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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신문 전소영 기자】일용아 ~ 여보 그만 자고 일어나요.”

따사로운 햇볕이 창문 사이를 뚫고 비치던 오전 11시, 새벽 기도를 다녀온 후 부족했던 잠을 청했던 황영택(51)·박금주(48) 부부가 느지막이 하루를 다시 시작했다. 가장 먼저 일어난 금주씨는 서둘러 남편과 아들을 깨웠다. 그녀의 입은 부자를 불러 모으느라 쉴 줄 몰랐고 두 손은 두 사람을 위한 정성스러운 아침상을 준비하느라 바삐 움직였다.

아들 일용(24)씨는 꿈나라에서 헤어 나올 줄 모르고 영택씨는 아침부터 쉴 새 없이 울려대는 전화를 받느라 정신없었다. 성악가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봄이 오면서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행사에서 들어오는 요청으로 요새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그 사이 상다리 부러지도록 한상 가득 차려낸 금주씨는 잠에 취해 일어나지 않는 아들을 깨우기 위해 그가 자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일용씨는 현재 육군 상병으로 군복무 중인 군인이다. 휴가를 맞아 그동안 못다 한 잠을 자려는데 금주씨는 비몽사몽 한 그를 재촉했다. 엄마의 출동에 억지로 몸을 일으킨 일용씨는 세수로 겨우 잠을 깨우고 식탁 앞에 자리를 잡았다. 아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제야 영택씨도 휠체어를 굴려 그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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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는 늘 예기치 않은 순간에 찾아오는 법’

영택씨는 25살까지만 해도 신체 건강한 청년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모 대기업 총무과에서 근무하다가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형의 추천으로 건설업 현장직에 뛰어들었다. 영택씨는 '돈 많이 벌어 멋지게 살겠다‘는 목표로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사고는 늘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고 하지 않는가. 1992년 10월 21일 하늘에서 추적추적 빗방울이 내리던 날이었다. 그가 근무하던 공사 현장도 빗물에 바닥이 질척하게 젖었다. 궂은 날씨를 핑계 삼아 쉬엄쉬엄하면 좋으련만 평소 일 욕심이 많은 영택씨는 그날도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그런데 크레인을 타고 1톤짜리 콘크리트 파일을 땅속에 세우던 작업을 하던 중 그만 와이어가 끊어지면서 70도로 기울었던 파일이 그가 타고 있는 크레인 운전석으로 날아왔다. 그 순간 영택씨는 하반신에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을 느끼며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그가 눈을 떴을 때는 병원이었다. 2달 동안 중환자실에서 죽음의 문턱을 수없이 오가며 위기를 넘긴 그는 재활 치료를 받으며 회복할 수 있는 기대를 안고 일반 병실로 옮겨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의사는 척추 손상으로 인한 하반신 마비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전했다.

믿을 수 없는 결과에 그는 6개월가량을 미친 사람처럼 살았다고 한다. 하루아침에 휠체어 타는 신세가 됐으니 말이다. 그는 눈을 뜨고 숨을 쉬는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고 한다. 하루는 죽는 게 더 났겠다 싶어 5층 높이의 병원 테라스에서 몸을 던져볼까도 했지만 옴짝달싹 않는 다리 때문에 그마저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세상은 그에게 너무나 가혹한 시련을 안겼다.

▲ <사진 제공 = 황영택씨>

그가 인생의 가장 큰 시련에 빠져 있을 때 그의 옆에는 아내 금주씨가 있었다.

두 사람은 거래처 직원으로 연을 맺었다. 영택씨가 건설업에 종사한지 3년여가 됐을 무렵 거래처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금주씨를 우연히 마주쳤다. 큰 키에 긴 생머리가 매력적이었던 그녀에게 영택씨는 첫눈에 마음을 뺏겨 버렸다. 영택씨의 적극적인 구애로 만남을 시작한 두 사람은 영화 속 주인공들만큼이나 열렬한 사랑을 했다. 서로를 위해 어떤 희생도 불사를 준비가 돼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3년의 열애 끝에 결혼을 약속한 두 사람은 식을 올리기 전 살림을 합쳤다. 결혼식을 준비하며 앞으로의 행복을 꿈꿨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영택씨에게 끔찍한 사고가 일어났다.

영택씨는 사고 이후 아내가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을까 두려웠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드러내기보다는 되레 아내를 더욱 힘들게 괴롭혔다고 한다. 언젠가 그녀와의 이별을 결심하고 이별을 고했지만 아내는 묵묵히 그의 옆을 지켰다. 아내는 그가 삶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 다시금 붙잡아준 고마운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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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가는 유일한 희망, 아들 일용이”

식사를 마친 후 영택씨와 아들 일용씨는 서둘러 옷을 챙겨 입었다. 이날은 영택씨의 정기 검진이 있는 날이었다. 평소에는 아내와 함께하는 병원길이지만 영택씨는 진료를 마친 후 오랜만에 함께 운동도 할 겸 아들과 동행하기로 했다. 운전석에 오르는 아버지를 재빠르게 따라간 일용씨는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 능수능란하게 휠체어를 접어 트렁크에 실었다.

병원으로 가는 길, 일용씨는 요즘 자신이 즐겨 듣는 음악을 아버지에게 소개했다. 성악가인 아버지의 끼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는지 대학도 3수 끝에 실용음악을 전공할 만큼 음악을 사랑한다. 사실 영택씨와 일용씨가 선호하는 음악 스타일은 정반대다. 영택씨는 오페라나 가곡을 좋아하는 반면 일용씨는 흥겨운 밴드 음악을 즐겨 듣는다. 음악적 취향 때문에 간혹 마찰 아닌 마찰을 빚곤 하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아들의 꿈을 항상 응원하는 든든한 지원군이다.

▲ <사진 제공 = 황영택씨>

어느 부모에게나 자식 귀중한 것은 마찬가지겠지만 영택씨에게 아들 일용씨는 유난히도 각별하다. 기적 같은 존재랄까. 영택씨가 사고로 입원한지 4주가 됐을 무렵, 며칠 속이 안 좋다며 병원 진찰을 받고 온 아내 금주씨는 그에게 임신 소식을 알렸다. 임신 5주차, 불과 사고가 있기 일주일 전 임신이 됐던 것이다. 인생의 낭떠러지 끝에 서있던 그 순간 하늘에서 내려준 작은 천사가 영택씨 부부에게 어떤 의미였을지는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영택씨가 살아가야 할 이유와 희망인 일용씨는 건강하게 부부의 품에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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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장래희망은 ‘장애인’입니다”

영택씨가 의사와 얘기를 나누는 사이 일용씨와 단둘이 남아 얘기를 나누게 됐다. 대화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아버지에 대한 얘기로 흘러갔다.

일용씨는 아버지가 부끄럽거나 창피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며 그것은 지금까지도 변함없다고 한다. 장애의 의미를 몰랐던 어린 시절에는 오히려 아버지가 영웅처럼 위대해 보였다고 한다.

언젠가 어린이날 가족과 다 함께 놀이공원에 간 적이 있단다. 놀이기구를 타기 위해 일용씨네 가족도 끝이 보이지 않는 긴 대열에 합류했는데 직원이 휠체어를 탄 영택씨를 보고 먼저 태워준 것. 장애인에 대한 배려였다. 그런데 어린 일용씨 눈에는 그것이 아버지의 엄청난 능력처럼 보였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그날 이후 장래희망이 ‘장애인’일 정도였다. 또 하루는 동네 아이들과 싸움이 붙었는데 ‘우리 아빠가 누군지 아냐’며 자랑스럽게 장애인이라고 말한 적도 있단다.

일용씨는 자신이 장애에 대한 원망이나 편견 없이 잘 자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어머니의 역할이 컸다고 했다. 금주씨는 아들이 어린 시절부터 항상 ‘아빠는 훌륭한 사람이야’, ‘너희 아빠는 최고야’라는 말을 습관처럼 했다고 한다. 일종의 세뇌교육이랄까. 물론 부족한 아빠가 되지 않으려 영택씨 또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아들을 위해 농구, 배드민턴, 테니스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운동은 뭐든 함께했다. 또 더 넓은 세계를 경험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자신이 외국에 나갈 때마다 아들도 함께 데리고 갔다. 부부의 무한한 노력과 사랑 덕분인지 일용씨는 누구보다 밝고 건강하게, 기특한 효자로 성장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사이 영택씨가 진료를 마치고 모습을 드러냈다. 부자는 오랜만에 함께 배드민턴을 치기 위해 인근 체육관으로 향했다. 아버지만한 아들 없다더니 운동용 휠체어가 아니라 불리한 조건이었지만 영택씨는 일용씨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실력을 보여줬다. 역시 왕년 국가대표 테니스 선수 출신다운 모습이었다.

▲ <사진 제공 = 황영택씨>

현장직 노동자가 테니스 선수, 성악가가 되기까지’

하반신 마비가 된 후 더 이상 건설일을 할 수 없었던 영택씨는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끊임 없이 했다. 그러던 와중에 장애인들이 재활을 목적으로 스포츠 활동을 많이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양궁, 탁구, 수영 등 다양한 종목들 가운데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테니스’였다. 휠체어를 타고 바람을 가르며 라켓을 휘두르는 선수들의 보고 ‘이거다’ 싶었던 영택씨는 그 길로 휠체어테니스를 시작했다.

하지만 휠체어를 타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영택씨에겐 테니스 기술보다도 휠체어 타는 것부터 몸에 길들여야 했다. 그는 매일 휠체어를 타고 공원을 미친 듯이 돌았다고 한다. 몸의 유연성을 기르기 위한 수영과 지구력과 근력 향상을 위한 웨이트트레이닝도 병행했다.

독하리만큼 끈질기게 스스로를 훈련한 그는 휠체어테니스를 시작한 지 5년 만에 국가대표에 선발돼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았다. 1998년 방콕아·태장애인아시안게임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고 세계 랭킹 36위에 오르는 영예도 안았다.

▲ <사진 제공 = 황영택씨>

거침없이 승승장구만 하던 그였는데 세월 앞에 장사 없다던가, 어느덧 30대 중후반에 들어선 그는 선수로서 조금씩 체력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운동선수라는 직업의 특성상 평생 할 수 있는 것이 아기니 때문에 영택씨는 또다시 향후 진로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그러던 찰나 휠체어4중창팀을 보며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됐다. 20대 때도 기타를 치고 노래 부르기를 즐겼던 그는 과감히 테니스 라켓을 내려놓고 성악이라는 제2의 도전을 시작했다.

36살이라는 조금 늦은 나이에 그는 대학 입시를 준비해 다음 해 성결대학교 성악과에 실기우수생으로 입학했다. 음악을 오랜 시간 전문적으로 배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발성부터 발음까지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어온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무사히 동기들과 함께 졸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장애가 있는 그에게 쉽게 무대라는 기회를 내주지 않았다. 그는 누군가 자신을 불러주길 마냥 기다리지 않고 직접 자신이 오를 수 있는 무대를 찾아 나섰다. 희망 나눔 콘서트를 시작해 병원의 재능기부 공연 등 자신이 노래를 할 수 있는 곳이라면 전국 어디든마다 않던 그는 세계적인 희망의 아이콘 폴 포츠와 한 무대에 서는 영광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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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여보, 내 사랑 금주씨”

이제는 성악가로서 나름 이름을 떨친 그는 요즘 기업을 비롯해 학교, 교도소 등 다양한 곳에서 그의 인생을 주제로 한 강의도 펼치고 있다. 누구보다 우여곡절 많은 삶을 살아온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음으로써 사람들에게 도전에 대한 동기부여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다.

덩달아 아내 금주씨도 바빠졌다. 금주씨는 사랑하는 아내로서, 성실한 매니저로서, 때로는 따끔한 말도 서슴지 않는 조언자로서 항상 영택씨의 옆에서 함께한다. 영택씨는 지금 자신의 삶은 어내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23살 꽃다운 나이에 시집와 20년 넘게 산전수전을 다 겪은 아내에게 영택씨는 늘 고맙고 미안할 따름이다.

배드민턴 내기를 마친 부자를 기다리고 있던 금주씨가 환한 미소로 두 사람을 맞이했다. 영택씨 가족은 살랑살랑 일렁이는 봄바람을 따라 공원 산책을 하기로 했다. 일용씨가 아버지와 장난을 치며 앞질러가는 사이 금주씨와 단둘이 남은 기자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물었다.

“사고 이후 영택씨가 떠나라고 했을 때 왜 가지 않으셨어요?”

“글쎄요.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그게 제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 사람을 떠난다고 해서 행복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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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택씨는 인생에서 가장 빛날 나이에 두 다리를 잃었지만 누구보다 자기를 믿고 아껴주는 아내와 든든한 아들을 얻었다. 어느 날 갑자기 한 남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아사 간 장애가 이제는 가족을 더욱 단단하게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됐다.

한편으로는 영택씨에게 장애가 생기지 않았더라면 더 행복할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장애가 없었다면 보다 안정적이고 편안한 삶이었을 테지만 장애가 있다고 해서 행복이 덜한 것은 아니라는 걸 영택씨 가족과 보낸 하루가 끝날 무렵 비로소 깨달았다.

어쩐지 영택씨를 보는 내내 들에 핀 ‘잡초’가 떠올랐다. 온실 속의 화초는 아름답고 화려한 삶을 살지만 위기가 닥치면 금방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잡초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꿋꿋하게 견뎌내 무성히 자란다. 마치 영택씨처럼.

사랑은 만병통치약이라던가. 아무래도 영택씨에게 사랑의 약효가 톡톡히 작용한 듯하다. 비록 몸의 병은 고칠 수 없었지만 삶을 포기하고 싶었던 마음의 불치병은 완치하고 새 삶을 살고 있으니 말이다. 앞으로 여생 동안 영택씨에게 얼마나 더 많이 더 큰 위기가 찾아올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때마다 그가 지금까지처럼 아내와 아들의 사랑으로 다시 또 딛고 일어서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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