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현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김종현 칼럼니스트】 미래에 인류가 멸망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마침 아주 먼 은하계에 생명수가 흐르는 행성이 발견된다. 사람들은 각자의 우주선으로 선단을 꾸려 장거리 우주여행에 나선다. 한시가 급하니 다 같이 최고 속도로 항해 하자는 주장이 나온다. 우주선은 광속에 근접할 정도로 빨라야 한다. 그런데 모두가 그만큼 빠른 우주선을 가지고 있을까?

삶의 철학적 목표와 행위의 목표가 일치하도록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른 생각을 말하고 말한대로 실천하는 태도를 가진 구도자 유형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신념을 배신하는 발언도, 자신의 발언을 배신하는 행위도 쉽게 하지 못한다. 깊고 빠르게 안식에 도달하는 방법을 찾아 삶은 평화롭게 다듬어진다.

간혹 정치인 중에 구도자 유형이 있다. 이들은 자신의 철학적 목표와 정치적 목표가 일치하도록 애쓴다. 길을 구하는 과정이 정치이고 정치인으로 사는 게 구도의 과정이라서 이 둘이 따로 분리 되지 않는다. 발언과 행위의 상관관계가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강하게 연결 된 만큼 깨끗한 자기관리로 신뢰를 얻는다. 모든 것이 이미지전략이라 할지라도, 신념을 유지하기 쉽지 않은 정치환경에서 언행일치를 장기간 지속하고 있다면 그 건 그 사람의 미래이기도 하다. 지금 대선주자들 중에 구도자 유형의 정치인이라면 문재인, 안희정, 안철수 등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최근 논란이 된 안희정 충남지사의 ‘선의’ 발언은 구도자 유형 정치인의 전형적인 행위다. 논란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자기 삶의 철학을 현실정치에 녹여내려는 의지를 드러냈다. 그가 말한 선의에는 욕망에 충실한 각자를 함부로 예단하지 말자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곱씹어 볼 만하다.

갈등 중인 상대방에 대한 감정적인 인상을 근거로 상대의 진의를 판별하겠다면 일단 의심부터 해야 한다. 의심이 팽배한 환경은 각자의 이익을 불안하게 하므로, 자신의 이익을 보다 강력하게 보장 할 수 있는 길을 찾게 된다. 이 때 인맥과 권력위계가 동원된다. 그 과정에서 사회적 계급이 공고화 되고 불평등이 가속되면서 온갖 적폐가 발생한다. 저신뢰 사회의 특징이다. 한국 비즈니스 접대 문화의 대표격인 강남 룸살롱은 저신뢰 사회의 불안해소 비용이 현상으로 나타난 경우다.

우리 현대정치사는 극심한 갈등으로 점철돼 왔다. 정계 한복판에서 오랜 시간 활동한 안 지사가 비난의 칼 대신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갈등을 극복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가능하다. 저신뢰 사회의 갈등이 야기하는 불평등을 해소한다는 이유로 한 개인의 인격과 감정까지 부정하면, 다른 각도에서의 갈등이 생겨날 수 있다.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에 깃든 갈등요소도 걷어내자는 주장이다.

그러나 정치는 당대의 사람들이 가진 감정의 총합을 넘기며 발전하지 않는다. 구도의 길을 걷지 않는 장삼이사들의 감정이 엎치락뒤치락 얽히는 것이 사회이고, 정치는 그런 사회를 운영하는 도구다. 대개의 사람들에겐 감정의 골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므로 안정감을 준다. 감정을 극복해 상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되려 어렵고 불편한 행위다. 그러기엔 개인이나 사회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모든 이들이 바른 생각을 바른 행위로 연결하는 삶을 살지는 못한다. 구도자 유형의 안 지사에겐 평이한 속도여도 다른 우주선의 사람들에겐 매우 급진적일 수 밖에 없다.

저마다 사정이 다르니 모두가 빠른 우주선을 갖진 못한다.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광속에 가까운(아광속) 우주선에 타고 있는 사람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아광속 우주선에서의 몇 시간은 느린 우주선에서의 수십년이 될 수 있다. 느린 우주선을 탄 이들에겐 인고의 세월만이 기다릴 뿐이다.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그들에게 아광속 우주여행은 현실적이지 않다. 시간은 상대적이고, 유한한 시간을 사는 인간의 감정도 상대적이다.

환경에 종속된 인간에겐 이념의 정의도 상대적으로 다가온다. 우리 정치지형에서 보수우파는 기존현실의 안정적인 유지와 경쟁체제에 관심을 기울인다. 갈등을 감정 대결의 관점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지난 세월동안 지속돼온 양상이며, 이를 고수하는 것은 보수적 해법이다. 진보좌파는 체제의 변혁속도와 불평등 해소에 관심을 기울인다. 감정을 자제하고 이성적으로 공평하게 바라보는 것은 쉬이 따르기 어려울 만큼 현실 저항적이다. 견고한 현실을 깨자고 주장하는 것은 진보적 해법이다.

어느 날 화합의 행성에 도착하면, 선악 대결로 현상을 정의하고 승리를 쟁취하겠다는 인식을 숨기지 않는 이재명 성남시장은 세간의 인식과 달리 현체제를 유지시키려는 보수우파가 된다. 반면 선의나 대연정 발언으로 대중이 수용하기 어려운 화합을 말하는 안희정 지사는 우클릭이라는 비난과 달리 급진적인 진보좌파가 된다. 대선에 나선 정치인들의 요즘 행보는 우리시대가 넘어야 할 허들의 정의가 바뀌는 모습을 상징하고 있다.

엄중한 시국이지만, 유력정치인들이 각자 실천하는 철학을 체제에 이식하려 하고, 그 것이 사회의 열띤 토론 주제가 된다는 점에선 백가쟁명 못지 않는 시대다. 2017년, 대한민국이라는 우주선을 타고 여행하는 우리는 어떤 행성에서 살 것인지를 선택 해야 하는 시간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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