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제공 = 찍는페미>

촬영현장서 사전 협의 없이 여배우 옷 찢은 남배우 A씨
‘강제추행치상’ 고소됐으나 1심 “연기했을 뿐” 무죄 판결

88개 여성단체·영화인 분노 “합의되지 않은 연기는 폭력”
故장자연씨 이후 8년…여배우, 여전히 성폭력에 노출되다

【투데이신문 최소미 기자】 어느 저예산영화 촬영 현장. 경력과 나이가 많은 남배우 A씨는 가정폭력 장면의 연기 도중 갑자기 상대 여배우 B씨의 속옷을 찢더니 상체를 만지고, 급기야 바지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콘티대로라면 노출은 B씨의 어깨 부근이 드러나는 수준이었어야 했다. 이 사건으로 B씨는 전치 2주에 해당하는 좌상 및 찰과상을 입었다. ‘남배우 A 사건’이다.

지난 2015년 4월 있었던 이 사건 이후, A씨는 B씨에게 사과 문자를 보내고 영화에서 하차하겠다고 합의한 바 있었다. 그러나 A씨는 이를 번복했다. 이에 B씨는 피해자지원기관의 상담을 거친 후 경찰에 강제추행치상에 대한 신고를 접수했고, 검찰은 A씨를 기소하며 징역 5년을 구형했다. A씨는 B씨를 명예훼손으로 맞고소했다.

그런데 상황은 점점 B씨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이 사건의 1심 재판을 맡은 법원이 지난해 12월 A씨에 무죄 판결을 내린 것. 법원은 “저예산영화가 갖는 한계 및 제작진의 준비 소홀 등으로 A씨는 해당 촬영 당시 구체적인 부분에 대해 설명을 듣지 못한 채 ‘배역에 몰입한 연기’를 했다”며 “당시 행동은 ‘업무상 행위’이므로 성폭력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검찰은 이에 항소했다.

“합의되지 않은 연기는 폭력이다”

‘남배우 A 사건’은 여러 여성단체 및 영화인들의 분노를 샀다.

지난 11일 페미니스트 영화인 모임 ‘찍는페미’ 등 88개 여성단체들은 공동성명을 통해 “합의되지 않은 연기는 폭력”이라며 “안전한 노동환경이 보장되지 않고 여성이 성폭력에 노출되는 노동현장을 용인하는 법원의 태도를 규탄한다”고 밝혔다.

세계 여성의 날이었던 지난 3월 8일에는 찍는페미,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민우회 등 단체들이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영화계 내에서 ‘연기’ 혹은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끊어내자. 이는 연기가 아닌 성폭력이다”고 강조했다.

한국독립영화협회 등 5개 단체 또한 성명서를 통해 “폭력은 그 자체로 폭력이다. 저예산영화라는 이유로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부여하고 피해사실을 무화한 1심 판결문에 영화인으로서 분노한다”며 “잘못된 판례는 추후 영화와 예술의 이름을 빙자해 벌어질 범죄에 악용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외에도 영화계 종사자들 288명은 서명운동을 통해 2심에 공정한 판결을 요구했고 이는 지난 3월 열린 항소심 1차 공판에 제출된 바 있다.

B씨는 “이번 일에 대해 내가 말하지 않으면 다른 동료나 후배들도 비슷한 피해를 경험할 것이다. 영화 촬영 과정에서 성폭력이 또다시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며 지난 12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항소심 2차 공판을 공개재판으로 진행했다. 이날 80여명의 방청객이 자리해 B씨와 뜻을 함께했다.

▲ 지난 4월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연예인 박모씨 성폭력 사건 피해자에 대한 명예훼손 및 무고죄의 올바른 판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여성단체들은 남배우 A 사건 외에도 여러 성폭력 사건에 연대해 뜻을 모으고 있다. ⓒ뉴시스
#STOP_영화계_내_성폭력

지난 2009년 3월, 배우 故 장자연씨가 연예계 성상납 강요를 알리고 죽음을 택했다. 그가 사망한 지 어느덧 8년이 지났으나 영화계 내 성폭력은 아직도 존재하는 듯하다.

지난해부터 이어져 온 ‘#예술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을 통해 수많은 성폭력 피해 사실들이 고발됐다. 찍는페미에 따르면 다수의 영화학과 학생들이 ‘여배우라면 자고로 잘 벗어야 한다’, ‘술자리에 오지 않으면 배역을 주지 않겠다’ 등의 성차별·성희롱 발언들을 들어왔다고 폭로한 바 있다.

찍는페미는 “이렇게 고발된 수많은 사실들이 바로 영화계의 단면”이라며 “카메라 뒤에서 사람이 죽고, 카메라 앞에서 여성노동자가 폭력을 경험하는 게 과연 예술이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남배우 A씨 사건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으면 앞으로도 예술이라는 이유로 수많은 폭력이 정당화될 것이다. 이 사건은 영화인들을 위해 올바른 선례를 남길 수 있는 유일무이한 사건”이라며 “비단 영화계뿐 아니라 문화예술계 전반의 노동현장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안전한 노동환경을 만드는 역사에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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