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리본이 말하다③] ‘창현엄마’ 최순화, “세월호, 아프지만 힘써 기억해야”
[노란리본이 말하다③] ‘창현엄마’ 최순화, “세월호, 아프지만 힘써 기억해야”
  • 김태규 기자
  • 승인 2017.12.05 18:14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특별 인터뷰] 단원고 2학년 5반 故 이창현군 어머니 최순화씨
▲ ‘창현엄마’ 최순화씨 ⓒ투데이신문

특별법 제정 위해 ‘삭발투쟁’ 하기도
2기 특조위 기대하며 다시 촛불 들어

박근혜 정부, 진상규명 조직적 방해
항상 함께한 시민들이 가장 ‘큰 힘’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세월호참사로 가족을 잃은 이들은 지난 3년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2014년 4월 16일 이후 세월호 유가족들은 진상규명을 위해 거리에서 1300일이 넘는 기간을 보냈다.

‘보상금을 노린 쇼’라거나 ‘빨갱이’, ‘종북세력’이라는 등 유가족들을 향한 조롱과 비난이 쏟아졌지만 이들은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는 것을 굳게 믿으며 끝까지 광장을 지켰다.

지난한 싸움 끝에 지난 3월 세월호가 인양됐지만 아직도 희생자들이 구조되지 못한 이유,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투데이신문>은 4·16 합창단과 안산 분향소 기독교 예배실에서 활동하는 ‘창현엄마’ 최순화씨를 안산 화랑유원지 세월호합동분향소 기독교 예배실에서 만나 지난 3년간의 진상규명 활동과 2기 특조위에 거는 기대에 대해 들어봤다.

▲ 단원고 2학년 5반 희생자 故 이창현군 <사진제공 = 최순화씨>

Q.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린다.

단원고 2학년 5반 희생자 이창현군의 엄마다.

Q. 유가족들이 현재 가장 주력하고 있는 활동은.

3년이 넘다보니 분야별로 많이 나뉘어 있다. 세월호가 목포신항으로 오면서 4월부터 8월까지는 목포에 집중했었다. 지금은 2기 특조위 법안 통과와 동시에 활동이 잘 시작될 수 있도록 토요일마다 광화문에서 집회를 하고 있고, 문화적인 부분으로 영역을 넓혀 4·16합창단과 연극팀도 활동하고 있다. 또 희생자 부모들이 공방을 만들어 손수 만든 것을 판매도 하고 세월호를 알리고 있다. 여러 방식으로 진상규명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Q. 세월호가 인양된 후 국민의 관심이 많이 떨어진 듯하다.

인양이 최종 목적은 아니었다. 희생자들을 찾고 침몰 원인을 밝혀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 첫 번째 단계인 증거물(선체)이 육지로 올라온 것뿐인데 다 해결됐다는 생각이 점점 퍼지는 것을 보면 처음부터 세월호를 지우려고 했던 세력들이 이런 말들을 알게 모르게 퍼뜨리지 않나 싶다. 조사 과정을 더 지켜봐야 하고, 2기 특조위가 활동을 시작하면 구조를 ‘안 한’ 것이 드러날 것이다. 더 관심을 갖고 왜 침몰했는지, 왜 구조를 안 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져야 한다.

Q. 창현군은 어떤 아들이었는지.

그냥 평범한 사춘기 아이였다. 공부하기 싫어하고, 놀기 좋아하고, 먹기 좋아하고, 친구들 좋아하고, 엄마는 싫어하고.(웃음) 엄마에게는 까칠했다. 친구들과 노는 걸 가장 좋아하고 행복해 했다. 우리 가족은 교회를 다니는데, 교회에 열심히 다니지 않아 못마땅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 후회스럽다. 내가 교회에서 배우고 옳다고 믿었던 신념들을 창현이에게 강요한 것이었다. 정말 화가 많이 났다. 교회가 앞장서서 세월호 희생자들을 비난하는 것을 보면 배신감이 굉장히 크다. 그런데 나도 그 편에 서서 창현이에게 ‘좋은 믿음’ 강요했다는 것이 가장 후회스럽다. 제일 좋은 것을 아이에게 먹이고 싶어서 아이에게 먹였는데, 알고 보니 제일 나쁜 불량식품을 먹인 꼴이지 않나. 신앙을 이유로 창현이와 점점 더 멀어졌던 것이다. 그 부분을 영원히 돌이킬 수 없다는 게 제일 미안하다.

Q. 창현군이 사고 다음날 저녁 발견됐다. 당시 심정이 어땠는지.

믿어지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뭐가 뭔지를 몰랐다. 창현이가 정말 죽었다는 생각도 들지 않고, 주변에 사람들도 너무 많고, 내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그냥 무슨 일 치르듯 지나간 것 같다.

참사가 발생한 날인 16일 단원고에서 마련한 버스를 타고 진도로 내려가 팽목항과 사고 해역까지 현장을 지켜봤다. 17일 새벽까지는 구조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그날 낮이 돼도 상황은 변하지 않고, 정부에서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언론에서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그래서 ‘길어지겠구나’ 싶어서 짐을 챙기러 안산으로 돌아왔다. 짐을 꾸려 다시 진도로 내려가려고 하던 차에 창현이가 발견됐다. 창현이가 발견되던 날, 진도체육관은 사람으로 미어터졌다. 체육관 밖에도 사람이 많았다. 밤 12시가 다 된 시간에 큰애가 양치를 하려고 체육관 밖으로 나왔던 것 같다. 그 때 마침 앰뷸런스 한 대가 체육관으로 왔다. 그래서 큰애가 동생이라고는 생각도 못한 채 누가 실려 있는지 보려고 앰뷸런스로 갔는데, 확인해보니 창현이었다. 그리고 앰뷸런스가 떠나려고 하자 붙잡아두고 아빠에게 가서 얘기하고 절차를 밟아 안산으로 왔다.

▲ 팽목항에 전시된 세월호참사 추모 작품 ⓒ투데이신문

진상규명 위한 3년, 투쟁 이야기

Q. 왜 유가족, 미수습자 가족들이 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

교통사고가 나도 당사자는 물론이고 보험회사, 경찰까지 면밀히 조사한다. 당시 유가족들은 당연히 구조에 총력을 다 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진도까지 내려갔다. 그런데 막상 현장에 가보니 구조하지 않고 있더라. 이를 유가족·미수습자 가족들이 모두 지켜봤는데 언론에서는 오히려 구조에 최선을 다 하고 있다는 내용이 보도됐다. 현장과 다른 목소리가 언론을 통해 전달되는 것을 보면서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첫 날부터 직감했고 이 때문에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만일 보도된 대로 정말 정부가 구조에 총력을 다 했다면 유가족과 미수습자 가족들은 거리로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Q. 진상규명 활동에 뛰어들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2014년 5월 7일 밤으로 기억한다. 당시 KBS 김시곤 보도국장이 ‘일 년에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에 비하면 (세월호 희생자) 304명은 많은 것도 아니다’라는 망언을 해서 그날 저녁에 급하게 유가족들이 모여 KBS에 항의 방문을 하고 다음 날 청와대까지 갔다. 거기에 참여하면서 싸워야 된다는 것을 깨닫고 뛰어들게 됐다.

Q. 2015년 4월 2일에는 특별법 시행령 폐기와 배·보상 절차 전면 중단을 요구하며 삭발을 하기도 했다. 삭발투쟁까지 하게 된 계기는.

유가족은 특조위에 조사권, 수사권, 기소권을 포함해달라고 주장했다. 그래야 청와대와 국정원 등을 성역 없이 조사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청와대에서는 이를 적극적으로 막았다. 보수세력과 언론은 유가족들을 ‘빨갱이’, ‘종북’으로 몰기까지 했다. 이 과정에서 가족들이 단식을 했고, 국회와 청와대에서 노숙농성을 했다. 그러나 특별법의 결과는 달랑 ‘조사권’ 하나였다. 유가족들이 요구한 것의 3분의 1밖에 반영되지 않은 것이다.

조사권만 있는 특별법은 2014년 11월 7일 통과돼서 2015년 1월 1일부터 시행한다고 명시돼 있었다. 법안이 통과된 날부터 1월 1일까지는 약 50여일 시간이 있었는데, 정부는 그동안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 또 당시 정부가 발표한 특별법 시행령 내용은 특조위는 조사권만 가지고 있을 뿐인데 이 조사마저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유가족들은 보상 얘기를 꺼낸 적이 없는데 언론은 ‘돈 더 받으려고 삭발한 거다’라고 몰아갔다. 유가족들은 단지 제대로 된 조사를 위해 시행령을 폐기하라고 삭발투쟁을 하게 됐다. 

Q. 창현군의 아버지 이남석씨는 당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를 만나 무릎을 꿇고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해 빌기도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연설을 하러 국회를 찾은 날이었다. 유가족들은 그 전날부터 박 전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국회에서 진을 치고 준비했다. 그런데 박 전 대통령은 국회 들어갈 때, 나올 때 모두 유가족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후에 창현아빠가 김무성 대표에게 달려가 ‘살려달라’고 빌었다. 사실 의미 없는 건데, ‘아빠로써 할 수 있는 건 뭐든 해야겠다’는 심정이었던 것 같다.

▲ ⓒ투데이신문

Q. 세월호 참사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보수’라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서 참, 할말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와서 보니 청와대에서 적극적으로 권력과 돈으로 보수단체를 동원하지 않았나. 유민아빠가 단식하는데 그 앞에서 음식을 시켜먹고, 빨갱이는 북한으로 가라고 했다. 또 광화문 광장에서 서명을 받고 있는데 찻길 건너편에서 어마어마한 크기의 태극기와 십자가를 들고, 애국가와 찬송가를 부르면서 ‘종북세력은 북한으로 가라’고 매일 집회를 했다.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화가 날 때는 ‘당신들 자식도 세월호 같은 배에 태워 똑같이 당해봐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주류 언론에서 나오는 보도만 보고 ‘보상 받았으면 그만 하라’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국가와 언론이 사회를 이렇게 만든 것 같다.

Q. 진상규명을 위한 싸움이 이렇게 길어질 거라고는 예상을 못했을 것 같다. 어떻게 이토록 긴 시간을 싸우게 됐는지.

사실 예상했다. 지난 2009년 용산참사를 당시 활동했던 시민단체 활동가들도 투쟁하면서 겁을 먹더라. 특별법 투쟁할 때 일인데, 가끔 집회 신고 시간을 넘겨서라도 ‘단 한 마디’ 답이라도 들으려고 도로에 주저앉아서 집회를 이어가자고 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오랜 시간 동안 활동했던 시민사회 활동가들이 ‘할 수 있는 선’ 까지만 하더라. 심지어 몇몇 활동가들은 집회현장 관리를 담당한 경찰과 악수를 나누기도 하더라. 활동가들도 그렇게 어느 선까지 밖에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싸움이 길어지겠구나’, ‘외로운 싸움이 되겠구나’라고 생각했었다.

Q. 활동하면서 도움 받은 분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이 있다면.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곁을 지켜주는 분들이 가장 힘이 된다. 자기 일이 있고 가정이 있기 때문에 안산이나 광화문에서 활동을 지속하지 못해도 각자 있는 지역에서 활동을 이어가는 분들도 있다. 노란리본을 만들고 세월호를 알리고 진상규명을 외치는 분들이 여전히 많다. 그 분들이 가장 고맙고 힘이 된다.

Q. 진상규명 활동을 지금까지 이어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

우리가 직접 봤기 때문이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배 안에서 살아 돌아올 거라고 믿었다. 배 안에 갇힌 아이들도 ‘해경 왔대’, ‘우리 살았어’라고 문자를 보낸 아이들도 있다. 그런데 진도에 가서 보니까 구조활동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구조에 최선을 다 하고 있다’고 거짓말 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수많은 증언과 기록을 남기지 않았나. 우리 눈으로 봤는데 그걸 어떻게 부모가 외면하겠나.

▲ 4·16 합창단 공연 모습 <사진제공 = 최순화씨>

박근혜 정부, 지속적으로 진상규명 방해

Q. 최근 세월호 참사 당일 청와대에서 최초 보고 시각을 조작했다는 내용의 문서가 발견돼 구조의 골든타임을 놓쳤다는 문제가 제기됐는데.

그랬을 것이다. 지금까지 박 전 대통령 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정부 권력이 총동원됐다. 그걸 보면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다. ‘박 전 대통령이 구속까지 됐는데 그게 그렇게 중요하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 시점을 따져보면 오전 7시 30분에 대통령에게 보고했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는다. 대통령이 10시 15분에 지시를 내렸다는 말만 있지 통화 기록과 지시내용 기록도 없다. 헌법재판소에서도 제출하라고 했는데 내놓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 청와대에서 발표한 기록도 사실 믿어지지 않는다. 김장수 전 국가안보실장, 김기춘 전 비서실장 등이 세월호 안에 있는 죽어가는 생명을 구할 생각을 요만큼도 안 하고 자기들에게 책임이 돌아올까봐 전전긍긍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그게 무슨 국민을 대표하는 대통령이며 정부라고 할 수 있겠나. 더 조사해야 한다. 대통령이 7시간 동안 뭘 했는지 밝혀야 한다.

Q. 박근혜 정부에서 청와대와 당시 여당(새누리당)이 조직적으로 진상규명 활동을 방해했다는 의혹이 있다. 진상규명을 위해 활동하면서 실제로 방해를 체감한 적이 있다면.

당시 특별법 제정을 위해 활동할 때 유가족들이 국회에 청원하기 위해 버스투어를 하면서 지방까지 돌면서 서명을 받았다. 서명을 받아 국회에 제출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당시 광화문에서 집회를 하고 청와대로 가서 서명을 제출하려고 했지만 경찰들이 한 발짝도 못 움직이게 막았다. 며칠 동안 국회의 시멘트 바닥에서 자면서 농성을 하기도 했다.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농성을 할 순 없으니 교대로 농성을 진행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교대도 하지 못하게 막아버렸다. 그래서 그 때 당시 김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차를 얻어 타고 들어가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굉장히 많았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국정조사에서도 당시 새누리당 조원진, 김재원 의원 등이 특조위에 대해 ‘세금 도둑이다’와 같은 말을 했다. 지나고 나서 보니 청와대에서 지시한대로 한 것이더라. 직접적인 방해보다는 새누리당 의원들의 말이 큰 걸림돌이 됐다. 당시 국정조사는 새누리당 의원들의 방해로 제대로 된 조사 없이 끝났다. 그래서 새누리당 국회의원 사무실을 찾아가기도 했었다.

새누리당 추천 특조위원 5명의 ‘행동지침’을 담은 해수부 문건이 발견되기도 했다. 문건에는 ‘대통령 7시간을 조사하겠다고 하면 사퇴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 문건이 이미 공개됐는데도 청와대 조사 관련 논의가 나오자 새누리당 추천 위원들은 문건의 내용대로 사퇴했다. 그리고 보수 언론들은 이 문건에 대해 보도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당시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직접적, 적극적으로 방해했다.

▲ ⓒ투데이신문

진상규명 위해 4월 16일로 돌아가야

Q.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던 순간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당연히 탄핵이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박 전 대통령의 파면이 선고된 날은 금요일이었다. 유가족들은 당시 헌재 앞에 모여 있었는데, 당시 나는 금요일마다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선체 인양과 미수습자의 온전한 수습을 요구하는 피켓시위를 했었다. 그래서 그날도 피켓시위를 하던 중 탄핵 인용 소식을 들었다. 헌재 앞에 있던 유가족들은 축제 분위기였다. 그들이 승리의 개가를 부르면서 헌재부터 청와대 방면으로 행진해 왔는데, 그 모습을 보며 굉장히 감격스러웠다.

Q. 세월호 참사 당일 박 전 대통령의 행적은 탄핵 사유로 인정받지 못했다. 어떻게 보는지.

대통령의 참사 당일 행적을 헌재는 대통령의 주장 그대로 믿었다. ‘성실의무를 위반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결하지 않았나. 대통령이 9시 30분에 보고를 받았다 해도 당시 123정은 이미 현장에 도착했었다. 보고를 받은 즉시 ‘총동원해서 구조하라’고 한 마디 지시만 했었어도, 도착한 해경들이 세월호에 들어가서 탈출 명령만 내렸어도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시뮬레이션에서는 거의 전원 구조 할 수 있었을 거라고 나왔다. 만일 참사 당시 박 전 대통령의 ‘진짜’ 행적을 제출했다면 분명히 탄핵 사유로 인정됐을 것이다.

Q. 현 정부는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보는지.

문재인 대통령의 진심은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막히는 부분이 많다. 야당 숫자가 많은 국회에서도 그렇고. 어느 것 하나 쉽지 않다. 그런데 현재 여당이 야당으로 지낸 기간이 길어서인지 치열하게 싸우지 않는 것 같다. 그냥 ‘적당히’ 싸우는 모습들도 보인다. 제대로 하려고 하면 물고 늘어질 텐데, 지금도 야당 시절 시달렸던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정의의 편에 서 있다면 국회의원 직을 걸고 해야 하지 않나. 당시 새누리당 의원들이 대통령의 지시사항을 이행하기 위해 불법적인 일도 자행한 것을 보면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Q. 2기 특조위가 출범하면 진상규명이 될 것이라고 보는지.

‘사회적 참사 특별법’ 통과는 시작에 불과하다. 유가족들은 2기 특조위가 잘 시작될 수 있도록 10월 14일부터 매주 토요일 다시 촛불을 들기 시작했다. 지난 특조위는 2014년 11월 7일 특별법이 통과됐지만 실제로 특조위가 가동된 것은 2015년 8월 4일부터다. 그러니까 거의 10개월간 아무것도 안 한 것이다. 2기 특조위는 국회에서 특별법이 통과되면 곧바로 시작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야 한다. 사회적 참사 특별법에는 수사권과 상시특검권이 포함돼 있다. 그래서 지난번처럼 조사도 제대로 못하는 특조위는 아닐 것이다.

▲ 최순화씨가 경기 안산 화랑유원지에 마련된 노란리본 조형물에 새겨진 아들 이창현군의 이름을 어루만지고 있다 ⓒ투데이신문

Q. 진상규명을 위해 가장 먼저 해결돼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가장 우선적으로는 2014년 4월 16일로 돌아가야 한다. 그 전날 안개가 심해 배가 출항하지 않아야 함에도 유일하게 세월호만 출항했다. 출항 이유를 조사해야 한다. 학교도 조사해야 한다. 교육청에서 2013년부터 해운산업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수학여행 시 배를 이용하라는 지침을 내렸다고 한다. 또 참사 당일 사고 시점이 아직도 불분명하다. 또 사고인지, 의도적 침몰인지도 조사해야 한다. 청와대가 참사를 언제 인지했는지, 어떤 지시를 내렸는지, 해경이 적극적으로 구조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지, 해경 123정장과 선원들, 언론의 오보 등 다 조사해야 한다. 그날 관계된 사람들은 모두 처음부터 조사해야 한다.

Q.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 달라진 것이 있다면.

우선 내가 가장 많이 달라졌다. 신앙관도 많이 달라졌고, 교회를 바라보는 시각도 변했다. 한 목사가 “가난한 집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경주 불국사로 가면 될 일이지, 왜 제주도로 배를 타고 가다 이런 사단이 빚어졌는지 모르겠다”라는 망언을 하는 등 교회가 세월호 유가족을 비난하는데 앞장서지 않았나. 신이 한국 교회를 본다면 ‘밟아버리고’ 싶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회적으로는 언론 지형이 많이 달라진 것 같다. 팟캐스트도 많고, 개인이 알고 싶으면 얼마든지 검색을 통해 진짜가 뭔지 알아볼 수 있는 시대다. 또 촛불집회가 있었다. 촛불집회에 대한 평가는 계속 확대되는 것 같다. 국제적으로 상도 받고, 민주주의의 좋은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국민들의 시각도 많이 달라진 것 같다.

Q. 진상규명을 위해 정치권과 시민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잊지 말아야 한다. 누구나 ‘나의 일일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꾸 잊혀지고,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들 수 있다. 그러나 생명에 관한 문제기 때문에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잊으면 또 반복될 것이다. 진상규명도 제대로 안 하고, 책임자 처벌 안 하고, 재발방지 대책을 세우지 않으니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나. 힘 없는 사람들, 약자들이 계속 죽어나간다. ‘시간 지났으니까’, ‘보상금 받았으니까’ 잊기 시작하면 반드시 재발한다. 자신을 위해서 또 자녀 세대를 위해서 반드시 진실을 밝혀야 한다. 기억하는 것이 아프지만 애써, 힘써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