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소연 칼럼니스트
▷성우, 방송 MC, 수필가
▷저서<안소연의 MC되는 법>
         <안소연의 성우 되는 법>

여배우 김수미를 좋아하는가? 글쎄... 호불호가 있을 수 있다. 나로 말하면 호도 불호도 아니고 그냥 그 중간 어딘가 쯤이다. 그러나 <전원일기>의 ‘일용엄니’는 다르다. 나는 일용엄니를 존경한다. 아니, 광팬에 가깝다. 오로지 딱 한 회차의 스토리 때문이다. 나를 일용 엄니의 광팬으로 만든 그날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일용엄니의 외아들 일용이에겐 복길이라는 딸이 있었다. 아마도 1978년생쯤 될 것이다. 그 딸이 초등학교 2,3학년 때의 일이다. 학교에 총각 선생님이 새로 부임해 왔다. 촌스런 시골 학교엔 어울리지 않는, 지금으로 치면 ‘차도남’에 ‘엄친아’쯤 되는 잘생긴 꽃미남 선생님이었다. 바로 이 선생님이 사단을 일으킨다. 학부형인 동네 아낙들의 마음에 치유불가한 짝사랑의 바이러스를 퍼뜨린 것. 복길네도 예외일 수 없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사랑의 감정과 그 대상이 하필이면 아이의 선생님이라는 점, 남편에 대한 죄책감... 등등의 난제 앞에 끙끙 가슴앓이를 한다. 다정(多情)은 언제나 병이다. 노회한 일용엄니가 며느리의 이 애 닳는 상사병을 눈치 채지 못할 리 없다.

일용 엄니는 어느 날 며느리를 불러 앉힌다. 그러고는 뜬금없이 자신의 옛 사랑 이야기를 꺼낸다. 일찍 과부가 되어 일용이 하나 바라보며 외롭게 살아온 일용엄니의 억척스런 인생에도 애틋한 사랑의 기억이 있었던 것이다. 그 대상은 일 년에 서너 번 마을을 찾았던 소금장수. 당시 마을 아낙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직종이 소금장수였단다. 귀하디귀한 소금을 전국 방방곡곡에 공급하는 당시의 소금장수들은 돈 걱정 없는 자유인인 동시에 세상 소식을 전해주는 이야기꾼이면서 잠시 왔다 냉정히 떠나가는 나쁜 남자의 전형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여자들은 돈 많은 바람둥이 나쁜 남자에 약하다.) 어쨌거나 일용 엄니는 처음으로 며느리 앞에서 여자가 된다. 아득한 눈길 저편에 소금장수의 품에 안긴 젊은 일용엄니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얘기를 마친 일용 엄니는 잠시 침묵한다. 그러고는 더 없이 따듯한 눈길로, 며느리가 아닌, 또 하나의 여인으로서의 복길네에게 말한다.

“계집으로 태어나 말 못 할 사내 하나 가슴에 품는 것도 복이다.”

그 장면에서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그저 복길네의 표정만이 클로즈업 되었다.

‘말 못할 사내.... 말 못할 사내...’

얼마나 많은 뜻을 품고 있는 말인가. 말 못할 사내라니.

▲ ⓒ게티이미지뱅크

이후 복길네는 일상으로 돌아온다. 물론 사랑에 빠져 허우적대던 동안도 일상에서 달아났던 건 아니다. 달아나는 건 그저 넋 뿐.

속절없는 가슴앓이를 접고 단호하게 제 자리로 돌아온 복길네도 참 장하지만 더 위대한 건 일용엄니의 지혜다. 공감 능력이 있는 자에게만 허락된 지혜.

그러니 지혜롭게 용서하도록 하자. 우리가 주변에서 가끔 만나는, ‘지금 뭔가 실수 하는 것 같은’ 사람들을. 나 자신도 언젠가 한번쯤은 흔들렸던 적이 있는 어떤 유혹 앞에서 흔들리는 그들을 말이다. 그러나 단서가 있다. 그 모든 불면의 밤을 ‘말 못 할’이라는 조건 안에서 멈출 것. 그건 결국 비밀을 지켜야한다는 것이고, 진정한 비밀이란 타자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운이 좋다면 그 ‘말 못 할’ 사연이 아름다운 옛 이야기로 태어날지도 모른다. 일용엄니의 소금 장수 이야기처럼.

직장 동료가 불륜을 꿈꾸는 것 같아 불안하다던 친구의 얘기를 듣다가 20여 년 전 <전원일기>의 일용 엄니가 생각났다. 그 친구가 내 친구라면 일용 엄니의 말씀을 빌려 한 마디 해줄 텐데....

“계집으로 태어나 말 못 할 사내 하나 가슴에 품는 것도 복이여.

근디.. 그냥 거기서 멈춰야 혀. 그라야 똑똑한 계집인 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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