씨줄과 날줄이 어떻게 짜여 가는지 흐름을 경험해야 한 사회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의 속살을 제대로 이해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대권행보 중에 일으킨 실수들이 심상치 않다. 실수는 누구나 한다. 그러나 그가 10년 만에 한국사회와 재회하면서 보여준 장면들의 진짜 의미는 서투른 행동 뒤에 있다.

반 전 총장이 귀국 첫날 지폐 두 장을 한꺼번에 넣다가 빈축을 산 공항철도 발권기는, 그가 한국에 없었던 2008년에 지하철 무인 발권 전면시행으로 보편화 된 것이다. 이 조치로 각 역들의 매표소가 폐쇄됐고, 역무원들은 일자리를 잃을까 불안해했다. 발권기 사용법 이전에, 그는 과연 사각 모니터를 가진 기계와 불안한 눈빛을 가진 노동자 사이에 존재하는 저울의 역사에 공감할 수 있을까. 기어이 표를 끊고 향한 서울역에서 의전을 이유로 노숙자들이 쫓겨난 것에 그가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걸 보면 이 궁금증의 답은 왠지 비관적이다.

오늘날 노력은 용도 폐기된 잠언이다. 식사를 거른 채 지하철 스크린도어 정비 중 숨진 19살 청년의 가방에서 먹지 못한 컵라면과 나무젓가락이 나온 건 아직 일 년도 안 됐다. 이런 혈전장애 사회의 청년들을 향해 더 노력하라는 그의 충고는, 그나마 유일한 자산인 젊음을 죽지 않을 정도로만 조금씩 썰어 팔아서 사회를 떠받치라는 무참한 언사다. 부모들의 가슴에 매일 어떤 상처가 새겨지는지 짐작 못하는 듯하다.

그와 대한민국의 잘못된 만남은 발길이 미치는 곳 마다 계속되고 있다. 건국 이래 최대 시민운동인 대통령 탄핵 촛불시위에는 기회가 되면 참석하겠다는 관찰자 입장인 반면, 세월호 참사에 도무지 믿기지 않는 자세로 일관한 정부를 믿어 보라고 한다. 시장 상인들의 화재피해 앞에서 대외 이미지를 걱정한다. 기자들의 위안부 관련 질문은 더 받지 않겠다고 한다. 의전은 자꾸 뒷말을 남긴다. 실수냐 아니냐를 떠나 반 전 총장이 보여주는 시대감각은 2017년의 대한민국이 받아 주기엔 많이 낡았다. 유엔 사무총장 경력을 대권의 지렛대로 이미지화 시키는 방식조차 구시대적이다.

물론 모든 낡음이 그릇 되진 않다. 앤틱 가구는 오래 될수록 가치가 있다. 골동품을 뜻하는 앤틱(antique)의 어원은 라틴어 안티쿠스(antiquus)로, 옛날, 고대의, 낡은 등의 의미가 있다. 골동품의 가치는 그 것을 사용하던 손길의 역사가 배어나올 때 생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대중이 고령의 반 전 총장에게 기대하는 바도 그 개인의 역사와 경험이다. 그러나 역사가 새겨지지 않은 사물이 값나가는 골동품이 되지 못하듯, 정치인에게 있어 동시대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지 않고 먹은 나이는 장점이 아니다.

지금 반 전 총장이 찾아다니는 한국사회는 그가 떠나 있던 지난 10년간 한반도에 켜켜이 쌓인 감정지층이 융기와 침강을 반복하여 만들어낸 지형이다. 그 복판에 있었던 사람들은 발길에 채이는 돌부리 하나 조차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지 기억한다. 하지만 그는 시민들이 걸어오며 표시한 여행지도조차 제대로 읽고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 시대에 뒤쳐진 낡은 안목으로는 현재는 물론 미래도 이끌 수 없다. 우리 정치에서 이는 비단 반 전 총장만의 문제는 아니다. 정가에는 ‘호모 안티쿠스 반기무누스’ (Homo Antiquus Bankimoonus)가 넘친다.

처음의 물음으로 돌아간다. 현대 사회에 떨어진 과거의 인물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바로 시간이다. 수많은 ‘호모 안티쿠스 반기무누스’에겐 현대문명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 한 세계가 도달한 흐름을 배울 시간이다. 정치 지도자가 되는 건 그 다음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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