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학자 이희진

【투데이신문 이희진 칼럼니스트】 며칠 전 주 전공인 고대사 분야에서 1년 중 가장 큰 행사라 할 수 있는 학술세미나가 열렸다. 더욱이 이번은 창립 30주년을 맞아 열리는 학술대회라 일부 언론의 주목까지 받았다. 그렇다고 해서 필자가 이번 학술대회에 무슨 큰 기대를 걸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속사정 모르는 사람들이 뭐라 하건, 20년 쯤 이 분야에 몸담고 있다 보면 특별한 기념행사라 해서 그에 걸맞은 내용이 담겨져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경험으로 깨닫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다 다를까, 이번에도 이틀이나 들인 학술회의에서 건질만한 내용이 있었는지 의문이다. 우선 이날 주제였던 ‘한국 고대사의 쟁점’이라는 주제부터가 그렇다. 이 자체로는 일리가 있을 수 있다. 학회를 만든 지 30년이 지났으니, 그동안의 연구를 되돌아보며 쟁점을 정리해보겠다는 의미라면 말이다. 그런데 이런 목적이라면, 발표자들의 역량과 의지가 매우 중요해진다. 적어도 30년, 십중팔구는 그 이전부터 쌓여온 연구 성과를 제대로 이해하고 냉정하게 분석해 공정하게 평가해야 하는 일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면, 이런 작업 제대로 못하는 자체가 학계에 피해를 줄 수도 있다는 뜻이 된다. 예를 들어 연구 성과 일부를 빼놓는 단순한 실수만으로도, 후학들이 새롭게 제시된 근거나 논리를 모르고 엉뚱한 곳에서 헤매게 만들어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알고 보면 이번 학술대회 진용은 조금 이상할 수도 있다. 언론에는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젊은 학자들이 주제 발표를 맡아 고대사에서 논쟁이 되는 부분을 다시 한 번 조망할 것”이라는 전덕재 교수의 인터뷰가 실렸고, 실제로도 상대적으로 젊은 연구자들이 발표의 주축을 이뤘다. 문제는 경험이 적을 수밖에 없는 이들이, 과연 제대로 연구사를 정리할 수 있겠느냐는 점이다. 사실 경험이 축적된 연구자라면, 연구사는 속된 말로 ‘거저 먹기’일 수도 있다. 그동안 책과 논문을 쓰면서 자연스럽게 참고하며 정리했던 연구 성과를 내놓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반면 상대적으로 경험이 적은 젊은 연구자들은 새로 보아야 할 것이 많다는 얘기이니 그만큼 부담스럽고 결과도 부실하게 나오기 쉽다.

물론 여기까지야 원론에 불과하니, 젊은 연구자들이 열심히 연구 성과 뒤져 정리해왔다면 공연한 염려로 끝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날은 너무 노골적으로 이런 문제점이 드러났다. 특히 충남대학 소속 정동준 박사의 ‘백제 근초고왕 대의 지배체제에 대한 연구현황과 과제’라는 주제가 그랬다. 아예 발표자 스스로가 “자신은 근초고왕 대를 집중적으로 연구하지도 않았고 (중략) 그저 사료 상 확인되는 관등제, 장군, 박사 정도에 대해 간략히 분석해 본 것이 지금까지 해 온 관련 연구의 전부”라고 밝혔다. 사회자는 이것이 ‘겸양지덕’이라며 포장하려 했지만, 발표 내용 자체가 스스로의 고백을 증명하고 있으니 문제다.

정 박사는 우선 미리 내놓기로 되어 있는 발표문이 미흡하다며 새로 ppt를 작성해와 발표문 부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그럴 만큼 발표문을 그대로 내놓을 수 없었던 수준이라는 얘기다. 사실 제목을 보면 이 발표는 기본적으로 근초고왕 대의 쟁점을 정리했어야 한다. 하지만 그의 발표에서는 백제 역사에서 근초고왕대가 왜 중요한 지, 그래서 백제 뿐 아니라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역사 속에서 백제가 어떤 위상을 이 시기에 확보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조차 이해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부분이 보강된 자료에서 나온다. 고대사학계에서 파렴치하게 써먹은 ‘임나일본부설은 폐기됐다’는 내용이 그에 해당한다. 이는 쓰다의 학설을 도입해서 스에마쓰의 학설을 비판해놓고, 마치 일본의 영향에서 벗어난 것처럼 선전하는 데에 악용하는데 쓰는 수법이라는 말은 더 되풀이하기도 지겹다. 정동 박사는 바로 이런 행각을 되풀이한 것이고, 그러니 그의 발표 수준도 가늠이 될 것이다.

지면 관계 때문에 더 복잡한 얘기는 생략해야겠지만, 이런 수준의 발표는 연구사 정리를 엉터리로 해서 학계 동료들에게 어떤 피해를 주던 관심 없다는 태도를 드러낸 셈이다. 사실 학계에서 단순히 모르거나 경험이 적어 연구사 정리하며 일부 연구성과를 빼놓거나 왜곡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역사학계, 특히 고대사 분야 연구 성과 정리라는 것이 글자 그대로의 뜻이 아니라 패거리 선전에 활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말 잘 듣는 애송이들 골라, 알아서 자기들 띄워놓는 연구사 정리를 시키려는 속셈 아니었느냐는 해석도 가능해진다. 그래서 발표의 부실함이 발표자 자신의 고백으로 드러난 것도, 사회자가 ‘겸양지덕’이라 호도하며 덮으려 한 것 아니겠느냐는 얘기다. 이러다 보니 십중팔구는 마음 약해 털어놓았을 발표자의 고백까지도 삐딱하게 보인다. ‘좀 부실하게 발표한 거 노골적으로 밝히더라도, 실세들이 뒤에서 설정한 거 어쩔 것이냐?’라는 식으로 말이다.

여기에 토론자로 나섰던 공주대학 정재윤 교수는 확인사살까지 해주었다. 그는 토론문에서, “일본서기 신공기 기사는 삼국사기 초기 사료처럼 현재 일본 학계에서는 크게 논의가 되지 않고 있다. 결론 없는 논쟁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학계에서도 일본 학계의 연구 성과가 인용되고 있으나 자의적인 측면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으며 일본서기의 거시적이고 구조적인 틀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입장만 되풀이 될 뿐이다”라 해놓은 것이다. 꽤 어려운 말로 알아듣기 어렵게 만들어 놓았지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일본학계에서 일본서기 신공기 기록을 이용해 연구하는 것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이용하는 것처럼 의미 없는 논쟁을 되풀이하게 만들 뿐이니, 우리 학계도 일본학계의 흐름에 따라야 한다는 얘기다.

내막 모르는 사람들이야 이런 말을 듣고도 그러려니 하겠지만, 조금이라도 내용을 알면 정재윤 교수가 도대체 어느 나라를 위해 백제사를 연구하자고 하는지 의구심이 들어야 한다. 아는 사람 다 알 듯이, 백제의 전성기를 이끌었다는 근초고왕에 대한 기록이 삼국사기에는 부실하다. 즉위 후 3년에서 20년까지 대부분의 기록이 아예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근초고왕 때 백제 역사 자체는 물론, 당시 백제-왜 관계를 중심으로 한 역학관계를 이해하려면 일본서기 이외의 기록이 없는 것이다.

물론 근초고왕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신공황후에 대한 일본서기 기록은 심하게 왜곡돼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연구할 가치가 없을까? 알고 보면 이렇게 몰아가는 것 자체가 역사학의 기초 본질을 왜곡하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일이다. 역사학이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건 기본이지만, 이게 기록 자체를 액면 그대로 믿겠다는 뜻은 아니다. 그래서 ‘사료 비판’이라는 것을 한다. 그런데 사료 비판을 하다 보면, 오히려 사람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 기록을 왜곡시켰는지를 파악하게 된다. 이를 기반으로 역사적 실체를 찾아내는 것이 역사 연구의 기본 연구 방법의 하나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일본서기 신공기는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연구해야 할 사료(史料)가 된다.

그런데 일본 학계는 왜 이런 길을 택하지 않을까? 일본서기가 왜곡돼 있다는 점은 황국사학자라는 자신들의 손으로 밝혀냈으니 할 말 없는 것이고, 이를 뒤집으면 일본서기 특히 신공기 기록을 파고들수록 이런 기록을 만들어낸 일본 천황가의 흉칙한 속셈이 드러나게 된다는 얘기다. 그러니 국수주의 전통이 강한 일본 학계에서 이 기록을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싶지 않은 심리가 팽배하다는 점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입장이 완전히 다른 우리 학계에 이것이 무슨 의미가 될까? 오히려 적극적으로 연구해서 일본서기가 왜곡시켜 놓은 역사적 실체를 복원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닌가? 이렇게 보면, 이 부분을 연구할 필요 없다는 식의 주장이 오히려 일본 학계의 앞잡이 노릇을 하자는 뜻이 된다. 그런데도 이런 부분에 대해 지적하면, 고대사 연구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경기에 가까운 반응을 보인다. 그러니 ‘연구사’를 특정 집단 위주로 소개하며 연구의 흐름을 엉뚱한 방향으로 몰아갈 것이다. 어찌 보면 이 자체가 일종의 여론조작인 셈이다.

그러니 여기 반발하면 어찌될까? 필자부터도 일본서기 적극적으로 연구해서 이 분야 연구 흐름을 반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연구 성과 내다가, 지금까지 낸 것조차 없는 것 취급 받고 있다. 이런 사정 감안하면 정재윤 교수의 주장은 순간적인 착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다. 이게 바로 우리 고대사 학계의 어두운 측면 중 하나다. 이러니 대한민국 고대사 학계가 식민사학에 물들어 있다는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다.

이런 꼴을 보고도, 고대사학회 원로라는 분들이 이번 학술회의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좌담회장에서 보인 태도는 의미심장하다. 특히 백제사를 전공한 한 원로교수는 고대사학회가 창립할 때부터 치열하게 연구 성과를 검증해왔다는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늘어놓았다. 개인적으로만 5번 이상은 들었을 이 얘기가 데자뷰 현상을 일으킨다.

사실 다 드러나고 있는데도, 그런 사실 숨기려고 온갖 일을 다 벌이는 최고 권력자의 모습과 너무나 똑같으니 말이다. 이런 태도가 주는 메시지는 뻔하다. ‘현실이 어쨌건 우리 사회는 잘 돌아가고 있다고 여기고, 불평하는 것들 알아서 압박하라’고 선동하는 꼴이다. 하긴 이런 행태 보이시는 분들이 대부분 교수님들이시니, 대통령도 대학 다닐 때 이런 전통 만들고 이어가는 분들의 교육을 받으셨겠다. 그러니 자신도 알게 모르게 배운 것을 써먹는 게 이상할 것 없을지도 모르겠다. 일본과 이른바 ‘위안부 협상’했던 발상도 이런 차원이었을까? 이런 꼴 때문에 우리 사회가 ‘헬 조선’ 소리 들을 정도로 희망 없는 사회가 돼가는 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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