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여혐민국> 펴낸 페페미 주한나(양파) 작가

▲ 2016년 5월 22일 '강남역 살인사건' 피해 여성을 추모하기 위해 서울 강남구 서울지하철 2호선 강남역 10번 출구를 찾은 시민들 ⓒ뉴시스

강자와 약자의 상황 뒤바꿔 보여주는 ‘미러링’
여성혐오 공론화 및 피해사례 공유, 메갈리아 덕

‘강남역 살인사건’ 최악의 공포 시나리오
‘여자라서 죽었다’…여성 목소리 모인 계기

출산·육아 겪으며 페미니스트 돼
대한민국, 여성혐오 심한 사회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지난해 5월 17일, 강남역 인근 건물의 화장실에서 한 남성이 여성을 살해했다. 경찰 조사결과 가해자는 “여자들이 나를 무시하는 게 싫었다”며 일면식도 없는 여성을 흉기로 수차례 찔렀다.

이른바 ‘강남역 살인사건’은 여성들에게 많은 충격을 줬고, 강남역 10번 출구는 피해여성을 추모하는 내용이 담긴 수만 장의 포스트잇으로 도배됐다.

여성들의 움직임은 추모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동안 겪어왔던 성폭력, 성차별, 여성이라서 겪었던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사례들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강남역 살인사건을 비롯해 공유된 사례들은 ‘여성혐오’라는 범주로 묶을 수 있었다.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한국 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를 드러내고 이를 타파하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자연스럽게 페미니즘이 이슈가 됐고 페미니즘 공부모임이나 커뮤니티가 만들어지는 등 여성의 인권에 대한 논의도 활발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을 반영하듯 정치권에서도 여성들의 목소리에 반응하는 모양새다. 문재인 대통령은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는 후보자의 저서에 등장한 여성비하 표현이나 성평등 인식이 문제가 되기도 한다. 이전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모습들이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에 다양한 방식으로 깔려있는 여성혐오 현상을 담은 책 <여혐민국>을 펴내 주목을 받고 있는 인기 ‘페페미(페이스북에서 활동하는 페미니스트)’ 주한나(37·필명 양파)씨는 “여성에게 몇 배로 더 가혹한 대한민국이 바뀌기 위해서는 일상에서부터 저항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여성 커뮤니티 ‘메갈리아’에 대해 “여성혐오를 공론화 시킨 동시에 여성도 혐오 생산자가 될 수 있음을 경고했다”고 평가했다.

주한나씨는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이민간 뒤 현재 영국에 거주하며 런던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에서 일하는 경력 17년차 IT 전문가다. 그리고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하다. 여혐이 지배하고 있는 한국사회에 대해 객관적이고 진솔하게 자신의 생각을 드러낸 글로 블로그와 페이스북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본지는 <여혐민국>의 저자 주한나씨와의 서면 인터뷰를 통해 한국 사회의 여성혐오 문제와 그 해결책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여혐민국’ 저자 주한나씨 <사진 제공 = 주한나>

누구에게나 내재돼 있는 여성혐오

Q. 현재 페이스북 페이지는 2만3000여명이 ‘좋아요’를 눌렀고 2만6000여명이 팔로우하고 있다. 이 정도의 인기를 예상했는지.

블로그를 십년 정도 하면서 갑자기 방문객이 많을 때도 있었고 조용할 때도 있었다. 2만6000명이 많다는 생각은 없다. 수십만, 수백만명이 팔로우하는 페이지도 있지 않나. 블로그 할 때도 한 달 방문객은 보통 몇만에서 몇십만 됐었다.

Q. 처음에는 블로그를 통해 페미니즘 관련 글을 게재했다. 글을 쓰게 된 계기, 이후 페이스북으로 옮긴 이유는.

블로그에는 연애, IT 등 신변잡기 수준의 글을 썼다. 여성문제 관련 글도 분명히 있었지만 주는 아니었다. 여성혐오 문제 관련 글이 본격적으로 올라가기 시작한 것은 메갈리아가 논란이 된 후였다. ‘그렇게 말이 많은 곳이 뭔지 알아나 보자’ 싶어서 메갈리아와 오늘의유머(오유),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까지 탐사한 후에 관련 글을 올렸다. 그후 많은 악플이 달렸다. 안되겠다 싶어 블로그를 닫고 페이스북으로 옮겼다. ‘욕을 하려면 본명, 소속 다 밝히고 하라’는 의도였다.

Q. 책에서 ‘여성스럽다’는 이유로 그동안 글쓰기 등의 행위를 피했다고 했는데.

우리 안에 조금씩은 다 내재돼 있는 여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들 어릴 때 그런 말 많이 들었을 것이다. ‘계집애 같은’, ‘남자애가 계집애 같이’ 등. 불문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 수업에 들어가니까 여학생이 거의 대부분이여서 엄청난 실패처럼 느껴진 적도 있었다. 글쓰기 같은, 수많은 문과 쪽의 관심을 여성적인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자 같은 성향은 멸시당하는 것이 아닌 우월함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그래서 (흔히 남성이 우월한 영역이라고 하는) 수학을 잘하고 싶고, 기계에 능하고 싶었다. 외모에 신경 쓰고 사근사근한 여자가 아닌, 평균적으로 말하는 ‘보통 여자’와 다르고 싶었던 마음이 작용한 것 같다. 결론은 내 자신속의 여혐 때문에 그랬다.

Q. 페미니즘 관련 글에 악플도 많이 달렸고 또 계속 달리고 있다. 힘들지 않나.

한국 여성들이 처한 현실에 대해 글을 쓰면 ‘어쨌든 한국여자들 김치녀 ㅋㅋ’, ‘역차별을 얘기합시다’, ‘군대 군대 군대’, ‘외국 사는 사람은 그냥 외국 얘기만 하세요’, ‘주작 쩌네’, ‘그래서 어쩌라고’ 등의 악플들이 달린다. 다행히 기억력이 나빠 금방 잊는다. 그리고 아무래도 평소 생활에서 한국 지인들에게 영향 받을 일이 전혀 없어서 인터넷은 컴퓨터만 끄면 사라지는 세계이기도 하다. 스트레스 받으면 그냥 뉴스를 보거나 게임 한 판 한다.

Q. 동양인 여성으로 아이 둘을 키우면서 외국계 기업에서 전문가로 활동한다는 것이 쉽진 않을 것 같다.

지금의 내 생활반경에서는 내가 정말 평범한 케이스여서 ‘대단하십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어색했는데, 한국의 열혈 워킹맘들의 사정을 듣고 왜 그렇게 말하는지 이해하게 됐다. 내 실제 생활보다 훨씬 더 힘든 상황을 이겨나가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실제로 내가 한국에 있었다면 엄청나게 능력이 있어서 인정받거나, 운이 좋거나, 친정이나 시댁의 지원이 있거나, 무지하게 독하거나 등의 요소가 하나만도 아니고 몇 개가 맞아 떨어져야 워킹맘으로 사는 게 가능했을 거라 본다. 나도 누가 칭찬해주면 ‘네, 제가 좀 열심히 살고 능력도 있습니다. 하하핫’ 하면 좋겠으나 양심상 그럴 수가 없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가 평범한 케이스인 이유는 내 주변 환경과, 그 환경이 설정되도록 도와준 내 이전의 페미니스트들, 노동운동가들 덕이다. 19세기의 여성 참정권 투쟁부터 여성이 일할 수 있는 권리, 남성과 같은 보수를 받을 수 있는 권리, 출산휴가를 가질 권리, 가정 있는 여성이 차별 받지 않을 권리 등을 위해 싸워온 사람들은 분명 페미니스트들이었다.

▲ ⓒ베리북

여성에 공감하지 못하는 한국 남성들

Q. ‘여혐민국’이라 불릴 만큼 대한민국은 정말 다른 나라들에 비해 여성혐오가 심한 편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한국보다 심한 곳도 있다. 하지만 한국 정도의 경제·사회 발달을 고려한다면 여성혐오가 비교적 심하다고 생각한다.

Q. 국내에서 책이나 사진으로 본 서양권의 페미니즘은 과격한 시위와 퍼포먼스로 가득하다. 실제로도 그런가.

실제로도 그렇긴 한데 아주 흔한 광경은 아니다. 한국처럼 전국적으로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던가 하는 그런 일은 6,70년대 이후엔 잘 못 본 것 같다.

Q. 여성혐오를 인종차별, 지역차별에 자주 빗대어 표현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사회에서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그들의 권력이 무엇인지 보여주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자신이 무시당하는 상황은 본능적으로 이해한다. 한국인은 유색인종으로서 인종차별에 대한 피해의식이 조금씩은 있다. 사회적 약자의 처지를 이해시키기 제일 쉬운 방법은 강자가 약자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Q. 남아공, 영국에 살면서 여성혐오적 행위, 인종차별이나 지역차별을 자주 겪었는지.

나라나 문화, 지역마다 인종차별은 존재하지만 그 결이 많이 다른데, 내가 주로 쓰는 인종의 비유는 한국 사람이 이해하는 인종차별, 즉 주로 미국에서 일어날 법한 이야기다. 그러나 남아공 자체에서 내가 겪은 인종차별은 동아시아인이 아주 희귀한 환경이라서 ‘신기하다’ 혹은 ‘별 상관없는 외국인’ 정도였지 사회 전반에 걸친 역사적, 제도적 인종차별은 아니었다.

사실 성차별 역시 그리 많이 겪지 않았다. 다만 남아공은 백인 사회와 흑인 사회 사이의 간극이 아주 크다. 역사적으로 착취돼 온 흑인 사회는 교육의 부재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여성혐오가 어마어마하게 많고 여성상대 범죄도 많다. 반면 백인 사회는 상대적으로 여성혐오가 적다. 남녀 갈등의 주요인인 가사와 육아를 흑인의 노동력으로 채워 여성의 사회 진출도 활발하다. 오히려 영국이나 미국보다 평등한 부분도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데이트 강간, 폭력, 대학교의 성폭력 문화 등은 당연히 있었다.

Q. 얼마 전 페미니즘에 대항해 ‘이퀄리즘’이란 개념이 화두에 오르기도 했다. 어떻게 보는가.

한국 남성들이 외국의 의견에 그렇게 신경 쓰는 줄 몰랐다. 이퀄리즘이야 당연히 ‘듣보잡’ 이론이다. 남초사이트(여성보다 남성 회원이 많은 사이트)에서 ‘외국에서는 페미니즘이 아닌 이퀄리즘을 주장한다’면서 ‘페미니즘은 진정한 성평등이 아니다’라고 말하기에 ‘해외에도 이상한 사람들은 많으니 어디서 퍼왔겠지’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어느 한국 트위터 유저의 날조였다. 한국이 아닌 외국에서 주장하는 단어였다면 문제없이 받아들여질 만한 분위기였다.

Q. 최근 김훈 작가가 <언니의 폐경>에서 생리를 묘사한 것이 전혀 여성의 현실과 맞지 않아 문제가 됐는데.

김훈 작가는 여성의 생리에 대해 “뜨거워. 몸속에서 밀려나와”라고 표현했다. 사실 이성의 감정이나 생리현상 등을 포함하는 일상생활을 아주 정확하게 아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김훈 작가의 묘사는 너무 황당하다. 지나가는 여성을 붙잡고 물으면 ‘뜨악’할 내용인데 이 소설이 상까지 받았다고 해 아연실색했다. 당시 심사위원들을 찾아보니 역시 전원 남자였다. 여성에 대해 무지하고, 알려고 하는 노력도 없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남자는 아니지만 남자가 소변보면서 “뜨거운게 막 흘러나와”라고 동생에게 말하지 않을 거라는 정도는 알지 않나.

▲ ⓒ게티이미지뱅크

강자와 약자의 전복, 메갈리아의 미러링

Q. 여성혐오에 대항해 등장한 메갈리아에 대한 평가를 내린다면.

메갈리아의 유일한 업적은 ‘여혐 공론화’라는 이들이 있지만 나는 메갈리아의 제일 큰 업적이 다른 데 있다고 생각한다. 남초사이트에서는 여혐 미러링 글만 공유하며 메갈리아를 욕했으나 하루에도 몇 개씩 올라오는 성폭행, 성추행, 성차별 경험담은 하나도 안 퍼가더라. 그래서 여성들 안에서 거대하게 일어나고 있는 분위기 변화를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메갈리아에는 온갖 추잡하고 치사한 방법으로 당한 경험담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네가 여지를 줬겠지”라고 매도 받지 않고, “너 이제 인생 망쳤다 어떻게 시집갈래”라는 악담과 걱정도 없었다. 당했다는 얘기를 하는데 그걸 야동의 한 장면으로 떠올리는지 묘한 표정을 짓는 사람도 없었고, 갑작스레 ‘보통 여자’가 아닌 ‘그런 여자’로 보면서 거리를 두려는 이도 없었다. 그저 위로와 공감, 가해자를 향한 비난만 있었다.

메갈리아는 피해자들을 그렇게 다독이고, 가해자에게 욕설을 퍼부어줬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로 여자들이 자신이 당한 피해를 말하기 시작한 것이 난 그 덕분이라고 믿는다. 성폭력은 확실한 범죄고, 피해자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을 것이다. 전국의 여자들이 깨어난 셈이다.

Q. 그러나 메갈리아의 미러링 화법은 남성혐오로 비춰져 실패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실패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메갈리아가 없었다면 여혐이 지금처럼 공론화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사실 미러링은 내가 훨씬 더 많이 하는 것 같은데, 나에게 미러링을 왜 하느냐고 공격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메갈리아의 미러링은 내가 주로 택하는 시나리오성 미러링이 아닌 일베에서 나온 충격적 여혐 단어와 콘셉트를 그대로 미러링해 공격적으로 보였던 것 같다.

우리 모두가 여성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편견 몇 개는 여성은 공격적이지 않고, 그냥 참고 넘어가고, 더러우니 피해버린다는 느낌이다. 그러니 남성들에겐 더 ‘만만’했을 것이다. 메갈리아는 이를 통쾌하게 깼다고 생각한다. 여자도 일베만큼 험하게 싸울 수 있다. 혐오를 생산해낼 수도 있다. 단지 하지 않았을 뿐이다. 앞으로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결의를 보여줬다고 본다. 나 역시 일베만큼 과격하게 공격하는 댓글들을 보면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여성문제를 논할 때 더 용기가 생기더라. 강남역 사건 때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을 그렇게 나눌 수 있었던 것 역시 메갈리아 덕이라고 생각한다.

▲ 지난 5월 17일 서울 강남구 강남역 인근에서 열린 '강남역 살인사건' 1주기 추모제 ⓒ투데이신문 전소영 기자

강남역 살인사건과 여성들의 외침

Q. 20대 여성이 조현병에 걸린 남성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강남역 살인사건’은 어떻게 보나.

여성들이 ‘최악의 공포 시나리오’를 눈앞에서 본 사건이다. 한국에서 여자들은 남자에게 위협 당할 일이 상당히 많다. 싫지만 해코지 당할까봐 좋게 거절하려고 했더니 쌍욕을 하면서 협박하는 남자, 버스나 지하철에서 가슴부터 다리까지 뚫어져라 쳐다보는 아저씨나 할아버지들에게 괜히 대응했다가 얻어 맞을까봐, 재수 없으면 정말 칼이라도 맞고 죽을까봐 기분이 더러워도 아무 말 하지 않을 것이다. 택시 안에서 성희롱 발언을 하는 기사 아저씨의 말도 보통 참고 넘어간다. 여기에 매일 가볍게 당하는 외모 비하, 직장 또는 학교에서 남자 선후배들과의 불쾌한 해프닝, 남성 가족에게 받는 성적·육체적 학대, 심한 성폭력 경험까지 다 더해보자. 이런 상황에서 여자들은 ‘네가 미리 조심하지 않아서 그렇다’ 라는 비난을 받을까 두려워서 입을 닫았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폭발하지 않았을까. 범죄를 피해자 탓으로 돌리는 것은 남자에게 편리한 핑계일 뿐만 아니라 여자에게도 얄팍한 도피처가 됐기 때문이다. 강간당한 여자는 ‘밤늦게 다녔고, 술집에서 일했으며,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란 말을 믿으면, 나는 ‘그런 여자’가 아니기 때문에 안전할 거라 생각할 수 있었다. 사회가 만들어둔 소위 ‘개념녀’ 프레임에 자신을 맞췄으니, 나만은 안전하리라 여길 수 있었다.

그 모든 환상을 와장창 부순 사건이 강남역 살인사건이다. 그 살인범은 피해자가 개념녀인지,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는지 묻지 않았다. 피해자가 ‘김치녀’라서, 술집 여자라서, 맘충이라서, 야한 옷을 입었다가 강간 미수로 죽은 게 아니고, 기센 여자처럼 바락바락 대들어서 죽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아무 이유 없이, 그저 여자라는 이유로 타겟이 됐다. 어떻게 대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이 때 비로소 느낀 여성이 많을 것이다. 내 태도가 어떻든 간에, 내가 무슨 노력을 하든지 간에 언제 어디서든 당할 수 있겠구나. 그리고 만약 내가 죽는다면 어떻게든 내 잘못으로 전가 되겠구나. 그런 의미에서 여성들이 늘 ‘해코지 당할까’해서 참고 넘어갔던 그 모든 순간들의 최악의 공포 시나리오가 실제가 됐다고 본다.

Q. 강남역 살인사건도 1년이 지났지만 이것이 여성혐오 범죄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도 여론이 분분하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1년 밖에 지나지 않았고, 그 전까지 한국 사회가 어땠는지를 고려할 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논란은 계속 있을 것이고, 10년 후에도 소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여혐 범죄가 아니었다고 주장할 거라 본다.

▲ ⓒPixabay/프리큐레이션

‘조금씩’ 바뀌어 가는 사회

Q. 홍준표 돼지 발정제 사건, 안경환 여성비하 논란에 대해 어떻게 봤나.

그 시절 여성들의 삶이 어땠는지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였다고 본다. 얼마나 변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변하지 않았는지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고 믿어서 그 시절 그런 환경에서 자란 이들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여혐을 피해갈 수 없었을 거라 생각한다. 나이가 들면서 여혐이 그대로 굳어지는 사람이 있고, 젊었을 때는 이런저런 실수를 했더라도 나이 들어서는 여성들의 지위 향상에 힘을 쓴 사람, 폭력적인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와해한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젊었을 때의 사건을 가지고 무조건 ‘죽일 사람’ 만드는 건 아니라고 보지만, 홍준표씨 같은 경우는 아무런 반성도 보이지 않았고 여성 비하 역시 계속됐다. 안경환씨의 경우는 다른 케이스라고 생각했다. 홍준표씨의 돼지 발정제 사건은 예전 일이라고 대권 후보로서의 자질과 상관 없다하던 이들이 많았고 지지율도 높았는데, 같은 사람들이 여혐으로 논란이 된 사람들을 똑같은 잣대로 비판했는지는 모르겠다.

워낙 여혐이 깊은 사회라서 여혐에서 자유로운 이들이 별로 없는 건 사실이지만 젠더 감수성이 고위 공직자들의 검증 조건에 들어가는 건 좋다고 생각한다. 여혐은 커리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외적인 압력이 생기면서 사회 분위기도 많이 바뀔 것 같다. 아직 과도기라 그 잣대에 대한 사회적 동의는 없지만 점점 안정될 거라 믿는다.

Q. 여성의 여성혐오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는가.

벗어나야 한다고 강요는 하지 않겠지만, 조금씩이라도 벗어날 거라고 본다. 하지만 아무리 여성혐오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도 남성보다 더 남성적으로 여성을 혐오하는 여성이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Q. 사회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일상 속에서 페미니즘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내가 지적해도 되는 편한 자리에서의 대화가 ‘좀 아니다’ 싶을 때 혹은 인터넷 뉴스에 너무 심한 악플이 달린다 싶을 때 한 마디 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일상에서의 한 마디가 큰 것 같지 않아도 내가 대하는 모든 사람들의 인식을 조금씩이라도 바꾼다. 많은 사람을 스쳐지나가지만 실제로 말을 하고 교류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하루에 수십 명이면 상당히 높은 편이다. 그 중 한 사람이 하는 말은 꽤 큰 영향을 미친다. 남동생 친구들에게 하는 한 마디가 시간 낭비인듯 해도 이들도 나중에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여성이 비슷한 말을 하면 이미 한 번 들은 말이라서 훨씬 쉽게 ‘그런가보다’ 하게 된다. 여성에게 함부로 대하다가 데인 택시기사분이면 그 다음부터 어린여자라고 너무 만만하게 보진 않을 거라 생각한다. 대학 새내기가 웃기지 않은 여혐 농담을 했다가 여학우들이 싸한 반응을 보이면 그 다음부터는 조금 더 조심하게 된다. 그 ‘조금’이 쌓여서 사회를 바꾼다고 본다.

Q. 한국 남성들에게 한 마디 해주신다면.

한국 사회는 극소수의 금수저를 빼고는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사회다. 취업하기 힘들고, 돈 벌기 힘들고, 직장에서 살아남기 힘들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더 힘들다’고 하는 이들에게 쉽게 마음이 가지 않을 수 있다. 특히나 평소에 자신이 보기에 젊음과 여성성으로 이득을 취하는 이들이 ‘더 많은 것을 바란다’고 느꼈다면 더욱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제로섬 게임이 아닌 부분도 많다. 치안에 대해 같이 관심을 가져주는 것은 결국에는 모두에게 이익이다. 여자들이 직장에서 몰려나지 않는다면 혼자서 가정을 부양해야 하는 부담도 적어진다. ‘너는 남자니까 인생 쉽게 살잖아’라는 공격이 아니라, 약간의 배려로 훨씬 더 같이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자는 쪽으로 이해하면 좋겠다.

Q. 끝으로 ‘여혐민국’에서 싸우고 있는 여성들에게 한 마디 해주신다면.

Stronger, Together!(함께, 더 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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