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부천 도담지역아동센터 김유화 센터장

 

   
▲ 부천 도담지역아동센터 김유화 센터장 ⓒ투데이신문

지역아동센터, 돌봄 필요한 아이들을 위한 공간
시민단체가 공단 근로자 자녀들 돌보며 시작돼

기초생활수급자, 한부모 가정 아동 우선 선발
복지, 최우선 목표···급식 제공 및 방과후 돌봄

전국 지역아동센터 4300여곳, 농어촌 인력난 심각
프로그램 운영비, 정부 지원 20%·후원 사업 80%

아이들 긍정적으로 변하는 모습 볼 때 가장 보람돼
1세대 지역아동센터장으로서 모델링 역할 하고파

【투데이신문 전소영 기자】소파 방정환 선생이 말했다.

“어린이를 내 아들놈, 내 딸년하고 자기 물건같이 알지 말고 자기보다 한결 더 새로운 시대의 새 인물인 것을 알아야 한다”

그는 아동보호운동의 선구자로서 아이들을 부모의 소유물이 아닌 하나의 인격체로 보고 그 존재 가치를 향상시키기 위해 다양한 사회운동을 이끌었다. 방정환 선생은 30년이라는 결코 길지 않은 삶 가운데 3할을 아이들을 위해 바쳤다.

내 자식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해 방치하고 내다 버리는 부모들이 판치는 이 시대에도 어머니의 마음으로 지역의 아이들을 품는 이가 있다. 바로 도담지역아동센터 김유화(59) 센터장이다. 그 역시 방정환 선생 못지않게 그동안 살아온 삶의 많은 시간을 아이들을 빼곤 설명되지 않는다.

김 센터장은 시청 공무원과 시민단체가 모여 만든 방과후 사업의 시초라 할 수 있는 ‘복사골 교실’에서의 활동 경험을 바탕으로 2001년 5월 자신의 집에서 인근 초등학생들을 데리고 공부방을 열었다. 그것이 바로 도담지역아동센터의 시작이었다.

IMF의 여파로 당신의 경제적 사정도 녹록지 않았지만 더 어려운 형편의 아이들을 돕기로 마음먹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사회적으로 지역아동센터는 물론 공부방이라는 개념조차도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니 도시 차원의 운영비 지원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지비도 채 안되는 아이들이 내는 원비와 자신의 사비를 털어 근근이 이어나갔다.

김 센터장은 공부방에 오는 10명 남짓의 아이들에게 방과후 함께 문제집을 풀며 기초 학습을 도왔다. 사실 그가 아이들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것은 단순히 수학 문제 하나, 영어 단어 하나가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흔히 말하는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지 못한 아이들을 위해 사랑받는 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생채기난 마음을 치유해주고자 했다.

그의 예쁜 마음이 하늘에도 닿은 것일까. 2004년 아동복지법 개정에 따라 민간 공부방이 ‘지역아동센터’로 인정되며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됐다. 그러면서 사회적으로도 지역아동센터를 지원하기 위한 후원 사업들이 점점 늘어났다. 하지만 전국에 수천여개에 달하는 지역아동센터 수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다. 김 센터장은 그 누구보다 부지런하게 움직이며 아이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고자 노력했다. 덕분에 도담지역아동센터는 초등학교 앞 문방구 아주머니가 학부모들에게 추천해줄 만큼 지역 주민들에게 인정받고 있다.

도담지역아동센터는 올해 개소 16주년을 맞았다. 도담지역아동센터의 긴 역사만큼, 김 센터장 인생의 강산도 2번이 바뀌었다. 정년까지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5년. <투데이신문>은 경기도 부천에 위치한 도담지역아동센터를 찾아 김유화 센터장이 아이들과 함께한 지난 16년, 정년까지 앞으로의 5년에 대해 들어보았다.

   
▲ 부천 도담지역아동센터 김유화 센터장 ⓒ투데이신문

Q. ‘지역아동센터’에 대해 모르는 분들을 위해 간단히 설명 바란다.

지역아동센터는 학교 수업을 마치고 방과후 집에 혼자 있거나 돌봄이 필요한 아이들이 와서 부모님이 퇴근할 때까지 안전하게 보호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 안에서는 기본적인 학습 지도를 비롯해 다양한 문화체험 활동이 진행된다.

Q. 지역아동센터라는 개념이 처음 생겨난 때는 언제인가.

1960~1970년대 공업화 시절 근로공단 현장에서 일하던 기혼 여성들이 많았다. 그들의 자녀들은 학교를 마치고 부모가 퇴근하기 전까지 안전하게 있을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다. 이때 뜻있는 시민단체들이 그 아이들을 모아 숙제를 도와주거나 책 읽기 등 기초 학습을 지도하면서 시작된 것이 바로 ‘공부방’이다. 1990년대 후반 우리나라에 IMF로 경제 위기가 찾아오면서 공부방을 찾는 아이들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각 지역에서 시민단체에 의해 운영되던 공부방들은 경제적 이유로 운영하는데 있어 한계를 느꼈고, 더 이상 지역 차원에서가 아닌 정부가 해야 될 일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오랜 시간 협의 끝에 ‘아동복지법’을 기반으로 민간 공부방을 지역아동센터로 지정해 2004년부터 보건복지부 소속으로 법제화됐다.

Q. 지역아동센터에는 주로 어떤 아이들이 모여 생활하는지. 선발 기준이 무엇인가.

2017년부터 신규 아동은 법적으로 초등학교 1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만 받도록 돼있다. 물론 기존에 있던 아이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다닐 수 있다. 선발 기준은 아동복지법에 의한 지역아동센터 매뉴얼에는 만 18세 이하 아동은 모두 가능하다고 나와있지만 지역아동센터 관계법에 따라 우선순위가 구분돼있다. 1순위는 국가에서 인정하는 결손가정, 기초생활수급자나 한부모 가정 등이 해당된다. 그리고 국가에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부모의 이혼 위기나 가정의 경제적 파탄으로 사각지대에 놓인 아동이 예외규정으로 2순위가 된다. 일반 가정의 아동도 가능하지만 이는 전체 정원의 10%만 받을 수 있도록 돼있다. 정원은 지역아동센터 크기에 따라 다르며, 한 평당 1명인 것으로 알고 있다.

Q. 지역아동센터에서는 아이들을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서비스를 제공하는가.

‘복지’가 최우선이다. 아이들을 부모가 귀가하기 전까지 안전하게 보호해주고, 결식을 방지하기 위한 급식을 제공한다. 뿐만 아니라 지역아동센터에는 보통의 가정에서 경제적 지출을 통해 경험하는 문화생활을 하기 어려운 아동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다양한 체험 기회를 부여한다. 또 학교생활에 어려움이 없도록 기초적인 학습을 지도하고, 개중에 능력이 뛰어난 아동은 그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도와준다.

   
▲ <사진 제공 = 부천 도담지역아동센터>

Q. 불안정한 가정환경의 저소득층 아이들에게는 정서적 지원도 필요할 것 같다.

아무래도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줄 상담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어려서 부모님으로부터 안좋은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들에게는 트라우마가 남아있다. 그것들이 자신이 불합리한 상황에 닥쳤을 때 소리를 지르거나 울음으로 해결하려는 것으로 표출된다. 그런 부분들은 어쩔 수 없이 상담을 통한 해결이 필요하다. 아이와 많은 대화를 통해 ‘너는 소중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시켜줌으로써 본인 스스로 변화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것이 지역아동센터가 하는 중요한 역할 중 하나라고 본다.

Q. 현재 전국 지역아동센터의 현황은 수용해야 할 아동 인구 대비 어느 정도 수준인가.

이제까지 추산된 전국 지역아동센터의 현황은 4300여곳으로 알고 있다. 서울 같은 도시지역은 지역아동센터가 부족하진 않다. 하지만 농어촌 지역은 한 지역아동센터를 중심으로 4km 밖의 아이들도 수용하고 있다. 사회복지사나 봉사자의 인력 수급 문제 등으로 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힘든 상황이다.

Q. 지역아동센터에 근무하는 교사들은 어떻게 선발하는지. 지원자가 많은 편인가.

대부분 사회복지사다. 정규직으로 근무하시는 분들도 있고 비정규직도 있다. 비정규직은 파트타임 교사를 의미하는데 지역사회나 정부에서 일자리 형태로 여성 고급인력을 모집해 각 지역아동센터에 ‘파견 아동복지사’로서 활동하게끔 한다. 지역아동센터에서 직접 관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요즘에는 일을 하고자 하는 여성들이 많기 때문에 경쟁률이 꽤 높다고 한다.

   
▲ 부천 도담지역아동센터 김유화 센터장 ⓒ투데이신문

Q. 부천 ‘도담지역아동센터’(이하 도담)의 탄생 배경이 궁금하다.

당시 부천여성노동자회에서는 여성 교육의 일환으로 방과후 교사와 간병인을 양성했다. 그곳의 활동가였던 나는 방과후 교사 파견을 관리하는 일을 하다 우연한 계기로 직접 방과후 교사로서 활동하게 됐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시청 공무원과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모여 만든 방과후 사업인 ‘복사골 교실’에서 범박초등학교 아이들을 만나면서 공부방 개소에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2년 동안 복사골 교실 교사 활동을 마치고 거주지였던 괴안동과 범박동 아이들을 중심으로 2001년 5월 ‘도담공부방’이라는 이름으로 첫 발을 내디뎠다.

Q. 1세대 지역아동센터라고 할 수 있는 도담공부방의 당시 모습이 궁금하다.

제대로 갖춰진 책상 하나 없었고, 지금처럼 간식을 제대로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당시 공부방 위치는 괴안동으로, 범박동에 사는 아이들이 오기에는 거리가 상당해 직접 차량 운행을 했다. 작은 티코 한 대에 여러 명을 꾸역꾸역 태워 다녔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는 국가적 차원의 운영비 지원이 전혀 없었다. 그나마 부천 지역의 공부방을 위해 일해주시던 목사님이 계셨다. 목사님의 후원 활동으로 적지만 공책, 색연필 등 학용품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초라했다(웃음).

Q. 수많은 아이들을 이끄는 일이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쉽지 않다. 무엇보다 아이와 교사 간의 신뢰가 가장 중요한 것 같다. 교사들끼리 의견을 모아 아이들에게 어떻게 접근하는 것이 좋을지 많은 고민을 한다. 우리끼리 답을 찾기 어려울 때는 슈퍼비전을 통해 여러 통합 사례를 바탕으로 도움받기도 한다.

Q. 센터장님의 교육관이 궁금하다.

교육관까지는 아니지만 내가 사람들에게 지역아동센터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나라 사회에서 혼합 학년이 모여 놀 수 있는 공간은 지역아동센터뿐이다’라고 한다. 과거에는 한마을 아이들끼리 나이에 상관없이 함께 어울려 놀다가 밥 먹는 시간도 까먹을 정도였는데 사실 요즘은 그런 모습을 찾기 힘들다. 지역아동센터에서의 생활을 통해 아이들이 사회생활을 배울 수 있길 바란다.

Q. 그동안 몇 명의 아이들이 도담을 거쳐갔나. 가장 기억에 남는 친구가 있다면.

정확한 인원은 알지 못한다. 1년에 평균 6명 정도 졸업한다고 계산하면 16년 동안 100여명 정도 거쳐가지 않았을까 싶다. 기억에 남는 친구는 말썽을 많이 부렸던 남학생 두 명이다. 선생님이 다그치면 말을 듣기는커녕 책상 밑에 들어가 장난치고 둘이 싸움도 많이 했다. 결국 초등학교 6학년 굉장히 심하게 다투고 거리가 멀어지게 됐다. 그런데 한 3년 후, 중학교 3학년이 되던 해 둘이 함께 나를 찾아왔다. 보이지 않던 아이들이 갑자기 나타나니 대뜸 무슨 사고 친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섰다. 알고 보니 둘이 화해를 하고 가장 먼저 생각난 사람이 나였다면서 미안하고 고맙다고 찾아온 거였다. 나역시 그저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에도 시험이 끝나면 종종 찾아왔고 지금도 연락을 하며 지낸다.

Q. 그 친구들은 도담에서 보낸 시간을 어땠다고 얘기하던가.

얼마 전 모 방송에 우리 지역아동센터가 출연했는데 그때 두 친구가 도담 졸업생으로서 인터뷰를 했다. 그때 ‘우리는 당시 소위 말해 놀던 애들이었다. 만약 도담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양아치가 됐을 것이다’라고 얘기하더라(웃음). 도담에서 쌓은 다양한 경험이 자신들의 살아가는데 활력소가 된다고 하니 고맙다.

Q. 지역아동센터 운영비는 어떻게 조달하고 있나.

정부에서 지원되는 운영비는 센터에서 근무하는 사회복지사의 급여로 대부분 사용된다. 그래서 운영비로는 센터에서 기본적으로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드는 비용에 20% 밖에 조달이 안된다. 나머지 80%는 후원 사업으로 진행된다. 아이들에게 제공되는 대부분의 다양한 체험 활동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기업 사회 공모실에서 내놓는 프로포절(Proposal) 사업으로 이뤄진다.

Q. 운영비 후원은 잘 되고 있는가.

CJ나눔재단인 ‘도너스캠프’나 네이버 온라인 기부포털 ‘해피빈’처럼 우리가 진행하고자 하는 사업을 보고 사람들이 후원금을 지원할 수 있는 매칭 사업이 있어 많은 도움을 받는다. 하지만 개인 후원은 정말 어렵다. 내가 능력이 부족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센터를 운영하는 16년 동안 확보한 개인 후원자는 15명이다. 아무래도 개인 후원이 안정적이기 때문에 많이 있으면 좋겠지만 쉽지 않다. 때문에 프로포절 사업에 주력하는 편이고, 나를 거치지 않고 아이들에게 직접 용돈이나 장학금을 연결해줄 수 있는 것들을 많이 찾고 있다.

   
▲ 부천 도담지역아동센터 김유화 센터장 ⓒ투데이신문

Q. 지역아동센터를 운영하면서 보람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인가.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아이들이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 또 내가 모르는 제3자가 도담에 대해 칭찬하고 있다는 얘기가 들려오면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Q. 16년 동안 센터장님이 아이들을 위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데는 누구의 지원이 가장 컸는지.

집에 있는 가족들의 영향이 가장 컸다. 보통 오전 일찍 출근하고 오후 11시 전에는 집에 들어가기 어렵다. 가족들이 나의 이런 생활패턴을 이해해주지 않았다면 절대 지금까지 할 수 없던 일이다. 때문에 누구보다 가족에게 고맙고 감사하다.

Q. 40대부터 60대가 되기까지 중년의 세월을 오롯이 지역아동센터에 바쳤다. 아쉬움은 없는가.

일을 하면서 관절이 많이 상했다. (내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는) 건강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또 가정에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지 못했다는 점. 센터장으로서 아쉬운 점은 관련 공부를 좀더 빨리 시작했다면 지금보다는 내 활동 범위가 넓지 않았을까 싶다.

Q. 향후 센터장으로서 활동 계획 및 목표가 있다면.

단순히 센터장에만 머무르고 싶지 않다. 1세대 지역아동센터를 운영하는 센터장으로서 후배들의 모델링 역할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를 포함한 1세대 센터장 가운데 대학원 공부를 시작한 사람이 많다. 현재 은평구 서울기독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올해부터는 앞으로 지역아동센터에서 근무하고자 하는 학생들의 실습 지도를 담당하게 됐다.

Q. 센터장으로서 꿈꾸는 앞으로의 도담은 어떤 모습인가.

아프리카 속담에 ‘한 아이를 위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센터에 있는 아이가 나 하나의 노력만으로는 절대 행복할 수 없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채워줄 사람, 심리적 상처를 치유해줄 사람 등 지역사회에서 여러 기관들과 함께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 활동했으면 좋겠다.

Q.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지역아동센터는 지역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시설임은 틀림없으며, 특히 경제가 어려울 때일수록 더욱 그렇다. 지난해 12월부터 상담문의가 쏟아지고 있지만 (인원이 한정돼 있기 때문에) 예비 초등학교 1학년이 아니면 속사정도 들어보지 못하고 돌려보내는 경우도 많았다. 아직까지 정부가 제안한 지역아동센터 운영 기준은 미약하다. 많은 아이들이 센터의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을 수 있고, 그곳에서 근무하는 선생님들도 마땅한 보수를 받고 일할 수 있도록 정책이 바뀌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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