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석재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이석재 칼럼니스트】 지난 5월 9일 저녁, 나는 지인과 함께 집에서 개표방송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는 출구조사가 워낙 정확해졌기 때문에 8시 투표시간 마감과 함께 긴장은 곧바로 허물어지고 말았다. 우리는 방송사에서 들려주는 각종 출구조사 결과들을 놓고 이런저런 분석들을 교환했다. 그러다 문득 지인이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이 떠올랐다. 투표를 하기 전에 아내와 대화를 나누었는데 아내의 의견이 꽤 설득력이 있더라는 내용이었다. 다만 그 의견이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나는 그때 그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두 번이나 다리를 건너들은 것이라 정확할지는 모르겠지만 대략 이런 이야기였다.

이번에는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해주는 인물을 대통령으로 뽑고 싶다는 게 주 요지였다. 잘 먹고 잘 살게 해주겠다는 것도, 국가적 비전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을, 그리고 우리를 하나의 사람으로 대우해줬으면 좋겠다, 내가 어려울 때 손을 내밀어 보듬어줄 수 있는 사람, 내가 슬플 때 위로해줄 수 있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 고 아내는 그에게 말했다고 한다.

문득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 나누고 있던 정치공학적인 전망, 정책에 대한 심도 있는 비판, 시민들의 투표심리에 대한 진지한 견해들이 모두 허무하게 느껴졌다. 나도 다르지 않았다. 지난겨울 길고도 길었던 싸움을 시작했을 때의 내 마음 역시도 그러했다. 그저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었으면 하는 단순하면서도 간절한 소망, 그렇지만 탄핵과정과 대선 기간을 거치면서 어느덧 후순위로 밀려버렸던 것은 아닌가 싶었다.

이번 대선은 우리에게, 정권교체가 기정사실화된 상황에서 어떤 성격의 정권교체를 원하는가, 질문을 던졌다. 시민들은 상대적으로 ‘사람의 됨됨이’를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생각했다고 답했다. 현재 대통령에 대한 높은 지지율도 그러한 기대감이 어느 정도 충족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지인으로부터 그 이야기를 듣자 지난 대선 기간 동안 가장 인상 깊었던 풍경이 연이어 떠올랐다. 4월의 마지막 날 저녁에 있었던 문재인 후보의 신촌 유세였다. <“신촌이 디비졌다”…문재인 “투대문” 연호>라는 제목의 4월 30일 자 한겨레 기사에는 당시의 뜨거웠던 모습들이 자세히 나와 있다.

“이날 신촌로터리는 3만5000명(주최쪽 추산) 인파가 몰려 ‘문재인’을 부르짖는 함성으로 뒤덮였다. …… 이날 많은 시민들은 문 후보의 유세를 보기 위해 1시간 전부터 신촌로터리를 가득 메우고 기다렸으며, 각종 플래카드 등을 준비해 흔드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이날 유세는 수많은 사진들이 공유되며 인터넷에서 상당히 화제가 되었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청년들의 뜨겁고 자발적인 에너지가 사진들 속에서 그야말로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작은 사진에서 그런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면 실제 현장에서의 감동은 대체 어느 정도였을까.

그날의 풍경이 떠올랐던 것은 시민들이 어떤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택했는가와 함께 시민들의 어떠한 열망이 문재인이라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밀어 올렸는가, 하는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두 문장으로 집약할 수 없다. 그만큼 다양한 때로는 상반되기까지 한 열망들이 한 사람에게 투영된 결과가 현재의 정부이기 때문이다. 주체의 열망과 열망의 대상은 언제나 불일치하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그 상징적인 장면이 바로 4월 30일, 뜨겁고 열정적이었던 신촌 유세였다. 동시에 앞으로 반드시 다가오게 될 균열에 대한 해답 역시 거기에 있지 않을까 싶었다.

같은 지지자들이라고 해서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하나의 정책을 두고 상반된 입장임에도 같은 후보를 지지하기도 한다. 지난 대선 기간 동안 그런 유권자들을 많이 보았다. 이 후보가 이 정책은 반드시 관철시켜줄 것이다, 이 후보가 지금은 이렇게 말을 하고 있지만 대통령이 되고 나면 무리하게 정책을 밀어붙이지 않을 것이다. 각자의 주관적인 열망들이 모이고 모여 한 사람을 이렇게 수면 위로 밀어 올렸다.

그렇기 때문에 신촌에서의 그 뜨거운 모습들이 감동적으로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움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일치된 열정들이 과연 앞으로 다가올 복잡하게 분화된 현실 속에서도 계속 한 부대에 담겨 있을 수 있을까. 미세하기는 하지만 균열은 벌써부터 조금씩 일어나고 있다. 몇몇 인사에 대해 불만이 나오고 있고, 그에 대해 그런 얕은 지지는 필요 없다며 날선 비판이 오고 간다.

물론 건강한 균열은 건강한 사회를 위한 필수요소이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단순한 균열이 아니다. 균열 과정에서 피폐해지는 쪽에 남게 되는 ‘소외’이다. 일본의 역사사회학자인 오구마 에이지는 저서 『사회를 바꾸려면』(동아시아, 2014) 371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화폐경제가 침투하여 탈공업화 사회로 이행하고, 재귀성이 증대된 사회에서는 ‘무시당하고 있다’, ‘등 기댈 데가 없다’, ‘나를 대표해주는 사람이 없다’라는 감각이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된다.”

박근혜 정권의 몰락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문재인 대통령에게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는 맥락을 연결 지어 생각해 보자면, 우리를 개돼지라며 무시했고, 손을 내밀었을 때 외면했으며 결국에는 우리를 대표해주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최종 판단이 나왔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무시하지 않으며, 힘들 때 곁을 내어주고, 우리를 대표해줄 것 같은 사람과 그 세력을 대표로 선출했다.

한 사람이 하나의 짧은 글을 쓰는 동안에도 생각은 계속 변화하고 초심대로 글을 완성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퇴고 과정에서의 변화 역시 만만치가 않다. 하물며 수많은 이해관계와 장애물 가운데에서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국정운영은 어떠할까. 그 과정에서 지지층이 분열하는 것은 어느 정도 필연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 전에 한 번쯤은 서로가 서로를 소외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았으면 좋겠다. 이제 권력을 갖게 된 자는 그렇지 못한 자에게, 다행히 기성복이 몸에 잘 맞는 이들은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그리고 한때 같은 광장에서 함께 촛불을 들었던 이들은 서로에게, 당신이 무시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등을 기댈 곳이 없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당신을 대표해주는 사람이 없다고 느끼는 것은 아닌지. 한 번 감정의 울타리에서 벗어나고 나면 누구도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타인에게 날선 비판을 가하기보다는 손을 내밀고 연대를 구하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 그렇게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5년을 보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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