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산증인 조성수씨·장훈명씨·정성국씨

▲ (왼쪽부터) 조성수씨, 정성국씨, 장훈명씨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5·18광주민주화운동’, 전쟁이 따로 없어
계엄군의 만행, 폭력이 아닌 살육 수준

택시운전사, 부상자들 병원에 실어 날라
꺼져가는 5·18 불씨 ‘차량시위’로 되살려

악몽서 못 벗어나고 트라우마에 시달려
5·18에 관심 갖고 공감대 형성해줬으면 

【투데이신문 전소영 기자】 최근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관심이 뜨겁다. 단연컨대 영화 <택시운전사> 때문이 아닐까 싶다.

국가권력을 장악하려는 신군부에 맞선 대학생들의 학생운동으로 시작해 무고한 시민들까지 학살한 계엄군의 만행으로 시민운동으로까지 확장된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한 <택시운전사>는 택시운전사 만섭(송강호 분)이 독일기자 피터(토마스 크레취만 분)를 태우고 광주로 떠나 그를 도와 5·18광주민주화운동 참상을 세상에 알리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피터 역은 실제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전 세계에 알린 위르겐 힌츠페터를 모델로 한 인물이다)

1000만 관객을 돌파할 만큼 영화가 주목을 받으며 광주의 택시기사들 또한 재조명을 받고 있다. 당시 택시운전사들은 계엄군의 총과 칼에 맞아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시민들을 구출해 병원으로 실어 날랐다. 뿐만 아니라 광주 시민으로서 계엄군을 광주에서 몰아내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차량을 앞세워 당시 정부의 주 본부였던 전남도청으로 쳐들어가는 등 5·18광주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맹활약을 펼쳤다.

<투데이신문>은 지난달 23일 실제 5·18광주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조성수(66)·장훈명(65)·정성국(62)씨를 만나 당시의 참상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실제 택시운전사로 활약했던 조씨와 장씨를 통해 당시 택시운전사들의 역할에 대해 생생한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 조성수씨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1980년 5월, 당시 신군부에 저항해 정치투쟁을 벌였던 것은 광주만이 아니었다. 서울·부산·대구·광주 등 37개의 대학에서 계엄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일었다. 그런데 왜 하필 광주가 타깃이었을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광주가 ‘민주’라는 단어가 제일 와닿는 지역이잖아요. 광주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전두환을 싫어했고 가장 많이 군부가 다시 권력을 잡는 것을 반대했었으니까. 그래서 광주가 타깃이 된 게 아닐까 싶어요. 광주만 해결하면 모든 게 해결될 것이라 생각한 거죠.” <조>

그날의 산증인인 세 사람의 기억 속에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어떤 모습일까.

조씨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손님을 태우고 광주 시내 곳곳을 누비고 있었다.

“나는 일을 하고 있었어요. 손님을 목적지에 내려주는데 건너편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나는 거예요. 20~30m가 채 안되는 거리였는데 자세히 보니까 계엄군이 그 아주머니를 개머리판으로 내려치는 거예요. 그리고는 군용트럭에서 고등학교 2학년 정도 돼 보이는 여학생을 끄집어 내리더라고요. 안 나오려고 하니까 착검된 총으로 찔러버렸어. 그걸로 찌르니 울부짖을 수밖에. 보니까 그 트럭에 이미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엄청 많았어요.” <조>

정씨는 자신의 옆에서 죽어가던 한 학생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계엄군이 첫 발포를 하던 날 수백발을 쏘니까 앞에 있던 시민들이 다 쓰러지더라고요. 근데 내 옆에 있던 교련복 입은 학생이 총을 맞고 쓰러지는 거예요. 그냥 두고 못 가겠더라고. 그 학생을 끌고 골목으로 들어갔어요. 그러다 나도 총을 맞았지. 학생을 이끌고 겨우 병원으로 갔는데 내가 의사는 아니지만 그 학생이 죽었다는 건 직감했어요. 아니나 다를까 이미 죽었다고 하더라고요. 그 학생 이름을 확인 못한 게 안타까워요. 이름이라도 알았으면 그 학생 부모 찾아서 아들 시신은 찾았는지라도 확인할 텐데...” <정>

▲ 정성국씨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계엄군의 폭력 수준은 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이었다고 한다. 세 사람은 폭력이 아닌 살육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계엄군의 폭력 수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그때 사람들 사이에서는 ‘계엄군은 경상도 사람만 착출해 파견했다’, ‘광주에 파견된 군인은 며칠 굶기고 약을 먹였다’, ‘술만 먹여서 사람이 사람으로 안 보이고 개나 짐승으로 보이는 것이다’ 등의 유언비어가 돌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무자비하게 사람들의 몸을 찌를 수 있었다고 봐요. 정상적인 사람이 산 사람을 그렇게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살육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처참했어요.” <조>

“그때 사용했던 곤봉은 박달나무로 만든 특수 곤봉이었어요. 그걸로 처음부터 머리를 내려치는 거예요. 그건 무슨 의미냐, 죽어도 좋다는 거죠.” <장>

“폭력 수준이 아니었죠. 전쟁이 따로 없었어요 당시는. 전투기가 500kg의 폭탄을 싣고 대기하고 있었다는데. 시민을 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정>

▲ 무등경기장을 출발한 200여대의 차량시위 현장 사진 <사진 제공 = 5·18기념재단 홈페이지>

당시에 택시운전사로 근무했던 조씨와 김씨 때문에 인터뷰는 자연스럽게 당시 택시운전사들의 이야기로 흘러갔다. 조씨는 당시 택시 운전사의 주된 역할은 부상자들을 병원에 실어 나르는 것이었다고 했다.

“영화 <택시운전사>에서는 택시운전사가 외신기자를 데리고 다니며 광주의 참상을 담는 역할이 부각됐지만 당시 실제 택시운전사들은 계엄군에 쫓기는 시민군이나 구타당한 시민들을 병원으로 옮기고 위험한 장소에서 구출해내는 일을 많이 했어요.” <조>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겠지만 당시 택시운전사들은 커져가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의 불씨를 지피는데 큰 공을 세웠다. 1980년 5월 20일, 광주의 참상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던 택시운전사들은 무등경기장 앞에 모여 차량시위를 시작했다. 택시 200여대를 비롯해 대형 시내버스 등은 전조등을 비추며 전남도청으로 향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의 불씨가 꺼져갈 때쯤 시민들에게 강한 연대 의식과 항쟁에 대한 자신감을 불어 넣었다. 장씨는 당시 택시운전사로서 자신이 목격했던 당시 상황에 대해 자세하게 풀어놨다.

▲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택시운전사로 근무했던 조성수씨(좌)와 장훈명씨(우)ⓒ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우리는 매일 운전하고 다니면서 상황을 보잖아요 그러다 여기저기 다쳐서 도망치는 학생을 보면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보내고 상태가 괜찮으면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놓고 그랬죠. 상황이 점점 악화된 후로는 터미널 등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 상황을 알렸어요. 그러다 이제는 우리도 나서야겠다고 싶어서 맨몸으로는 힘드니 차로 밀어붙였어요. 광주에서 계엄군을 쫓아내는 것을 목적으로 그들의 주 본부인 도청으로 향한 거죠. 차를 이끌고 도청 앞에 가서 시민들하고 함께 계엄군하고 대치하고 있었어요. 해가 지고 어둑해지니까 계엄군이 최루탄을 대량으로 뿌렸어요. 차들끼리 가깝에 붙어 있어서 문도 못 여는 상황이었는데 계엄군이 조를 짜서 차마다 진입해 곤봉으로 때리기 시작하더라고요. 아마 그때 잡혀간 사람도 있고 죽은 사람도 있을거예요.” <장>

▲ 영화 <택시운전사> 속 장면 ⓒ뉴시스

영화 <택시운전사>가 화제가 되자 그제야 5·18 민주화운동 당시 택시운전사들의 활약이 조명을 받고 있다. 하지만 정작 영화에는 택시운전사들의 역할이 가장 빛을 발했던 차량시위 현장은 그려지지 않았다. 여러모로 아쉬울 법도 하지만 장씨와 조씨는 전혀 그런 마음이 없다고 손사래 쳤다.

전혀 아쉽지 않아요. 이번 영화를 통해서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훨씬 따뜻해졌어요. 이번을 기회로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한 힌츠페터 기자에게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하고 싶어요.” <조>

“서운한 거 없어요. 영화는 힌츠페터가 보는 시각으로 그려졌잖아요. 그런데 힌츠페터가 차량시위 모습은 못봤어요. 그러니까 그 장면이 없는게 맞죠. 차량시위 장면이 들어가면 그의 기록이 거짓이 돼버리는 거잖아요. 그래서 오히려 더 진정성 있을 수 있던 거 같아요.” <장>

다만 장씨는 국내 언론에게 서운한 마음을 내비쳤다.

“당시 국내 언론은 5·18광주민주화운동에 관심을 갖지 않았어요.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었던 건 맞아요. 37년이 흐른 지금에야 관심을 갖고 취재하고 있는데 앞으로는 진상규명도 하고 피해자들의 트라우마도 해결할 수 있도록 적극 도와서 우리 마음을 풀어줬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장>

▲ (왼쪽부터) 조성수씨, 장훈명씨, 정성국씨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세 사람 모두 아직까지도 그날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이는 비단 세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겪은 모든 이들이 겪고 있는 고통이다.

“지금은 대외적으로 5·18광주민주화운동이 민주항쟁으로 제대로 평가되고 있어서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어쨌든 과거에 폭도로 몰리기도 했고 맞기도 많이 맞아서인지 건강이 좋지 않아요.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어서 병원에 다니기도 했어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 국가 중에 우리나라가 자살률이 가장 높다더라고요. 근데 5·18광주민주화운동 피해자의 자살률이 일반인 자살률보다 훨씬 높아요.” <장>

이들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이 국민들에게 어떻게 기억되길 바랄까.

“이제는 자유롭게 국가 원수도 욕할 수 있고 잘못한 것은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이잖아요. 예전에는 어른들이 아침마다 ‘오늘도 나가면 말 조심해라’, ‘행여라도 말 잘못하면 큰일 난다’라고 얘기할 정도로 통제가 됐어요. 그런데 이제는 많이 변했잖아요. 5·18광주민주화운동이 큰 계기가 됐다고 봐요.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좋은 세상이 만들어졌으면 좋겠어요. 하나 더 덧붙이자면 이번을 기회로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도 꼭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장>

“요즘 젊은 사람들이나 학생들은 우리나라의 민주화 과정을 너무 몰라요. 그나마 최근 영화가 주목받으면서 관심을 갖게 됐지요. 앞으로는 국민들이 민주화 역사에 관심을 갖고 공감대를 형성해줬으면 좋겠어요. 또 세계적으로도 우리의 민주화 역사가 인정됐으면 하는 바람이고요” <정>

▲ 장훈명씨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대화를 나누는 중간중간 울컥하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던 장씨의 모습이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그날의 억울함과 분노, 먼저 보낸 이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 등 복합적인 감정이 만들어낸 눈물이 아니었을까. 그가 더 이상 슬프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인터뷰를 마친 지금, 기자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REMEMBER 1980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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