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석재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이석재 칼럼니스트】 몇 년 전이었을까. 어느 휴일 오후였다.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집 근처 분식집으로 들어갔다. 가게에는 나 말고는 다른 손님이 없었다. 주문한 김밥과 라면이 차례로 나왔다. 그렇게 적막한 분위기 속에서 막 식사를 시작하려던 순간, 중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무리들이 검은 뿔테 안경의 풍채 좋은 젊은 남성을 따라 가게 안으로 우르르 들어왔다. 그들은 책임자로 보이는 청년의 지시에 따라 한 쪽 테이블을 이어붙인 뒤에 나란히 앉았다. 워낙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갑자기 들이닥친 단체손님들이라 그랬던 것도 있지만, 뿔테 청년의 목소리가 워낙 좋아서 관심이 갖지 않으려고 해도 자연스레 이런저런 대화내용들이 귓가에 자연스레 꽂혀 들어왔다. 

밥을 먹으며 그들의 대화내용을 듣다 보니 인근 교회의 청소년부 학생들이었다. 뿔테 청년은 아마도 전도사이거나 혹은 젊은 목사인 것 같았다. 목소리가 참 좋았다. 중저음의 맑은 목소리가 넉넉한 소리통을 거쳐 가게 안 구석구석으로 풍부하게 퍼져나갔다. 어렸을 때부터 교회의 찬양인도 같은 것은 모두 저 사람의 몫이었으리라. 그렇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어느 순간부터 그 좋은 목소리가 소음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좋은 목소리와는 별개로 그 안에는 아무런 내용이 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식사자리의 주도권을 갖고 학생들에게 끝없이 말을 늘어놓았다. 목소리와 내용의 그 오묘한 비대칭성과 별 특별한 주제가 없음에도 말을 독점할 수 있는 재주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나는 소위 말하는 문장력이 그리 좋지 못한 편이다. 문장에 비문도 많을뿐더러 아름다운 표현들을 많이 접해본 적도 없고 그에 따라 독창적인 문체 같은 것도 갖고 있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글에 공감을 표해주는 분들을 만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결국 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문장력 너머에 존재하는 각자의 생각이 아닐까 싶어진다. 실제 글을 잘 쓰는 방법으로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이 거론되고는 하는데 여기에도 사실 문장력에 대한 언급, 그러니까 필사와 같은 이야기는 별도로 없는 것으로 보아 본질적인 부분은 아니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유시민은 저서 『글쓰기 특강』 (생각의길, 2015)에는 자신이 예전에 썼던 글을 가져와 손수 고쳐 쓰기를 하는 장면들이 여럿 나온다. 실력자의 적나라한 퇴고과정을 볼 수 있다. 내용의 수정 없이 문장만 손을 보는 것임에도 퇴고를 거치고 나면 글의 전반적 느낌이 확 달라진다. 저자는 명문으로 평가받고 있는 ‘항소이유서’에도 손을 댄다. 저자의 퇴고과정을 따라가며 다시 읽어보니 쓸데없이 어려운 용어를 쓰거나 어색하게 기술된 문장들이 여럿 보였다. 

그렇지만 예전의 글 역시도 그의 생각과 결의를 전달받는데 있어 불편한 점은 없었다. 반면 중년 중년의 유시민이 다듬은 그 퇴고에는 청년 유시민의 결기가 상당 부분 축소된 것 같았다. 물론 그건 내가 그의 스물여섯 살 때의 항소이유서를 먼저 그것도 아주 여러 번 읽었기 때문에 생겨나는 느낌일 수 있다. 

물론 좋은 문장에는 장점이 많다. 중저음의 목소리가 그렇지 않은 목소리보다 좀 더 신뢰를 얻을 수 있듯, 문장력이 좋아서 나쁠 것은 없다. 때로는 풍부한 표현의 문장들이 부족한 내용을 보완해주는 역할을 할 때도 있다. 그렇지만 문장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말하기나 노래, 영상 등과 같이 생각을 표현하는 ‘도구’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아무리 탁월한 가창력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본인의 노래가 없다면 결국 잊히고 마는 것처럼, 아무리 영상미가 뛰어난 감독이라 하더라도 스토리가 부실한 영화들만 찍다 보면 결국 도태되고 마는 것처럼, 문장력에만 의존하는 글쓰기는 결국에는 한계가 오게 된다. 

그때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다른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뿔테 청년의 좋은 목소리를 한참 듣고 있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저 좋은 목소리가 저분에게는 독이 되지는 않았을까. 콘텐츠가 부족해도 여전히 발언권을 독점할 수 있으니 말이다. 마찬가지로 젊었을 때 이름을 떨치던 작가들이 나이를 먹고 좋지 못한 글을 보여주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런 글을 읽어보면 문장의 미려함은 여전히 살아있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내용이 그만 못할 때가 많다. 표현의 아름다움이 내용의 추함을 덮지 못한 것이다. 결국 좋은 글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드러내는 반례들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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