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소연 칼럼니스트
▷성우, 방송 MC, 수필가
▷저서 <안소연의 MC되는 법>
          <안소연의 성우 되는 법>

가난한 신혼부부가 있었다.

둘은 한 달간 국내에서 신혼여행을 했다. 사이판이나 괌으로 떠날 돈이면 한 달쯤 국내를 떠돌 수 있었다. 마침 둘 다 백수였고 신혼집은 옹색하기 짝이 없었다. 둘은 되도록 천천히 현실로 돌아오고 싶었다. 자동차 트렁크 속 커다란 여행 가방에 커플 티 대신 코펠과 브루스타를 담았다. 둘은 산 좋고 물 좋은 동네를 찾아다니며 많은 양의 끼니를 싸구려 모텔 방과 계곡 주변에서 해결했다. 주로 라면, 가끔은 고기도 구웠다.

‘그렇게 한 달간의 여행을 마치고, 그들은 그 경험을 책으로 써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들은 더 가난해져 돌아왔고 다만 한 가지 진리를 깨달았으니 그것은 1급 계곡수로 몰래 끓여 먹는 라면이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는 사실이었다. 방 한 칸 신혼집에서 평범한 수돗물로 라면을 끓여먹는 일이 살짝 우울해졌다.

그러나 아직 젊었으므로 둘은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웃풍이 심한 겨울밤이면 백열전구 스탠드를 이불 속에 넣어 온기를 만들었다. 이외수의 <들개>에서 소개된 방법이라고 했다.

둘을 지켜보는 일은 씁쓸하면서도 흐뭇했다.

여자는 늘 둘의 첫 만남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원래 둘은 십년쯤 ‘소 닭 보듯’ 하던 관계였다고 했다. 남자가 친구들의 학교 선배여서 아주 가끔, 그러니까 십년 동안 너 댓 번쯤 보았었단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그 날도 언제나처럼 우연한 합석이었다.) 그 남자의 머리 주변에서 오로라처럼 광채가 뿜어져 나오더란다. 여자는 직감했다. 아, 이 남자와 결혼하게 되겠구나.

그날 밤, 마침 방향이 같아 한 차로 귀가하던 둘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시각과 장소에서 극심한 교통체증을 만났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풀리지 않는 도로 사정 덕분에 둘은 차에서 내려 단둘이 차를 한 잔 마셨고... 그로부터 1년쯤 후, 어려움 없이 자란 그 여자는 기꺼이 ‘가난한’ 새댁의 길을 선택했다. 가난하고 무능한 상대, 그래서 그녀를 아끼던 모두가 반대했던 결혼... 그 무모한 도전은 그녀의 눈에만 보였던 신비로운 빛에서 비롯되었다.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를 읽다가 그 여자가 생각났다. 끊임없이 발달을 거듭해온 문명 덕분에 우리의 많은 능력이 퇴화했다는 대목에서였다. 심지어 원시 인류는 상대방의 심리 상태까지도 후각으로 알아낼 수 있었다고 한다. (같은 책 492~497p) 그가 나에게 느끼는 감정이 두려움인지 아닌지를 냄새로 알았다는 것이다. 지금의 우리에겐 초능력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 다양한 감각을 우리의 먼 선조들은 가지고 있었다. 기상청 예보보다 우리 할머니 다리 상태가 날씨를 더 잘 맞춘다는 말은 근거 없는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우리 DNA에 운 좋게 남아있던 여섯 번째 감각들이 능력발휘를 한 것일 뿐. 어찌된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여자의 유전자에도 원시 인류나 누렸을 특별한 능력의 인자가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광채라니!

생각 난 김에 오랜 시간 연락 없이 지내던 여자를 수소문 했다.

광채를 내뿜던 남편과 과연 잘 살고 있을까?

여자와의 연락이 끊긴 게 얼추 십년은 된 것 같지만 지금 세상은 전화 몇 통이면 불가능이 없다.

.

.

 

아......

.

.

 

결과를 자세히 쓰지는 않겠다.

여자는 이혼하여 혼자 살고 있단다. 혼자가 되면서 가난과는 빠르게 이별해 잘 먹고 잘 살고 있지만 아직 이 사람 저 사람 만날 마음은 아니라는... 친구의 친구 얘기만 전해 들었다.

▲ ⓒ게티이미지뱅크

곤충들은 짝짓기를 할 때건 먹이를 찾을 때건 수시로 페로몬이란 호르몬을 내뿜는다. 연애에 관해선 더 이상 부러울 수가 없다. 천생연분이 저절로 찾아지다니! 밀당의 긴 탐색전이 필요 없다니! 그런 능력이 우리에게도 있다면 내 20~30대는 훨씬 안정적이고 편안했을 텐데...

그러나... 한 사람의 이야기를 일반화하는 것 같긴 하지만 역시 현대 사회에선 할머니 다리 상태보다는 일기 예보를 믿는 게 좋겠다. 우리에겐 곤충들의 페로몬 같은 신비한 능력이 없으니까. 그 여자의 육감이 그날 밤 발견한 광채의 존재를 나는 믿는다. 그 남자와도 어떤 부분에서는 분명 천생 연분이었겠지. 아마도 그 둘이 수 만 년 전의 숲속에서 만났더라면 버섯 따며 산딸기 따며 알콩달콩 잘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복잡한 세계에선 좀 다르다.

후배들에게 ‘그래도 결혼할 땐 조건을 좀 보렴.’하고 정나미 떨어지는 조언을 하기로 결심한 이유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