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소연 칼럼니스트
▷성우, 방송 MC, 수필가
▷저서 <안소연의 MC되는 법>
         <안소연의 성우 되는 법>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을 처음 접했던 십대 소녀 시절, 나는 이 마지막 구절을 납득하기 힘들었다. 당시의 내 뇌는 너무나 탱글탱글하여 사랑했던 그 사람의 이름을 잊는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로 보였다. 뇌의 한 부분을 칼로 도려낸대도 그의 이름 석 자는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단 말이다. 다행이도 내 뇌는 아직도 제법 탱글탱글한 모양인지 유치원 시절 맘에 두었던 사내아이의 이름까지도 또렷이 떠올릴 수 있다.

다만 이럴 때는 있다. 내가 아직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좀 계면쩍어서 ‘아... 뭐더라... 그... 걔 이름 말야.’ 라고 짐짓 능청을 떠는 거다. (설마 박인환 시인도? 흠.... 그건 아니겠지.)

각설, 갑자기 <세월이 가면>이 떠오른 건 내가 참 존경했던 고등학교 시절 생물 선생님 때문이다. 선생님의 목소리, 말투, 걸음걸이까지 이토록 선명한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다니... 비쩍 마른 체형에 비쭉 비쭉 울퉁불퉁했던 얼굴 생김새와는 달리 참 푸근하고 느긋하고 스마트 하셨던 그 선생님은 입시에 쪄든 우리에게 재미나고 유익한 정보를 많이 들려 주셨다.

어느 날이었다.

“짜장면이 땡기는 날 있죠? 유독 짜장면이 먹고 싶어 미치겠는 날, 그런 날은 짜장면을 먹어야 돼요. 그건 우리 몸이 짜장면에 들어 있는 어떤 성분을 필요로 한다는 거거든. 밀가루가 됐건 기름기가 됐건 그게 지금 우리 몸에 필요한 거예요.”

선생님은 서울대 생물학과 출신이셨다. 서울대라는 이름이 더해주는 권위! 이 말씀을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지난 30여년 선생님의 말씀에 충실하게 살아왔다.

그러다 어느 날 깨달았다. 사랑도 짜장면과 같다고.

뜬금없이 나를 빨아들이는 남자, 갑자기 미치도록 그립고, 함께 있고 싶어지는 그 남자에게는 나에게 필요한, 그러나 과하게 결핍된 무언가가 있는 것이라고.

돈 많은 남자가 좋다고? 그건 내게 돈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많이 배운 남자가 좋다고? 그건 내게 배움이 더 필요하다는 얘기다.

높은 자리에 오른 남자가 좋다고? 그건 내 안에서 권력욕이 꿈틀댄다는 얘기다.

그런데 남자는 짜장면이 아니다. 내 맘대로 사먹을 수가 없다.

운이 좋아 그런 남자를 손에 넣었다 해도 그를 통해 획득한 것들은 진정한 내 것이 아니다. 그것이 진짜 내 것처럼 되려면 남자의 것을 함께 지키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열심히 재테크를 도와야 하고 남편을 위한 로비도 해야 할 것이고, 부부 모임 같은 데서 남편 면 떨어뜨리지 않도록 신문을 뒤적여야 할 것이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 정도 고생은 얼마든지 하겠다는 여성들이 많은 것도 안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런 행운을 만나는 건 쉽지 않다.

▲ ⓒ게티이미지뱅크

대부분의 여성들은 그저 마음만 굴뚝이다. 다 가진 것 같은 그 남자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러니 별 수 없다. 그 결핍을 내 스스로의 노력으로 채워갈 밖에.

물론 이러한 결핍의 원인이 내 유전자의 갈망 때문이라면 그건 예외를 인정한다. 키가 큰 사람이 좋다거나 피부가 가무잡잡한 사람이 좋다, 운동 신경이 뛰어난 사람이 좋다는 등의 선호 말이다. 내가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유전적 자질을 갖춘 사람에게 끌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자연스러움을 넘어선 끌림,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너무 아픈’ 그리움은 내 결핍이 만들어 낸 그림자다.

오늘의 결론,

‘짜장면이 먹고 싶다면 사먹어라. 짜장면이 그대의 결핍을 채워 줄지니.

그 남자를 원한다면 일단 그 남자를 꼬셔라. 그러나 내 것 할 수 없다면... 그 남자의 속성들을 스스로 쟁취하라.’

관련기사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