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현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김종현 칼럼니스트】 영화 ‘몽상가들’(2003)은 프랑스에 온 미국인 매튜가 자유롭기 짝이 없는 테오-이자벨 남매를 만나 벌어지는 이야기다.

과감한 성 묘사 때문에 화제가 됐지만, ‘몽상가들’은 영화를 사랑하는 세 젊은이들의 시선으로 68혁명을 그린다. 68혁명은 구시대의 질서에 저항한 프랑스 젊은 세대의 움직임이었다. 테오와 이자벨의 아버지는 감성적인 시인이지만, 기존의 세계관을 지탱하는 권위를 낭만적으로 받아들이는 전형적인 구세대다. 반면 남매는 그 세계의 권위에 저항하는 젊은세대의 전형이다. 테오는 아버지에게 불만이 많고 반항적이다. 이자벨은 부자의 싸움에 끼여들지 않지만 자신의 자유로운 감정과 의지에 따라 과감하게 행동한다. 테오가 정열과 혈기를 보일 때 이자벨은 정념과 순수를 드러낸다.

매튜의 눈에 정열과 정념으로만 뭉친 남매는 지나치게 과감하고 제약이 없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이어진 고전적 세계 질서를 이끄는 미국에서 온 그는 두사람이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서서히 그들의 일상에 빠져들어 동화되어 간다. 영화 속 배경인 60년대 말은 신선하고 자유로운 경향인 '누벨바그' 장르가 프랑스 영화계에 자리잡은 때였다. 부모가 여행을 떠난 사이 세 사람은 함께 살면서 누벨바그 영화 장면을 흉내 내 루브르 박물관을 마구 뛰어다니거나, 온갖 영화에 대해 끝없이 떠들면서 자유로운 유희에만 몰두한다.

감독은 이들을 통해 당시 운동의 정서적 바탕을 들춰낸다. 누벨바그, 할리우드 영화, 대중 음악, 모택동 등을 계속해서 소환해 내는 세 사람의 대화는 변혁에 대한 열망과 보수적 사고의 대립이 시대의 변화를 어떻게 이끄는지를 계속해서 은유한다. 배우들의 전라연기, 성기노출, 근친상간, 쓰리썸 등의 파격적인 성적 묘사들은 이러한 목표를 향해 금기를 깨는 도전을 계속한다. 그러나 영화는 이들의 성적 관계를 정의하는 관객의 판단이 고리타분한 의심이 만들어낸 결과가 아닌지를 내내 묻는다. 과연 과거의 관습에 익숙한 시선으로 지금 눈앞에 벌어지는 현상을 제대로 재단할 수 있는가.

대통령 탄핵을 이끈 촛불집회가 처음 있은 지 어느새 1주년이 됐다. 최근에는 독일의 에버트 재단이 수여하는 2017년 인권상에 작년 겨울 촛불을 밝힌 한국의 국민들이 수상자로 선정됐다. 당연히 기쁜 일이지만 일각에서는 수상의 자격이 어디까지인지 말이 나온다. 열 일 제치고 광장에 나간 사람도 있지만, 관망하거나 촛불을 반대한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에게 수상자의 자격이 있느냐 하는 의문이다.

자격의 문제는 촛불 1주년을 기념하여 벌어지는 우리사회 다양한 단체와 세력들의 움직임에도 논란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집회 참가자들은 각기 진영과 목표와 생각이 달랐다. 그런데 누군가는 촛불 정신의 대표자를 자처하고 누군가는 촛불이란 그런 게 아니라고 반론한다. 과연 누구의 무엇이 진짜 촛불인가라는 물음이다.

이는 촛불집회를 초등학교 체육대회의 줄다리기 시합과 똑같이 보는 시각이다. 줄다리기 시합은 상대를 이기기 위해 협동심을 발휘하는 경기다. 하지만 등수에 따라 포상의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에 각자의 기여 정도에 따라 칭찬의 크기도 달라진다. 덩치 크고 힘 센 아이가 가장 많은 칭찬을 받을 것이다. 영차 영차 소리는 큰데 줄을 당기는 시늉만 한 아이는 비난을 받는다. 성적이 협동의 의미를 바꾼다.

촛불집회는 1등과 포상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성적을 내기 위해 협동한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 우리가 이겨내야 했던 진정한 상대는 정권이 아니라 과거에 우리가 만들어낸 기존의 세계 그 자체였다. 구시대를 만들어낸 것도 구성원 전체였고, 이를 새롭게 변화시키는 것도 구성원 전체다.

관용적으로 쓰여서 종종 가치를 잊곤 하는데, '평화로운 촛불 집회'에서 '평화'라는 낱말의 의미는 매우 무겁다. 폭력을 배제한 채 오로지 민의의 목소리로만 세상을 바꾼 것은 그 나라의 저력이면서 동시에 구성원인 국민들의 저력이기도 하다. 때문에 시대의 변화를 평화롭게 이끌어낸 것은 비단 촛불집회 참가자뿐만이 아니다. 조용히 바라만 보던 사람들, 촛불을 반대한 사람들, 나아가 이런 일이 가능한 공공의 체계와 질서를 만들고 유지해낸 국민 모두가 민주주의를 지키는 데 노력한 결과다.

에버튼 재단의 인권상 수여는 우수한 성적을 치하하며 주는 상이 아니므로 기여정도를 구분할 이유가 없다. 민주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주권회복의 변화를 이끌어낸 한국 사회의 모든 구성원을 향한 찬사의 성격이 맞다. 그러니 촛불에 참여한 이나 반대한 이들 모두 수상자로서 자격이 있다. 민주주의와 인권수호의 가치에 부합하는 과정과 결과를 보여준 국민 모두가 수상자다.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자신을 촛불정신의 유일한 계승자로 자처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오해하기 쉬운 말이라 부연하자면, 남들이 각자 생각하는 촛불의 정의를 촛불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 자체가 구시대적이고 고리타분하다는 뜻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서로 생각이 달라 시끄럽고 의견 분분한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몽상가들’은 어느날 테오와 이자벨이 시위에 참가하면서 끝이 난다. 테오와 이자벨을 유아적이라고 생각하던 매튜는 마치 신나는 장난이라도 된다는 듯 들뜬 그들을 만류하다 포기하고 돌아선다. 하지만 매튜가 외면한 68혁명의 파도는 이후 국제 정세와 맞물려 미국, 독일, 일본 등 전세계로 번져갔다. 세상은 이전까지 없던 몽상가들에 의해 변화한다. 2016년에 대한민국에선 몽상가들의 촛불이 비폭력으로 이를 이뤄냈다.

테오는 생김새가 다른 이자벨과 자신이 일란성 쌍둥이라고 우길 뿐 아니라 둘의 정신세계가 하나라고 말한다. 그 둘이 순수한 정열이라는 하나의 색으로 융합한 것이 변화의 바탕이라 할 때, 당시의 세상은 그것이 대체 무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들은 변혁의 중심에 살면서도 집 밖의 세계와 온전히 접촉하지 않았고, 그러면서도 새로이 등장해야 할 세계의 중심을 갈망하며 매튜와 논쟁했다. 열렬하나 두렵고 두려우나 거침없다. 거리에서 보이진 않았을지라도 이들의 고민은 누군가의 집에서 존재했다.

이미 보이는 것은 보고 난 이후의 세계다. 그것만이 실체라고 믿는다면 아직 오지않은 미래는 과거로만 설명된다. 어느 진영이든 구시대의 관성은 위험하다. 촛불의 자격을 말하기에 앞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그것은 현실보단 누군가들의 꿈으로서 존재한다. 지금 이해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자격을 만들어낸다. 과거는 미래를 이끄는 오늘의 현상을 재단 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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