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살인사건 1주기 추모문화제 열려…‘우리의 두려움은 용기가 돼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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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신문 전소영 기자】 오후 6시가 조금 넘은 시간, 2호선 강남역 10번 출구는 늘 그렇듯 이곳저곳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와 바삐 길을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동안 강남역은 사람들에게 서울의 중심가 그 이상 그 이하의 의미도 아니었다. 그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지난 2016년 5월 17일 새벽 1시경 서울 서초구의 한 노래방 건물에 있는 남녀 공용화장실에서 23살 꽃다운 나이의 여대생이 한 남성의 잔인한 칼부림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른바 ‘강남역 살인사건’은 조현병(정신분열증)을 앓던 30대 남성의 소행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이 사건은 정신질환자의 단순 묻지마 범죄로 정리되는 듯했다.

하지만 우리는 가해자는 남성, 피해자는 여성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어떠한 교집합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해자는 범죄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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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여성들이 나를 무시했다.”

짧지만 충격적인 그의 한마디로 강남역 살인사건은 묻지마 살인이 아닌 한 남성의 ‘여성혐오’에서 비롯된 표적 살인으로 뒤바뀌었다.

여성들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 지난날 ‘여자라서’, ‘여자니까’, ‘여자이기 때문에’ 비롯된 억압과 차별을 참고 살아야 했다. 하지만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해야 하는 이 사회를 두고만 볼 수 없었고 그렇게 대한민국에는 ‘페미니즘’ 시대가 도래했다.

많은 여성들이 ‘나는 그날,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운 좋게 살아남았다’라고 말한다. ‘나일 수도 있었다’라는 공포감 속에 살아온 지 어느덧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대한민국 여성들은 다시 한 번 용기를 내 거리로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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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7시 무렵, 9호선 신논현역 6번 출구 앞에서는 범페미네트워크가 주최한 강남역 살인사건 1주기 추모문화제 ‘우리의 두려움은 용기가 돼 돌아왔다’가 열렸다. 이번 추모문화제는 서울 강남을 비롯해 대구, 부산 등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됐다.

드레스 코드에 맞춰 검은 옷에 마스크 차림을 한 사람들이 한 손에는 새하얀 국화 한 송이를, 또 다른 손에는 포스트잇을 손에 꼭 쥔 채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날 추모 문화제 참가자는 주최측 추산 약 1000명(경찰 추산 800명)으로 생각 이상의 많은 사람들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다수의 여성 참가자들 사이에서 드문 드문 남성들도 눈에 띄었다. 특히나 수많은 인파 사이에는 해당 사건 피해자의 부모님도 참석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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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시 낭독으로 추모문화제의 시작을 알린 불꽃페미 책은탁씨는 “우리의 비통함은 1년이 흘러도 사그라들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명랑한 용기도 1년째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이렇게 계속 해나갈 것이다. 그녀가 지금 거리로 나선 우리로 하여금 위로받고 있기를 바란다. 그녀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는 생존 이상으로 생존할 것이다”라고 눈물을 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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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회를 마친 후 참가자들은 침묵 행진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논현역 6번 출구를 시작으로 사건이 발생했던 노래방 건물 앞, 강남역 10번 출구를 지나 다시 돌아올 것으로 예고됐다. 바람에 나부끼는 ‘강남역 10번 출구’ 깃발을 선두로 참가자들은 발맞춰 행진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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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걸었을까, 네온사인 불빛이 화려하게 반짝이는 골목에 위치한 어느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사건이 발생한 노래방 앞이었다. 인적이 드문 깜깜한 밤 어린 여대생이 느꼈을 죽음의 공포, 그날의 악몽을 마주한 참가자들은 침묵을 유지한 채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눈빛에서는 원망과 슬픔, 미안함, 분노 등 만감이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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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발생했던 화장실은 남녀 공용 화장실에서 ‘여성안심 화장실’로 바뀐 것으로 알려졌다. 과연 얼마나 안전하게 바뀌었는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해당 건물 관계자로 추정되는 한 남성으로부터 출입을 제지당했다. 언제 이용하게 될지 모르는 화장실의 안전을 ‘첨단 비상벨 시스템 작동 중’, ‘이 구역은 서초경찰서 특별순찰 구역입니다’라는 팻말만이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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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방 건물에서 채 10분도 되지 않는 거리에 강남역 10번 출구가 있었다. 지난해 형형색색의 포스트잇이 가득했던 그곳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제자리를 찾은 모습이었다. 참가자들은 각자가 준비해온 국화로 헌화를 마친 후 그녀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히지 않길 바라며 애도의 마음을 담은 포스트잇을 붙였다. 누군가는 잠시 동안 멍하니 입구 벽면을 가득 메운 포스트잇을 응시하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다른 이들의 마음까지 대신 가져온 중년의 남성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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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여명의 참가자들 모두가 헌화를 마친 후 강남대로를 향해 걸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앞으로도 지금처럼 더 이상 숨지 않고 더욱더 목소리를 내겠다는 의미를 담아 ‘살아남는 우리가 세상을 바꾼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쓰고 있던 마스크를 벗어 하늘로 내던졌다. 그리고는 ‘여자라서 죽지 않는 세상을 만들자’, ‘평등해야 안전하다’, ‘두려움을 용기로, 분노를 저항으로’ 등의 구호를 외치며 힘찬 발걸음을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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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진에 참석한 20대 중반 A(여)씨는 “그동안 우리 사회에 여성혐오가 없어서 드러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증명하지 못했던 것뿐이다”라며 “앞으로도 우리가 이것(여성혐오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얘기함으로써 더 이상의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어 “강남역 살인사건이 우리 사회의 여성혐오를 되돌아 보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여성들 사이에서 적극 구호를 외치던 이모(23)씨는 “처음에는 강남역 살인사건을 여성혐오 사건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되려 여성과 남성 사이의 불화를 조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라며 “하지만 애초에 존재했던 여성혐오가 수면 위로 떠오른 계기가 됐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전했다.

그는 “‘두려움이 곧 용기’라는 구호처럼 강남역 살인사건이 비록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일지라도 한편으로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이전보다 더 나은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친구의 손을 잡고 왔다는 원모(21)씨는 “대한민국에 페미니즘을 이끌어낸 촉발점이 된 강남역 살인사건이 단순히 여성의 죽음으로만 기억되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 불꽃페미액션 가현(좌), 무지개행동 한희(우) ⓒ투데이신문

1시간여에 걸친 긴 행진을 마치고 참가자들은 다시 신논현역 6번 출구에 집결했다. 곧이어 젠더폭력을 증언하는 자유발언대 ‘독방을 부수며’가 시작됐다. 이날 발언대에는 불꽃페미액션, 노동당여성위, 무지개행동 등에 소속된 9명의 참가자가 올랐다. 그들은 용기 내 여성으로서 여성혐오에 맞서온 지난날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고 그로 인해 받은 마음속 상처를 참가자들과 함께 공유하며 위로받았다.

불꽃페미액션 소속 가현씨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로부터 당한 가정폭력과 성희롱 경험을 이야기하며 “우리는 당당하고 행복하게 살 가치가 있다. 저는 이제 망설이지 않고 저를 괴롭혔던 가정폭력에 대해 말하고, 페미니스트 친구들과 추모제를 준비하고, 두려움 없이 밤길을 걸어 나를 때리거나 성추행하는 사람이 없는 안전한 집으로 가고 싶다. 여기 이렇게 함께 살아있어주셔서 감사하다”라고 말했다.

무지개행동 소속 활동가이자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 만드는 법’ 소속 변호사인 트랜스젠더 한희씨는 “5월 17일은 국제성소수자혐오 반대의 날이기도 하다. 추모와 혐오가 공존하는 힘들고 두렵기도 하다”라며 “하지만 이는 우리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약자라는 이유로 혐오와 차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 같다”고 기대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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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자유발언대에는 직접 오르지 않았지만 지난해 강남역 살인사건을 추모하며 피해를 입은 여성의 사연도 소개됐다.

이 여성은 지난해 강남역에서 추모 포스트잇을 붙이던 중 사진이 찍혔다. 해당 사진이 온라인에 확산되며 해당 여성은 심한 욕설과 살해 협박, 강간 협박 등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여성 단체의 도움을 받아 소송을 진행했지만 재판부는 ‘기소유예’라는 판결을 내렸다.

참가자들은 추모 사진이 찍혀 살인과 강간 협박에 시달려야 하는 사회에 살아야 하는지, 이를 기소유예하는 사법기관이 존재하는 사회에 살아야 하는지 분통해하며 울음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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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우리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인식에 많은 긍정적 변화가 찾아왔다고 말한다. 더 이상 여성들이 사회의 억압과 차별을 피해 몸을 숨기지 않고 그들의 권리와 평등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 

하지만 여전히 신문과 방송에서는 여성을 노린 남성들의 성범죄 뉴스가 흘러나오고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여성을 성적 대상화한 불편한 글들이 난무한다. 

변화는 결코 혼자서는 이뤄낼 수 없다. 우리 사회에 잠재된 여성혐오와 젠더 차별은 여성과 남성, 사회 그리고 국가가 함께 해결해야 될 문제임을 다시금 일깨워야 한다.

언젠가 짧은 치마를 자유롭게 입고 밤늦게까지 친구들하고 놀아도 귀갓길 왠지 모를 공포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사회가 오길 바라며 이날 우리는 서로에게 ‘안녕히 가세요’가 아닌 ‘집까지 안전히 돌아가세요’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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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말했다. 강남역 살인사건이 세월호 사건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돼야만 한다고. 대한민국 국민들의 가슴속 깊이 자리잡은 노란 리본 옆에 또 하나의 리본이 새겨지길 바라며.

‘REMEMBER20140416, REMEMBER2016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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