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석재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이석재 칼럼니스트】 두어 달 전 집에 혼자 있던 어느 날, 오후였다. 거실에 놓여 있는 전화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이제는 집 전화의 의미가 점차 퇴색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계속 놓아두고 있는 것은 단지 인터넷 회사에서 저렴하게 서비스해주기 때문만은 아니다. 삼십 년 동안 계속 같은 번호를 유지하고 있는 집 전화에는 이따금씩 예상치 못한 인연들이 끊어진 줄을 다시 이어대곤 한다. 아니나 다를까. 전화를 받으니 이름만 몇 번 들어보았던 친척 어르신께서 오래도록 간직하고 계셨던 번호로 어머니를 찾으셨다. 어머니께서는 지금 집에 계시지 않다고 말씀 드렸다.

그분께서는 나의 답을 들으시더니 대뜸 이렇게 물으셨다. 너희 집에서는 좋은 소식이 없느냐. 무슨 좋은 소식 말씀이십니까. 좋은 소식이 결혼 말고는 뭐가 있겠느냐. 그리고는 나와 내 형제의 나이를 대략적으로 가늠하시며 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 더 이상 불효를 저지르지 말라는 말이 이어졌다. 물론 장난이 섞인 말투셨다. 이후 상투적인 대화 몇 자락이 오고 간 후 그럼 어머니의 연락을 기다리겠노라는 말씀과 함께 통화는 마무리가 되었다.

나는 그날 저녁 집에 돌아오신 어머니와의 저녁식사 자리에서 오후에 걸려왔던 전화에 관해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대뜸 불효 운운하며 남의 가정사에 참견했던 친척 어르신께 화가 났기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그분에게 악의가 없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어머니께 말씀을 드리지 않았던 것은 그저 오랜만에 찾아온 집안의 평온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날 저녁 어머니가 친척 어르신과 통화를 하신다면 이후 벌어지게 될 일들은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서로의 안부를 묻는 잠깐의 시간이 지나가고 나면 당연하다는 듯 자식들의 결혼 유무로 순서가 넘어 가고, 나의 어머니는 마치 죄인이라도 된 듯 이런저런 변명을 둘러대시기 시작한다. 요즘에는 늦게 결혼하는 사람들도 많다, 결혼보다 중요한 것은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결혼해서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가, 이런 식으로 방어를 하실 것이고, 상대방은 그건 결혼 못하는 사람들이 그냥 하는 말이라며 무심하게 당신의 가슴을 찔러댈 것이다. 그러다가 어머니의 다음과 같은 항복 선언으로 일방이 상처만 받는 대화는 비로소 끝이 난다.

쟤들도 양심이 있으면 조만간 결혼을 하겠지.

앞에서 방어하기 위해 던진 말들은 당신의 진심이 아니며, 마지막 그 한 마디에 모든 울분이 녹아 있음을 나는 모르지 않는다. 졸지에 양심불량이 된 중년의 아들은 주섬주섬 짐을 챙겨들고 인근 카페로 가서 지옥의 가장 뜨거운 시간을 일단 피하고 본다. 그리고 최소한 일주일 정도 집안에서의 모든 대화를 단절하고 혹여나 어머니 가슴 속에 쌓여있는 자식들에 대한 울화가 터지지 않도록 관리 모드로 들어간다. 중간 중간 예기치 못한 순간에 튕겨 나오는 유탄은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라 생각하며 의연히 온몸으로 맞는다.

나는 이제 이러한 일련의 환경을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비혼 상태의 3,40대라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오랜만에 남의 집에 전화를 걸어서는 되도 않은 오지랖으로 한 가정에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누군가를 비난하지 않으며, 왜 그런 무책임한 말들에 상처를 받고 자식들에게 화를 내시냐고 어머니께 불만을 토로하지도 않는다. 결혼에 관한 일련의 상투적인 언사들은 “밥 먹었어?”라는 인사말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고, 그에 따른 감정의 격동 역시도 피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결혼했느냐, 아이는 어떻게 할 것이냐, 와 같은 사실 관심도 없고 도와줄 의사도 없는 질문을 위한 질문, 대화의 기술이 부족한 사람들이 어색함을 메우기 위해 생각 없이 던지는 이러한 질문들은 이제 기성세대 전반의 생활문법이라고 받아들인다. 정해져 있는 문법이기에 이건 설득의 영역이 아니다. 그냥 그런 것이다. 동시에 개인으로서 당장의 곤란을 관리하기 위한 최선의 전제이기도 하다. 피할 수 없으면 인정하고 관리하고 견뎌낸다.

이 이야기를 길게 꺼내놓은 것은 며칠 전에 집에 청첩장이 하나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우편함에서 청첩장을 꺼내들며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가슴이 떨려왔다. 바로 두어 달 전의 그 어르신이었다. 두 분의 통화는 이제 피할 수가 없고, 대화 주제는 무려 ‘결혼’이다. 청첩장의 사전적 의미는 “결혼 따위의 좋은 일에 남을 초청하는 글을 적은 것”이라지만 나에게 청첩장은 또 다른 분란에 우리 가족을 밀어 넣는 입영통지서처럼 느껴지곤 한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잘 모르겠다. 이 사태의 부당함은 엉뚱한 곳에서만 웅변을 토할 수 있을 뿐, 정작 집안에서는 당분간 양심이 부재한 침묵의 아들이 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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