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일 전국금속노동조합 경기지부 조합원들이 서울 논현동 영풍그룹 본사 앞에서 ‘시그네틱스 문제 해결을 위한 영풍 규탄대회’에서 영풍그룹을 향해 구호를 외치고 있다 ⓒ투데이신문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문재인 정부가 비정규직 축소를 국정과제로 삼자 기업들이 발 빠르게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속도를 내고 있지만 영풍그룹의 전자 부문 계열사인 시그네틱스는 이에 역행하고 있는 모습이다.

시그네틱스 생산 정규직 노동자들은 지난 15년간 3차례나 해고당한 뒤 복직투쟁을 이어오고 있다. 이들은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생산 정규직을 두지 않고 외주로 운영한다는 영풍그룹 방침 때문에 해고당했다”고 주장하며 복직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영풍그룹 관계자는 ‘그룹과 관계없는 계열사의 문제’라며 선을 그었다. 시그네틱스는 생산직을 전부 소사장제로 운영하고 있기에 하청업체로 전적(轉籍)하지 않는 한 복직은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갈등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고 있다.

양측의 입장이 좁혀지지 않는 가운데 현재 9명의 해고노동자들이 해고무효소송을 제기, 1심이 진행 중이다. 길고 긴 싸움은 언제 끝날 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한 회사에서 15년간 3번 쫓겨나…끝없는 복직투쟁

지난 5일 오후 3시, 서울 강남구 논현역 인근의 영풍그룹 본사 앞에서 시그네틱스의 생산직 해고노동자들이 복직을 요구하며 ‘영풍그룹 규탄 결의대회’를 열었다. 이들은 15년간 시그네틱스의 고용불안정에 대해 투쟁하며 복직을 요구해왔다.

금속노조 시그네틱스 분회 소속 노동자들은 같은 회사에서 15년 동안 3번 해고당했다. 시작은 지난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풍그룹은 2000년 거평그룹으로부터 반도체 패키징 업체인 시그네틱스를 인수했다. 당시 IMF에 따른 자금난으로 산업은행으로부터 법정관리를 받던 시그네틱스는 2001년 서울 공장을 매각하고 안산에 공장을 새로 유치해 노동자들을 발령했다. 이때 민주노총 소속 노동자들이 고용이 보장되지 않는 안산 공장 발령을 거부하고, 파업을 단행하며 파주의 본사에서 일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사측은 이들을 징계해고했다.

이후 긴 소송 끝에 2003년 중앙노동위원회의 심판으로 93명의 해고노동자 중 28명이, 2007년 대법원의 판결로 36명이 복직할 수 있기 돼 결국 안산 공장으로 출근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윤민례 분회장 등 나머지 29명은 대법원의 판결에서 패소해 복직 대상에서 제외됐다. 공장을 안산으로 이전하는데 반대해 파업한 것이 불법이라는 점과 이 과정에서 폭력을 사용하는 등 업무를 방해했으며 안산공장으로 출근하지 않아 무단결근한 것 등이 징계해고 사유로 인정된 것이다. 또 이들 대부분이 노조 간부로 책임이 크다는 점도 패소의 이유로 작용했다.

두 번째 해고는 그로부터 4년 뒤인 2011년 이뤄졌다. 경영난을 이유로 시그네틱스는 영업양도를 하면서 노동자들에게 하청 업체인 유엔씨에 전적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 한국노총 소속 노동자들은 5년 고용보장을 조건으로 전적했으나 민주노총 소속 노동자 32명은 이를 거부했다. 하청업체들의 고용 환경은 굉장히 불안하기 때문에 이직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이들의 우려대로 유엔씨는 보장기간을 채우지 못한 채 2014년 문을 닫았다. 유엔씨로 전적한 한국노총 소속 노동자들은 퇴직금과 함께 잔여 보장기간인 16개월 치 임금을 받는 조건으로 조합을 해산했다. 한편 전적을 거부한 32명은 정리해고 됐으나 2013년 법원의 판결로 복직할 수 있었다.

그러다 지난해 9월 30일 시그네틱스는 적자 누적을 이유로 공장을 폐업했고 24명의 노동자들은 다시 일자리를 잃게 됐다. 이 중 9명은 현재 부당해고라며 파주의 본사에서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소송을 제기해 서울남부지방법원에서 1심이 진행 중이다. 함께 일했던 동료 일부는 하청업체로 전적하거나 위로금을 받고 퇴사했다.

▲ 지난 5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 영풍그룹 본사 앞에서 열린 ‘시그네틱스 문제해결을 위한 영풍 규탄 결의대회’에서 민주노총 금속노조 시그네틱스 분회 윤민례 분회장이 발언하고 있다 ⓒ투데이신문

생산 정규직 ‘0명’…“노동자 해고 쉬운 구조” 

금속노조 시그네틱스 분회 이희수 법조부장은 “반도체 회사는 투자를 많이 해야 이익을 낼 수 있는데 시그네틱스는 투자도 얼마 하지 않았다. 영풍 계열사가 많다보니 거기서 일감을 가져와 일을 시키더라.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만들 제품이 없다고 하면서 휴업일수가 늘어났다. 이후 2016년 폐업을 했다”며 “이게 다 정리해고를 위한 수순이었던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윤 분회장은 “한번은 영풍그룹 관계자를 만났는데 ‘필요한 게 무엇이냐’고 물었다”면서 “영풍이 ‘위로금 얼마 주면 되겠느냐’는 말만 되풀이 하는데 우리는 금전적 배상이 아닌 안정된 고용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이 회사에서 해고되면서 시그네틱스의 생산 정규직은 0명이 됐다. 시그네틱스는 현재 윈텍, 에스에이티이엔지, 에스티아이, 엔씨테크 등 4개의 하청업체를 통해 생산직을 운영하고 있다.

윤 분회장은 “영풍 그룹은 생산직 노동자를 직접고용하지 않고 소사장제로 전원 하청을 주고 있다”며 “일거리가 없으면 해고되기 쉬운 구조”라고 지적했다.

이어 “시그네틱스의 고용 형태는 비정규직 축소라는 정부 정책에 역행하는 것”이라며 "회사가 적자라며 해고한 것은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하고, 우리가 민주노총 조합원이라는 점과 생산 정규직을 두지 않으려는 회사 방침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 영풍그룹 본사 입구 ⓒ투데이신문

영풍 “그룹과 관계 없는 일”
시그네틱스 “해고 회피 노력”

해고노동자들의 주장에 대해 영풍그룹 관계자는 “(해고노동자 문제는) 영풍그룹과는 관계없는 시그네틱스의 일”이라며 “설명드릴 부분은 없다”고 말했다.

시그네틱스 안산사업부 담당자는 “민주노총에서 3번 해고당했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면서 “첫 번째 해고의 경우 노동자들이 출근을 거부해 법원에서 징계해고가 정당하다는 판결이 났다. 그렇지 않은 분들은 다 복직해 안산 공장에서 일했다. 두 번째는 안산 공장이 영업 양도될 당시 정리해고 된 것이고, 이번에는 해고가 아닌 폐업을 하게 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회사에서는 노동자들을 끊임없이 설득하고 해고를 피하기 위해 노력했다”면서 “전적을 하더라도 시그네틱스에서 일하던 급여와 조건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재벌 서열 30위권의 영풍그룹. 정부와 노동계가 비정규직 축소를 외치고 있지만 변화의 모습은 보기 어렵다. 앞으로 사측과 해고노동자들의 긴 싸움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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