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석재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이석재 칼럼니스트】 얼마 전 서로 다른 두 사람으로부터 하루 차이로 같은 질문을 듣게 된 일이 있었다. 이 선생님은 본인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질문 앞에서 나는 똑같이 망설였다. 글쎄요. 나는 어떤 사람인가,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우물쭈물하고 있는 나를 보며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역시나 같은 질문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이 선생님께서는 완벽주의 성향을 갖고 계신 듯합니다, 다른 이들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노력하시는 분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렇지 못해 늘 자책감에 시달리시지는 않나요. 타인들의 시선에 반드시 얽매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신경을 많이 쓰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나는 조심스레 답을 했다.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대답하면서도 자꾸 다른 가지로 생각이 타고 넘어갔다. 사람들은 누구나 어느 정도는 완벽주의 성향을 지향하지 않는가, 누구나 어느 정도는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려 하지 않는가, 누구나 어느 정도는 타인들의 시선에 신경을 쓰면서도, 동시에 어느 정도는 무시하며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며 살아가지 않는가. 왠지 한동안 유행했던 혈액형을 통한 성격 분석 같았다.

몇 년 전 다음과 같은 목록을 정리해본 적이 있었다. 예전에는 용납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것들, 마찬가지로 예전에는 쉽게 넘어갔지만 이제는 단호하게 선을 긋는 것들. 이런 목록을 만들어보자 생각했던 이유는 내가 인격적으로 얼마나 성숙해졌는가를 확인해보고 싶어서였다. 아마도 내 자신에게는 가혹해지고 타인에게는 관대해졌겠지, 윤리적 가치판단의 잣대 역시 일관적으로 정립되었겠지 등의 생각을 하며 목록을 작성해나갔다.

그렇지만 결과물은 예상과는 달랐다. 거기에는 규칙이 없었다. 윤리의 선과 감정의 흐름이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었다. 그저 한 명의 변덕스러운 인간이 그 목록에 오롯이 드러나 있었고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평온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날 이후 내가 어떤 사람이라 말하는 것이 두려워졌다.

자기규정에 대한 확신이 강한 사람일수록, 예를 들면 나는 상식적인 사람이다, 나는 뒤끝이 없다, 나는 매사 객관적으로 접근한다, 나는 다른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듣는다, 나는 젊은 사람들과도 공감을 잘 하는 편이다, 와 같은 말을 입버릇처럼 내뱉는 사람일수록 실상은 그에 반대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자기 선언에 도취된 나머지 스스로를 돌아보는 긴장감이 평범한 사람들보다 오히려 떨어지거나, 때로는 과도한 자기규정을 논리구조의 출발점으로 삼아 상대를 당황케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언젠가부터 그런 태도들을 반면교사 삼아 조심하게 되었던 것도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에 답변을 주저하게 된 주요한 요인이었다. 물론 자신에 대한 규정이 확고하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규정을 자기단속의 근거로 삼아 노력하는 분들이 있다. 그렇지만 그런 분들 역시도 본인의 입으로 내뱉는 ‘어떤 사람’보다는 실제로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에 따라 평가를 받게 된다.

결국 내 자신에 대한 주관적인 평가보다는 당장에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내가 어떤 행위를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그렇기에 서로에게 생산적인 대화가 되기 위해서는 이런 질문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이 선생님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신가요. 그랬다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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