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강의전담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도날드 트럼프(Trump. Donald J.)가 미국의 제45대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지구촌이 조용한 날이 별로 없다. 트럼프의 대통령 취임과 그 이후 그가 펼치는 정책은 세계 역사를 크게 흔들고 있다.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고, 제4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등장한 용어가 하나 있다. 바로 ‘샤이 트럼프’라는 말이다. 자신이 트럼프를 지지한다는 사실을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 지지층이나 지지자를 일컬어 샤이 트럼프라고 지칭했는데, 이들이 선거 때 대거 트럼프에게 투표했고, 이로 인해 트럼프는 미국 대통령에 취임할 수 있었다.

필자는 문득 ‘샤이’라는 단어의 뜻이 궁금해졌다. 사전을 찾아보면 영어인 샤이(shy)는 ‘수줍은, 수줍음을 많이 타는’ 정도의 뜻으로 해석된다. 샤이 트럼프라는 말을 최대한 우리말로 해석한다면 ‘수줍은 트럼프 지지자’ 정도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샤이 ○○○’라는 말은 트럼프 취임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쓰이기 시작했다. 특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진행되고 있는 탄핵 정국 속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는 층을 ‘샤이 보수’라고 일컫는 정치인이나 언론도 등장했다. 지난 22일 자유한국당이 개최한 ‘여론조사에서 나타나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제목의 토론회에서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토론회에 걸려있는 플랭카드에는 큰 글씨로 ‘샤이 보수’라고 적혀있었고, 토론자들도 ‘샤이 보수’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입에 올렸다. 인터넷 언론매체인 ‘the 300’의 22일 보도에 따르면 이 토론회에 참석한 토론자들은 “샤이 보수의 유무보다 샤이 보수를 투표장으로 나오게 하는 보수의 개혁이 더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고 전했다.

이러한 현상을 보면서 필자는 문득 ‘수줍은’이라는 단어가 우리 역사 속에서 어떻게 사용됐는지가 궁금했다. 특히 특정 정치 세력을 일컫는 말 가운데 ‘수줍은 ○○○’라는 식의 말이 등장하는지 여부가 궁금했다. 문헌을 찾아본 결과 특정 정치세력을 지칭하는 단어는 없었다. 심지어 고문헌 속의 정치와 관련된 글에서 ‘수줍은’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저 개인의 문집(文集) 속의 시나 산문 속에서 꽃이나 달, 여성이 자태를 표현할 때 ‘수줍은’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했을 뿐이다.

그런데 일부 문헌에서 오늘날 ‘샤이 ○○○’라고 규정되는 세력들이 알아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 기록들이 등장했다. ‘샤이’, 즉 ‘수줍음’이라는 감정이 드러나는 이유를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우선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는

그는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면서 얼굴엔 조금도 수줍어하는 기색이 없다. 이는 아마 해마다 조선 사람을 보아 와서 아주 예사로 낯익었기 때문이리라.

라는 글귀가 등장했다. 박지원이 압록강 인근에서 요양(遼陽)으로 가는 길에 묵은 숙소에서 만난 한 만주족 처녀를 묘사한 글이다. 이 글 속에서 수줍음이라는 감정이 ‘낯선 것’과 마주했을 때 드러나는 감정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세종실록』 의 세종 9년(1427) 5월7일의 기사에는

신 등이 용렬하고 옹졸하여 일을 처리함에 실수가 많고, 인심을 안정시키기에 능력이 없사와, 부끄러움을 품고 수줍음을 참아 가면서 간지러운 낯으로 진실로 능히 직임에 나가지는 못하겠습니다. 전하께서 신 등의 관직을 파하시고 현량한 사람으로 대체하여 풍헌(風憲-풍습과 도덕에 대한 규범. 필자주)의 직임을 중하게 하소서.

라는 기록이 등장한다. 대사헌(大司憲) 최사강, 장령(掌令) 안숭선, 지평(持平) 최호생 등 사헌부의 신하들이 사직을 요청하는 내용인데, 이들은 자신의 무능함에도 불구하고 일을 하는 것에 대하여 부끄럽다는 표현을 하는데, 이 표현을 할 때 ‘수줍음’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이다. 세종은 이들의 사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기에서 “왜 샤이할까?”라는 질문의 답이 나온다. 결국 ‘수줍음’이라는 감정은 역사 속에서 낯선 것을 볼 때의 두려움, 혹은 잘못된 것이나 적절치 않은 것을 알았을 때 느껴지는 감정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말을 현재의 ‘샤이 보수’라는 말에 적용한다면, 현재 자신이 지지하는 행위가 드러내놓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럽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 부끄럽다면 바꾸는 것이 염치를 아는 성인다운 행동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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