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석재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이석재 칼럼니스트】 집안 사정 때문에 1,2년에 한 번씩은 전학을 다녀야 했던 국민학생 시절이었다. 나는 아직도 어린 시절을 떠올릴 때면 초등학교보다는 국민학교라는 표현이 더 내 것처럼 느껴진다. 전학을 가서 새로운 교실과 아이들 틈에 갑작스레 떨어지게 되면 아무래도 동물적인 본능이 먼저 움직이게 된다. 위험한 아이들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 각각의 무리들과 당장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소외되어 있는 아이의 구도가 한 눈에 들어왔다. A가 유독 내 눈에 들어왔던 것은 아마도 그런 전학 초기의 심리상태 때문이었던 것 같다.
 
A가 내 눈에 띄었던 이유는 우선 그가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이유만이 내 시선을 끄는 전부는 아니었다. 뭐랄까. 아이들은 A의 접촉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동시에 두려워했다. 그리고 A는 따돌림을 받는 아이 치고는 허우대와 몸가짐이 아주 단정했다. 이방인이었던 내 눈에는 아이들의 따돌림에서 인과관계를 찾을 수가 없었고 그에 반해 자신의 생활을 잘 챙겨가고 있는 A의 태도는 어른스러워 보였다.
 
 요즘 아이들의 세계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한 반에 학생들이 워낙 많아서였는지 아니면 교실과 운동장과 동네골목 등으로 분산된 활동 공간 덕분이었는지, 친우관계의 이합집산이 굉장히 유동적이었고 순환 속도도 빨랐다. 서로에 대한 감정 역시도 쉽게 증폭되고 쉽게 누그러졌다. 그래서 시간이 좀 지나고 나면 특정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던 A에게도 재기의 기회가 주어졌고, 이방인이었던 나 역시도 빠르게 교실과 동네로 스며들 수 있었다. A와도 급속도로 친해졌다.
 
A는 내가 받았던 첫 인상과는 달리 다른 아이들과 무척이나 어울리고 싶어 했다. 그래서 소강기를 거치고 나면 자신에 대한 감정이 누그러진 무리로 재진입을 시도하곤 했다. 물론 그럴 때마다 반드시 그들 중에 누군가가 반대를 하곤 했지만, “쟤도 이제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인간의 변화에 대한 신뢰와 “그래도 우리에게 다시 다가오는 친구를 멀리 해선 안 된”다는 명분론이 A의 편입을 가능케 했다.
 
게다가 친구들을 필요로 하는 시기의 A는 그렇게 불쌍해 보일 수가 없었다. 말끔한 인물과 단정한 태도를 지닌 아이가 지난한 후회와 외로움을 토로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면 동정심이 절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안쓰러운 마음은 꼭 나만의 것은 아니었다. 사람은 자신이 직접 당해보기 전까지는 악인에 대한 평가가 허술할 때가 많은 법인데 아직 세상의 미묘한 결을 읽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A의 약한 모습은 마음을 허물기에 충분해 보였다.
 
그렇지만 A가 새로운 집단에 들어갔을 때 관찰되었던, 혹은 나와 같은 무리가 되었을 때 마주했던 녀석의 모습은 상상 이상이었다. 가만히 있는 아이들을 괴롭히고, 싸움을 걸고, 이간질을 하고, 누가 그런 것에 대해 한 마디라도 던지면 무리가 박살이 날 때까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짓을 다 했다. 그 에너지가 경이로울 정도였다. 결과적으로는 아이들이 A를 따돌린 것이 아니라 무리 하나가 초토화된 다음에 A를 제외한 나머지 몇몇이 다시 새롭게 모이는 식으로 인간관계가 재구성되곤 했다.
 
내가 A와 멀어지게 되었던 것은 그 때문은 아니었다. 지금과는 다르게 오지랖 성향이 강했던 어린 나에게 A의 상황은 안타깝게만 느껴졌다. 녀석의 고립이 절정에 달할수록 좀 더 동료가 되어주고 싶었다. 거기에는 아마도 내가 아니면 누가 A를 챙겨주랴, 하는 오만함과 남들은 모르는 속 깊은 관계를 맺는다는 식의 은밀한 쾌감이 있었을지 모른다. A는 고립이 될수록 상태가 좋아지는 편이었기 때문에 그럴 때의 교제는 어렵지 않았다.
 
그랬던 관계가 어느 날 허무하게 종말을 고했다. 그날 나는 A에게 아주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애들이 너를 미워한다고만 원망하지 말고 일단 너도 좀 태도를 바꿔보는 것은 어떨까. 너도 아이들과 어울리고 싶어 하잖아. 그럼 맞춰주는 게 있어야지. 정확한 문장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략 이런 뜻의 대답이 돌아왔다.
 
사랑 받고는 싶지만 사랑 받기 위해 노력하고 싶지는 않아.
 
국민학생이었던 나로서는 심오하기 그지없는 대답이었다. 그 이후에도 아주 오랫동안 나는 A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후 여러 명의 A를 만나게 되면서 이제는 좀 알 것 같다. 후배 세대로부터 존경은 받고 싶지만 후배들을 이해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든가, 상대방으로부터 관심은 받고 싶지만 그렇다고 배려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든가, 대장 노릇은 하고 싶지만 그에 걸맞은 노력은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우리가 쉽게 마주하게 되는 A들. 노력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받고자 하는, 분명 나에게도 가득 차 있는 당연한 욕망이 물질만이 아니라 감정적인 영역에도 있음을 예전에는 알지 못했다.
 
A는 그러한 욕망을 아이답지 않게, 혹은 지극히 아이답게 표현했고, 나에게 가이드라인을 그어주었다. 네게 주고 싶은 것은 없지만 그런 불공정 거래라도 좋다면 관계를 이어가자는. 나는 그날 이후 어린이답지 않게 A와의 관계를 쉽게 정리했다. 그리고 글을 쓰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나는 그에 대해 별 다른 씁쓸함이나 아쉬움 같은 것이 남아 있지 않다.
 
나는 한동안 그것을 사람의 됨됨이 문제로만 생각했다. 아쉬움을 갖고 내게 다가오던 A를 감정의 동요 없이 멀리했던 것도 그래서였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다시금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나는 윤리관이 아닌 거래관의 차이를 확인하고 자리를 떴던 것 같다. 소위 계산이 섰던 것이고, 그래서 상처 같은 것이 없었다. 사람의 감정에 거래의 잣대를 들이대면 안 된다고 생각해왔지만 사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나도 모르게 그래왔던 것은 아닐까 싶다.
 
며칠 전 열대야로 인해 잠을 이루지 못하던 밤, 문득 나를 스쳐지나갔던 그리고 내가 스쳐 보냈던 사람들의 얼굴들을 하나씩 천장 위에 그려보았다. 생각보다 많은 A들이 하나씩 그려졌다 지워졌고, 한편으로는 나 역시도 이 사람의 A였겠구나 싶은 얼굴들이 부끄럽게 떠올랐다.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