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학자 이희진

【투데이신문 이희진 칼럼니스트】 지난 번 역사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듣고 사람들이 감염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 언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방송에서 호응을 받으며 엉뚱한 정보 흘리는 일은 계속되고 있다. 물론 방송이라는 것이, 한 번 일정 잡으면 도중에 문제 생겼다고 그만 두기도 어려운 구조이니 어쩔 수 없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그쪽 사정일 뿐이고, 그렇다고 해서 역사에 대해 잘못된 정보 흘리는 행각을 두고 보기만 할 수 없으니 이어지는 문제들도 내친 김에 짚어 보고자 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우선 성왕의 명예부터 찾아주고 싶다. 어쩌다 어른의 식사(史)를 맡은 인기 강사는, 강연 중에 성왕이 숙원이던 한성지역을 신라의 배신으로 빼앗긴 다음 분을 참지 못해 앞뒤 가리지 않고 전쟁을 일으켰다는 식으로 몰아갔다. 고구려의 신중함과 비교까지 해가며 방송에 이런 내용을 내보내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은 성왕이 분노에 눈이 어두워 앞뒤 가리지 못하고 일부터 벌이는 인물인 줄 알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기록에 남겨진 사실은 다르다. 성왕은 배신당한 다음에도 이 문제를 신라와 대화로 해결하기 위해 애썼다. 하다하다 누이동생을 진흥왕의 후비로 보내기까지 했다. 누이동생과의 관계가 어땠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어쨌든 피붙이를 시집보낼 정도면 성왕이 얼마나 신라와의 관계를 무난하게 유지해 나아가려 했는지는 분명해질 것이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진흥왕 측에서 챙길 것만 챙기고 백제에 보답을 해주지 않자, 4년이나 지난 후에야 힘으로 해결하려 한 것이다. 이런 와중에도 고구려에 배후를 찔릴까봐, 성왕은 먼저 고구려를 공격해서 예봉을 꺾은 다음 신라와 전쟁을 시작했을 정도로 신중하게 움직였다. 그랬던 성왕이, 속사정 모르는 인기 강사의 한마디 때문에 앞뒤 가리지 못하는 성질 급한 왕으로 몰려버렸다.

이와 함께 신라의 배신행위를 미화한 것도 사실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 그는 신라가 배신을 거듭하며 이익을 챙겨 결국 고구려와 백제까지 흡수한 결과를 두고, ‘이것이 과연 얍삽한 행위인가?’라며 영화 대사로 유명해진 한마디를 던졌다. ‘강한 놈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놈이 강한 것’이라는 이 한 마디가 신라 외교가 주는 교훈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메시지를 한 번 곱씹어 보자. 이 말 대로라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살아남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얘기가 된다. 그래서 이것이 ‘온갖 야비한 짓을 해서라도 성공만 하면 그만’이라는 태도를 미화하는 말로 활용되는 경향이 있다. 우리 사회 지도층들이 파렴치한 짓을 하고도 끝까지 뻔뻔스럽게 버티는 행각을 노골적으로 벌이고도 비호 받는 풍조가 생겨나는 것도 우연은 아닌 것 같다.

이런 식의 현실 미화는 신문왕의 정책을 평가하는 데에도 이어진다. 강사는 신문왕이 9주를 설치하며 행정구역을 재편한 것이 차별과 위화감을 없애기 위해서라 했다. 이 강사의 강연을 보면서 눈살이 찌푸려지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이렇게 되지도 않는 근거와 논리 만들어 기득권 층 비호하는 모습이다. 지난 번 MBC <무한도전>에 출연해서도, 왕의 이름자를 한 글자만 썼다고 비슷한 소리 하더니, 그런 버릇 못 고치는 것 같다.

사실 행정구역은, 본질적으로 통제를 위해 정비하는 것이다. 그래야 세금도 걷고 군대 채울 인원도 데려갈 수 있을 테니까. 정말 차별과 위화감 없애려했으면 골품제부터 없애버렸을 것이다. 차별의 상징인 골품제를 지키면서, 온갖 특권 누리는 집단의 수장이 새로 정복한 지역을 행정구역으로 넣어주는 것이 차별이나 위화감 없애기 위한 조치일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아보기 어렵지 않을 논리를 왜 이렇게 몰아가는 지 갸우뚱하게 만든다.

그랬던 신문왕이 사실 겁쟁이라며 내놓은 근거도 걸작이다. 신문왕이 제사 지내며 읽은 제문(祭文)이 근거라니. 그리고 인용한 부분이 이것이다. “요즈음 임금으로서 할 바 도(道)를 잃고 의리가 하늘의 뜻에 어그러졌음인지, 별의 형상에 괴변(怪變)이 나타나고 해는 빛을 잃고 침침해지니 몸이 벌벌 떨려 마치 깊은 못과 골짜기에 떨어지는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제사 지내면서 기개 뽐내는 사람도 있던가? 원래 제사라는 것은 자신을 돌봐주는 조상신에 경건한 말을 지어 바치기 마련이다. 그러니 자신을 낮추는 게 당연한 데, 그런 제문에 기개라도 뽐을 냈어야 겁쟁이가 아니라는 얘기가 되나? 이렇게 보면 제문에 나오는 문장을 빌미로 ‘신문왕은 원래 겁쟁이’라고 몰아간 것도, 내막 모르면서 문장 몇 줄로 이상한 사람 만들어내는 습관이 튀어 나온 것이라 하겠다.

이러니 포석정이 ‘향락의 증거’라고 몰아가는 것도, 이 강사 수준에서는 무리가 아닐 것 같다. 그러니까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놀다가 견훤에게 기습당했다는 식으로 얘기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최근 들어 포석정이 단순히 노는 곳만이 아니라, 포석사라는 사당이 있던 자리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사실이 화랑세기 필사본 진위논쟁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알 만한 사람은 아는 얘기다. 그러니 입시 위주로 가르치는 강사 수준에서 알아보기 어려운 정보였을 것 같지만, 그런 수준의 이야기가 방송에 나감으로서 여러 사람이 구닥다리 지식으로 신라 사람들을 오해하게 만든 결과는 바꿀 수 없게 됐다.

그러고 보면 왕건이 후백제 왕족들을 포용하기만 한 것처럼 미화한 내용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원래 중원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국가에서는 정복한 왕조의 왕족들을 대우해주는 척 하며 실권 없는 자리 주고 감시하는 것이 고전적 수법이다. 그래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옛 백성들과 연결돼 저항하는 사태를, 모양 갖추어 가며 막은 것이다. 그걸 그렇게 덕을 베풀어 가며 포용했다는 식으로 미화하는 것도 좀 낯간지럽다.

이렇게 기득권층 미화하는 내용 위주로 많은 사람 감염시키는 꼴을 보면, 역사에 아예 관심이 없는 것보다 엉터리로 아는 게 더 위험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서 역사를 잘 먹고 즐기라는 식사(史)가, 잘못 먹고 탈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점을 의식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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