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남도청 앞 광장에 모인 광주 시민들(좌),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든 아이(우측 상단), 금남로로 향하는 전남대 교수 및 학생들(우측 하단) <사진 제공 = 5·18기념재단 홈페이지>

비상계엄확대조치가 발단이 된 ‘5·18광주민주화운동’
등교 막는 계엄군에 항의하는 학생들 구타·연행해

거리의 시민들 마구잡이로 과잉 무력진압해
이를 계기로 학생운동서 시민운동으로 확대

광주, 항쟁의 피로 붉게 물들어…부상자·사망자 속출
정부의 언론 통제로 ‘폭동’으로 왜곡돼 알려지기도

37년이 흐른 지금, 여전히 진실은 밝혀지지 않아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 반드시 이뤄져야

【투데이신문 전소영 기자】 지금으로부터 37년 전, 당시 전라남도 광주는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했다. 계엄군의 총과 칼을 맞고 쓰러진 시민들로 피바다가 된 1980년 5월 광주는 끔찍하고, 참혹하고, 처참했다.

1979년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살해한 이른바 ‘10·26 사건’ 이후 대한민국의 민주화는 후퇴기를 맞았다. 그리고 그해 12월 12일 군부의 실세였던 전두환과 노태우는 이를 기회 삼아 신군부를 구성해 군사적 충돌을 일으켰다. 국가권력을 장악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대학생들은 계엄해제와 유신잔당의 퇴진을 촉구하며 신군부를 상대로 전국적인 정치투쟁을 벌였다. 1980년 5월 10일 23개의 대학교 대표들로 구성된 전국총학생회회장단은 거리시위를 계획했고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전두환은 이를 감지하고 비상경계태세에 돌입했다. 5월 13일부터 민주화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거리로 나서기 시작했다. 

17일 신군부는 전국적으로 계엄령을 확대 시행했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 주둔한 계엄군은 학생들의 등교를 막아섰다. 학생들의 거센 항의에도 철수는커녕 진압봉으로 학생들을 구타해 연행했다. 이것이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시작이었다.

19일 새벽이 밝자 더 많은 계엄군들이 광주역으로 모여들었다. 그럴수록 시민들의 항의는 더욱 극심해졌고 계엄군과 시민들 사이에서 충돌이 벌어졌다. 장갑차와 헬기까지 동원한 계엄군은 시민들을 향한 발포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시민들도 스스로를 ‘시민군’이라 칭하며 계엄군의 진압에 맞서 싸웠다. 

그리고 21일 오후 5시 30분 계엄군은 전남도청을 떠났다. 그렇게 싸움이 끝나는듯 했으나 26일 계엄군은 탱크를 앞세워 또다시 전남도청으로 향했다. 다음날 새벽 아비규환 속에 광주는 항쟁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40여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광주 시민들에게 그날의 아픔은 여전히 생생하기만 하다. 지난 23일 <투데이신문>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짚어보기 위해 광주로 향했다. 이날 취재에는 택시운전사 조성수(66)씨가 함께했다. 조씨는 5·18광주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시민이자 계엄군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된 시민들을 병원에 실어 나른 장본인이기도 하다.

▲ 5·18 자유공원 입구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상무대 법정·영창을 재현하다…‘5·18 자유공원’

조씨와 함께 가장 먼저 향한 곳은 ‘5·18 자유공원’. 5·18 자유공원은 계엄군에 체포된 시민들을 모아 놓고 정신 교육을 시켰던 상무대 법정과 영창을 복원해놓은 장소다. 임시 취조실, 계엄사합동수사본부 특별수사반이 임시본부 등 당시 모습 그대로 옮겨져있다. 조씨에 따르면 이곳에서 정신교육을 받은 후에야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5·18 자유공원 광장에 들어서면 당시 계엄군과 시민들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모습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다. 군용트럭 위에 진압봉을 든 군인이 서있고 그 앞에 시민 한 명이 고개를 숙인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 옆에는 포승줄에 손과 허리를 묶인 채 줄지어 끌려가는 시민들의 모습도 보였다. 조씨는 “계엄군에 끌려갈 때는 주변을 볼 수 없게 항상 고개를 숙이게 했어요. 옷 입고 끌려가면 양반이에요. 속옷 바람으로 끌려가기도 해요”라고 설명했다.

▲ 5·18 당시 계엄군과 시민들의 모습을 재현한 조형물(좌측 상하), 상무대 헌병대 영창(우측 상하)ⓒ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시민들이 구금돼 생활했던 영창은 6개의 방이 부채꼴 모양으로 연결돼 있고 가운데에서 계엄군이 투옥된 사람들을 한눈에 감시할 수 있는 구조로 돼있었다. 영창에 갇힌 시민들은 16시간 동안 바른 자세로 앉아 있어야 했다고 한다. 조금의 움직임이라도 포착되면 노소를 불문하고 흠씬 두들겨 맞았다고 한다. 한 방에 많게는 150명 가까이 수감돼 편히 누워 자는 것은 꿈도 못 꿨다. 제대로 잠을 자기는커녕 찜통더위에 피부병에 걸려 살이 벗겨지는 고통까지 느꼈다고 한다. 밥도 1인당 세 숟가락 밖에 주지 않아 늘 배고픔에 굶주려야 했다고. 조씨 역시 당시 계엄군에 잡혀 31사단 헌병대를 거쳐 이곳까지 끌려왔다. 그는 물론 이곳에서의 생활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상무대 영창은 언젠가는 살아서 돌아갈 수 있는 불행 중 희망이 있는 장소라고 설명했다. 그는 “그때 먹은 보리밥과 된장을 풀어 끓인 배춧국이 얼마나 맛있던지 잊을 수 없어요”라며 쓴웃음을 지어 보이며 다음 장소로 기자를 안내했다.

▲ 시민들에게 택시와 힌츠페터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조성수씨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광주의 영웅 ‘위르겐 힌츠페터’를 기억하다

5·18 자유공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광주 시청이 있다. 광주시청에서는 지난 21일부터 다음 달 3일까지 시민청 건물 1층에서 故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를 기념하는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최근 1000만 관객을 돌파한 화제의 명작 영화 ‘택시운전사’를 통해 재조명 받고 있는 힌츠페터는 1963년 독일 제1공영방송 함부르크 지국의 방송 카메라맨으로 입사했다. 1973년부터 1989년까지 일본 특파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5월 광주로 들어와 계엄군에 의한 참사 현장을 카메라에 담아 독일 본사로 보내 광주의 비극을 전 세계에 알린 일등공신이다. 정부의 언론탄압이 심했던 당시 죽음의 공포를 무릅쓰고 오롯이 ‘진실을 반드시 전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광주로 향했다. 

▲ 시민청에 전시된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실제 현장 사진들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전시장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영화 속 초록색 택시였다. 너 나 할 것 없이 택시 앞에 몰려든 시민들에게 조씨는 택시와 힌츠페터에 대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몇 걸음 옮기면 영화 촬영 현장 사진이, 그 옆으로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실제 현장 사진들이 전시돼있었다. 당시를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기자로서는 그날의 참혹함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 (왼쪽부터) 힌츠페터가 실제 사용했던 카메라, 힌츠페터가 썼던 안경, 힌츠페터 사진 및 여권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한편에는 힌츠페터의 유품 일부가 전시돼있었다. 여권, 안경 등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그의 손때 묻은 카메라가 가장 눈길을 끌었다. 힌츠페터가 렌즈를 통해 바라본 광주의 모습은 어땠을까. 참혹한 현실 앞에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문득 ‘광주에 가게 된 특별한 사연이 있냐’는 질문에 “광주, 당연히 가야지. 그게 기자가 하는 일이다”라는 그의 대답이 떠올랐고 기자 스스로에게 ‘나라면 어땠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발걸음을 돌렸다.

▲ 국립5·18민주묘지 전경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민주의 성지’ 망월동묘지·국립5·18민주묘지

시청을 떠나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5·18 망월동 구 묘역(이하 망월동묘지)이었다. 망월동묘지는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희생된 시신들이 최초로 묻힌 장소다. 전남도청에서 최후의 항쟁을 벌였던 1980년 5월 27일, 치열했던 싸움이었던 만큼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해 청소차에 싣고 와서 묻었다고 한다. 망월동묘지가 ‘민주의 성지’로서 주목을 받자 그 상황이 불편한 군사반란 집단은 묘지를 없애려 하기도 했다. 죽어서까지 수모를 겪어야 했던 희생자들은 1997년 5월 신 묘역으로 이장돼서야 비로소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게 됐다.

▲ 망월동묘역에 마련된 힌츠페터 추모비(상), 망월동묘역에 묻힌 ‘전두환 대통령 각하 내외분 민박 마을’ 비석(하)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망월동묘지에는 ‘전두환 대통령 각하 내외분 민박 마을’이라고 적힌 비석이 땅에 박혀 있다. 1982년 3월 10일 전두환 전 대통령이 담양을 방문했을 때 묵었던 민박집에 세워졌던 비석인데 광주전남민주동우회가 ‘전두환이라는 이름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그날의 참상을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1989년 1월13일 이 비석을 5·18영령들이 묻힌 망월동묘지로 옮겨왔다. 망월동묘지에서는 5월 영령의 원혼을 달래는 마음으로 이 비석을 짓밟아야 한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숱하게 밟고 지나갔는지 여기저기 깨지고 닳아 있었다. 기자도 비석을 힘껏 밟고 지나갔다.

조금 위쪽에는 힌츠페터의 추모비가 자리해있었다. 한국사랑이 남달랐던 힌츠페터는 살아생전 죽어서 광주 망월동에 묻히길 원했다고 한다. “내가 죽거든 광주에 묻어달라”는 그의 염원에 따라 지난 2016년 5월 15일 그의 손톱과 머리카락 등 유품 일부가 이곳 망월동 옛 묘역에 안치되게 됐다. 

시민들이 고마움을 담아 전한 꽃다발로 가득한 힌츠페터의 추모비 아래 숱하게 짓밟혀 닳아 없어져 가는 전두환 비석이 더욱더 초라해 보였다.

▲ 국립5·18민주묘지 입구 ‘민주의 문’ (좌측 상단), 추모탑 (좌측 하단), 대동세군상(우측 상단), 무장항쟁군상(우측 하단)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망월동묘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신 묘역인 ‘국립5·18민주묘지’가 있다. 5·18광주민주화운동 영령의 대다수가 망월동묘역을 떠나 이곳으로 옮겨져 현재는 약 773기의 5·18 영령들이 안치돼 있다고 한다.

민주묘지 입구의 ‘민주의 문’을 지나 들어서면 가장 먼저 추모탑을 볼 수 있다. 40m 높이를 자랑하는 석조탑 중앙의 조형물 난형환조는 구천을 떠도는 5·18민주화운동 희생자의 영령이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는 소망을 담고 있다.

추모탑 옆에는 무장항쟁군상과 대동세군상이 지키고 있었다. 무장항쟁군상은 불의에 저항해 총을 들고 항쟁에 나섰던 시민군을 형상화 한 것이며 대동세상군상은 슬픔을 딛고 승리를 노래하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현재 1묘역과 2묘역 5번(29번제외)까지는 80년 당시 사망자들이, 나머지 묘역은 80년 당시 부상 및 구속 구금되신 이후 사망자들이 안장됐다. 10묘역은 행방불명자 묘역으로 사망한 사실은 확인되나 시신을 찾지 못해 영령만 모셔진 가슴 아픈 장소다.

기자는 약 9년 전 고등학교 1학년 수학여행 때 민주묘지를 찾은 적이 있다. 부끄럽게도 당시 기자는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아는 것은 교과서 수준에 불과했고, 그 이상의 관심을 가지려 하지도 않았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상대적으로 많은 것을 보고 배운 지금에 민주묘지에서 느끼는 감정은 사뭇 달랐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우리 국민들이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 전남대학교 정문(좌측 상단), 무등경기장 정문에 마련된 사적비(좌측 중간), 옛 광주적십자병원(좌측 하단), 광주MBC 옛터(중), 전일빌딩(우)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도심 곳곳서 숨 쉬는 그날의 흔적들

차를 타고 광주 거리를 달리다 보면 도심 곳곳에서도 5·18광주민주화운동의 흔적을 쉽게 볼 수 있다. 광주 동구 궁동 18-1번지는 과거 광주MBC가 있던 자리다.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하에서 군부의 검열을 받던 언론은 항쟁 열기는 물론 계엄군의 과잉진압 행위마저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민들이 진실 보도를 요구하며 거세게 항의하는 과정에서 20일 밤 광주MBC에 불길이 타올랐다. 진실보도의 책임이 있는 언론의 왜곡에 대한 시민들의 항의와 응징의 표현인 것이다.

광주MBC의 옛터에서 조금만 더 지나면 광주적십자병원(현 서남대병원)을 볼 수 있다. 적십자 병원에는 5·18광주민중항쟁 당시에 실제로 사망자들이 안치돼 있던 곳이기도 하다. 당시 긴박했던 상황에서도 의료진은 부상자들의 생명을 돌보고 살리기 위해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활동을 펼쳤다. 당시에는 병원 인근이 모두 유흥업소였는데 혈액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시민뿐만 아니라 인근 유흥업소 종업원들까지 헌혈에 참여하는 등 뜨거운 시민정신을 발휘했다고 한다.

전남대학교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최초 발원지다. 17일 밤 전남대에 진주한 계엄군은 도서관 등에서 공부하고 있던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불법구금했다. 계엄군은 5월 18일 아침 학교에 등교하거나 5·17비상계엄확대 조치에 항의하기 위해 정문 앞에 모인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강제 해산시켰다. 이에 학생들이 항의하면서 항쟁의 불씨가 됐다.

무등경기장 정문은 1980년 5월 20일 계엄군의 만행에 격분한 운전기사들이 모여 차량시위를 시작한 곳으로 운전기사들은 대형버스를 앞세워 경적을 울리고 전조등을 비추며 전남도청으로 향했다. 시내버스와 택시 등 200여대의 차량이 참가한 이 시위는 기약없는 항쟁에 지쳐가는 시민들에게 강한 연대 의식과 항쟁에 대한 자신감을 불어 넣는 계기가 됐다. 당시 현장에 있던 조씨 역시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그의 눈빛에서 장엄했던 그날의 현장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5·18민주광장 가운데 서서 금남로 방향을 바라보면 ‘호남 언론의 1번지’로 알려진 전일빌딩(옛 광주일보 사옥)이 보였다. 5·18민주화운동 등 현대사 현장을 지켜온 대표적 공간으로 평가되는 전일빌딩은 전남도청과 더불어 시민군이 마지막까지 항쟁했던 건물이기도 하다. 

▲ 1층 ‘항쟁’ 전시관에 전시된 5·18광주민주화운동 현장 사진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그날을 기억할 소중한 기록들…‘5·18민주화운동기록관’

5·18광주민주화운동기록관에는 37년 전 5월의 광주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옛 가톨릭센터에 설립된 기록관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의 발발과 진압 그리고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과정에서 정부, 군대, 국회, 시민단체, 미국 정부 등에서 생산된 방대한 자료들을 한 곳에 모아뒀다. 기자가 방문했을 때는 1층부터 3층, 6층을 관람할 수 있었다.

1층에는 5·18광주민주화운동 과정을 시간대에 따라 구성해 역사의 사실성에 중점을 두고 재현했다.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에 격렬해진 광주시민들의 모습, 계엄군의 언론검열에 의해 침묵하는 언론을 대신해 시민 스스로 탄생시켰던 시민언론인 투사회보, 부상당한 시민군들의 치료를 위해 자발적으로 헌혈을 했던 광주시민들의 모습, 당시 급박했던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 2층 ‘기록’ 전시관에 마련된 5·18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된 각종 기록물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2층에는 동학 농민 혁명을 시작으로 광주학생독립운동, 제주4·3항쟁, 4·19혁명, 부마 민중항쟁, 5·18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으로 이어지는 민중항쟁의 역사와 5·18민주화운동의 진실을 향한 현재까지의 여정을 소개한다. 5·18광주민주항쟁 당시의 시민과 단체기록, 신문, 연구기록물, 공공기관 기록, 보상기록, 해외기록, 문화 예술 기록 등 직접적인 자료들도 전시돼 있다.

▲ 3층 ‘유산’ 전시관 벽면(좌), 관람객들이 남긴 후기(우)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3층에는 과거와 현재 금남로의 모습을 비교해 볼 수 있는 공간과 5·18광주민주화운동 주요 사건을 사진기록과 기록물을 3D 영상으로 관람할 수 있다. 또 광주민주화운동기록관 관람 후기를 포스트잇에 적거나 직접 육성으로 남길 수도 있다.

광주 곳곳을 누비며 역사 현장을 직접 방문해보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 광주민주화운동기록관만 꼼꼼히 관람해도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짚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듯하다.

▲ 옛 전남도청 건물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5·18광주민주화운동 최후의 항쟁지 ‘옛 전남도청’

민주광장을 가득 메운 ‘임을 위한 행진곡’이 최후의 항쟁지인 옛 전남도청임을 알렸다. 옛 전남도청은 5·18광주민주화운동 최후의 항쟁지이다. 27일 새벽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들이 시내로 쳐들어왔고 시민들은 전남도청을 지키기 위해 그들과 목숨을 건 싸움을 벌였다.

안타깝게도 옛 전남도청은 당시의 기억과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아시아를 넘어 세계인과 함께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공유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설된 아시아 문화의 전당 때문이다. 하지만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알리기는 커녕 되레 전남도청의 원형이 훼손돼 미래세대가 이를 기억할 수조차 없게 됐다. 때문에 이곳 1층에서는 당시 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 아들을 잃은 어머니와 부상자 가족들이 전남도청 복원을 위해 지난해 9월 7일부터 1년여 가까이 이곳에서 투쟁을 벌이고 있다. 서울에서 온 기자의 방문에 어머님들은 웃음으로 반겼다.

▲ 옛 전남도청 복원을 촉구하며 1년째 투쟁 중인 유가족 및 부상자 가족들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광주민주화 운동의 공식적 첫 희생자로 기록된 김경철씨의 어머니는 울분을 토로했다. 김경철씨는 시위 참여자가 아니었다. 귀가 들리지 않는 농인이었던 그는 장애인증을 보여주며 살려달라고 빌었지만 계엄군들은 처참하게 그를 죽였다. ‘뒤통수가 깨지고 눈이 터져 나오고 팔과 어깨 엉덩이와 허벅지가 으깨져’라고 기록된 시체검안서도 그가 얼마나 처참하게 죽어갔는지를 말해줬다.

“계엄군에게 맞아 죽은 자식을 생각하면 속에서 천불이 나요. 억울하고 분해서. 현재 대한민국의 5·18 역사는 죽었어요. 왜곡돼 살아있는 게 아니에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요. 피로 물든 이 자리를 복원해 남은 가족들의 한을 풀어줬으면 좋겠어요. 대한민국으로, 세계로 5·18 역사를 알릴 수 있길 바라면서요.” 

김씨의 어머니는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이제는 머리가 하얗게 새고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가 됐지만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자식의 모습은 여전히 어제처럼 생생하기만 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 518 기념사에서 옛 전남도청 복원 문제를 언급하며 “광주시와 협의하고 협력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꼭 그 약속을 이행해 어머니들이 자식을 가슴에 묻고 여생은 조금이나마 자식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덜고 살아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 국립아시아문화전당과 옛 전남도청(상), 옛 전남도청 앞에 전시된 5·18광주민주화운동 현장 사진(하)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광주의 시간은 1980년 5월에 멈춰있다. 아무것도 생각 않고 바라본 광주는 그저 평범한 도시에 불과하다. 평화로움 그 자체였지만 그 안에는 치열하고 참혹했던 광주의 뼈아픈 과거가 감춰져있었다. 기자가 광주에서 디디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치열한 역사현장이었다.

벌써 3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이날 기자가 조씨를 포함해 광주에서 만난 모든 시민들이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왜곡과 망각이었다. 마치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왜 나만 갖고 그래”라던 가해자는 이제는 자신 역시 5·18광주민주화운동 피해자라는 망언을 서슴지 않고 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그날의 진실은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았다. 마치 없었던 일로 만드려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는 동안 국민들의 기억 속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은 흐릿해져 간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가까이에 그날의 아픔이 살아 숨 쉬고 있고, 광주가 존재하는 한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영원히 현재진행형일 것이다.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