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현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김종현 칼럼니스트】 북한 병사가 귀순했다. CCTV가 공개됐다. 전속력으로 달리는 차, 집중사격 하는 북한 군인들. 공동경비구역에선 수십발의 총알이 쏟아졌고 병사는 응급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군사분계선을 넘는 일에 하나뿐인 목숨을 걸었다. 단지 남쪽으로 한 발짝 넘어오는 일이었다.

영상 속에 김일성 친필비가 나온다. 그 친필비는 탈출의 마지막 관문인 북한 판문각 옆 길목에 있다. 김일성이라 쓰인 커다란 글자는 탈출 병사가 온 힘을 다해 내달리던 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20여년 전에 죽은 존재가 여전히 20대 중반 한 청년의 삶과 죽음을 움켜쥐고 있었다.

오래 전에 죽은 사람의 이야기는 또 있다. 박정희대통령 기념재단은 상암동 박정희대통령 기념관에 동상 건립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다수 여론은 인권과 자유를 억압한 독재자의 동상 건립에 반대한다. 그럼에도 재단측과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동상 건립은 매우 중요한 듯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한 시대의 이념을 내재화 한 이들에게 시대정신의 변화는 자기부정의 과정이다. 자신을 부정하는 세계에서 산다는 건 불행한 경험이다. 그들에게 박정희 동상은 서로의 생을 격려하는 손짓일 수 밖에 없다. 반면에 동상 건립을 반대하는 이들에게 동상은 자유에 대한 모독이다. 감정에 비하자면 물질로서의 동상은 가치가 거의 없지만, 기뻐하는 사람도 속이 쓰린 사람도 고작 쇳덩어리에 자신의 감정을 동기화 시킨다.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을 신뢰한다. 하지만 정작 추앙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행복과 불행, 믿음과 의심, 기대와 좌절이 생을 지배한다. 사람에겐 눈으로 볼 수 있는 희망의 담보물이 필요하다. 그 아래 모이는 이들이 많아지면 믿음의 영역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중력장이 생겨나 집단의 규모를 더욱 키운다. 때문에 상징은 신뢰집단의 실제 규모보다, 서로의 믿음을 확인해야만 불안을 떨칠 수 있는 이들의 욕망만큼 거대해진다. 북한이 정말로 지상천국이라면 김일성의 친필비가 그만큼 클 이유가 없듯이.

오늘날 한국 개신교 대형교회들의 커다란 건물은 어느새 욕망의 상징이 되었다. 희망의 담보물이 필요한 어떤 이들에겐 목사의 설교가 불안을 해결하는 창구가 된다. 건물의 웅대함은 교세의 확장이 이유 있음을 나타내고 이는 곧 목사가 남다르다는 뜻이다. 그 곳의 신도들은 창구에 대한 신뢰로 결속된 동지들이다. 그러니까 교회 건물의 대형화는 '우리끼리'라는 구조의 안정감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어야 가능하다. 그 안에서 현대인의 종교라 해도 무방할 자본주의는 '돈 되는 교회의 목사세습'이라는 '끼리끼리'의 결을 만든다. 근래 문제가 된 명성교회의 목사세습 논란은 결국 교리와 불안 중에 무엇이 우리시대의 진짜 종교인가를 두고 벌이는 갈등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 둘의 충돌은 희망의 자리가 비어 있어서 생겨난다.

그러나 희망은 채우려 할 때 채워진다. 이달 15일에 있었던 포항의 큰 지진은 발생 당일에 재난이 종료된다는 보장이 없었다. 여진이 지속 됐으니 수능이 일주일 연기되는 것은 당연하다. 구성원 중 일부의 곤란을 방치하면 언젠간 집단 전체가 고스란히 짊어질 사회적 비용이 청구된다. 지난 박근혜 정부가 세월호 사건을 정치적으로 악용하여 일으킨 문제를 다시 정상으로 돌리는 일에 우리 사회가 얼마나 많은 유무형의 댓가를 치렀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오늘의 선택이 미래를 좌우한다. 희망이란, 미래에 거는 기대가 아니라 미래를 만들기 위해 오늘의 모습을 선택하는 것이다.

북한 병사도 선택했어야만 했다. 대개의 탈북인들이 그러하듯 북한병사가 귀순한 것은 현실과 희망이 내는 불협화음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한 사람이 자신의 터전을 버리는 일에 목숨을 걸었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지배하던 세계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다. 다른 세계와 조우하지 못하는 이상, 이러한 거부는 곧 죽음이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생명이 꺼지면 그의 세계도 사라진다.

CCTV 영상 속 북한 경비병들이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총알 세례를 퍼붓는다. 공동경비구역은 한적하다. 다소 메말라 보이는 건물들과 일대의 공간은 정갈하다. 하나의 세계를 꺼트리는 데 열중한 사람들이 적의를 품은 채 총을 쏘는 동안 그들 주변엔 가을의 고운 빛을 띈 낙엽들이 사방에 수북하다. 상암동 박정희 기념관 건너편 공원에도 풍성한 색으로 물든 나무들이 늘 우두커니 서 있다. 명성 교회 주변 나무들도 단풍이 든다. 지진 수습이 한창인 포항의 고등학교 교정에도 나뭇잎은 물들었다.

한 북한군 병사가 낙엽을 향해 엎드린다. 총을 쏜다. 총탄이 가을 대기를 가르는 동안 몇 그루의 아름드리 나무는 찬연한 색을 입고 고요히 서 있다. 청년이 피를 흘리며 낙엽 속을 뒹굴 때 비정한 자연은 말 없이 아름답다. 하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볼 겨를이 없다. 그럼에도 희망을 이야기 한다. 인간의 숙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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