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현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김종현 칼럼니스트】 벌건 등짝을 겹겹이 포갠 채 네모난 패들이 엎드려 있다. 녀석들이 어떤 그림을 감추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신중한 손길로 맨 위의 한 장을 집는다. 엄지와 검지만으로 빠르고 맵시 좋게 뒤집는다. 바닥에 깔린 패들과 그림을 맞추자 희비가 엇갈린다. 그제야 비로소 불확실한 미래는 현실이 된다. 고스톱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와 벌이는 줄다리기다.

여느 명절처럼 이번 설 연휴에도 전국의 많은 가정에서 고스톱판이 벌어졌을 것이다. 인간의 심리가 변수로 작용하는 고스톱에선 아무리 상대의 패와 남아 있는 패의 확률을 계산해도 도무지 셈이 닿지 않는 공백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게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미지의 공백에 붙인 이름이 ‘운’이다. 그 운에 긍정적 편향을 담은 희망의 노동이 고스톱이다. 따는 사람은 없는데 잃는 사람만 있다는 이 놀이는, 그러니까 매 판마다 참가자의 운을 시험하기 위해 희망을 소진한다.

큰 희망은 큰 실망을, 작은 희망은 작은 실망을 안긴다. 명절 고스톱은 가족끼리 하는 놀이라 판돈이 작고, 판돈이 작은 만큼 희망도 소소하다. 당연히 낙담의 폭도 작다. 따는 사람이나 잃는 사람이나 몇 시간 동안의 작은 도전은 사소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사소한 희망마저 소중하다. 다음 패가 좋을 것이라고, 다음 판엔 내가 돈을 딸 것이라고 믿는다. 등과 무릎이 쑤시도록 치다 보면 언젠간 자신에게도 좋은 운이 들 것이라는 믿음이다.

운이 일정한 법칙 아래 놓여 있다고 믿는 게 운세다. 새해가 되면 운세 사이트가 검색어 상위에 오른다. 사람들은 사주니 토정비결이니 마음에 드는 괘를 확인해서 행운을 약속 받고 싶어 한다. 어차피 봄이 오기 전에 거의 다 잊어버리곤 하지만, 그래도 기분 좋은 운세 결과에 기쁨을 누렸던 연초의 기억은 삶과의 마찰 때문에 닳아가는 에너지를 종종 보충시킨다.

관계와 관계로 이루어진 삶에서 스스로의 힘만으론 어찌 할 수 없는 파도가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럴 때, 사람들은 행운이야 말로 인간이 기댈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 될 수 있음을 자주 경험한다. 쓰리고에 피박에 따따블 행운이 올 수밖에 없는 운명, 높이 뜬 태양 아래 천금을 희롱할 거라는 운명, 사람들은 그런 운명의 주인공이 자신이 되길 원한다.

그러니 어쩌면 사람들이 믿는 것은 판돈을 딸 거라든가 사업이 번창할 거라는 식의 운명론이 아니다. 자연상태에서 자주 볼 수 없는 낮은 확률의 행운이 자신에게 올 거라 기대하는 것은, 다르게 보면 자신이 행운을 맞이할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는 뜻이다. 만약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까지 돌아올 몫의 행운은 없다’고 생각한다면, 매주 로또를 사는 사람이 줄어들어 1등은 소액이 될 것이다. 거액의 행운은 사라진다.

고스톱을 치든 운세를 보든 로또를 사든, 사람들이 믿는 것은 운명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와 줄다리기를 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행운이 올 것을 믿는다. 행운을 갈망하는 누구에게나 스스로 운명의 주인공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는 믿음이 무의식에 깔려 있다. 자신의 높은 가치를 믿는 중이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설이 왔고 정유년이 됐다. 비록 알 수 없는 하루하루가 겹겹이 포개져 있어 불확실하지만, 삶은 아직 오지 않은 행운이다.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