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리본이 말하다⑤] 홍성담 화백 “훼손된 세월호, 박근혜 얼굴 같았다”
[노란리본이 말하다⑤] 홍성담 화백 “훼손된 세월호, 박근혜 얼굴 같았다”
  • 전소영 기자
  • 승인 2017.12.18 17: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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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인터뷰] 세월호 참사를 그리는 홍성담 화백
▲ 홍성담 화백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진도 실내체육관·팽목항, 그야말로 아수라장
박 전 대통령, 무능력한 꼭두각시에 불과해

참사 원인, 책임 있는 권력집단의 고의적 침몰
트라우마 벗어나려면 희생자의 고통 직면해야

세월호 참사, 대한민국의 문명사적 전환점 돼야
노란리본 역할, 끊임없는 담론 이끌어 내는 것

【투데이신문 전소영 기자】 세월호 참사 이후 화가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자들을 잊지 않겠다며, 또 미수습자 귀환을 바라는 간절한 기다림을 붓 끝에 실어 그림으로 표현했다. 노란리본을 시작으로 친구들과 함께 수학여행을 떠나 행복하게 웃고 있는 단원고 학생들, 잔잔한 바다 위에 떠있는 멀쩡한 모습의 세월호까지. 마치 그날의 슬픔과 고통을 잊으려는 듯 그림 속 2014년 4월 16일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화롭기까지 하다. 

하지만 홍성담(62) 화백의 작품은 달랐다. 희생된 304명의 원혼들이 밤마다 청와대를 배회하며 죽음의 진실을 밝혀달라고 울부짖고 있다. 바닷속에 잠겨가는 선체 안에서 이미 죽음을 맞은 친구의 손을 잡고 하염없이 눈물 흘리면서도 마지막까지 살기 위해 발버둥 친다.

누군가는 죽음을 앞둔 고통의 순간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그의 그림을 잔인하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홍 화백은 그 순간을 직접 대면하는 것만이 원한 가득한 그들의 울부짖음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며 소통이라고 말한다.

그는 세월호 참사로 그림을 가르쳐주던 학생을 잃었다. 진도에서 유가족과 슬픔을 함께하고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정부에 분노했다. 그리고 동거차도에 머물며 세월호 인양 과정을 지켜봤다. 마침내 세월호 선체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순간 그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누구보다 세월호의 아픔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홍 화백, <투데이신문>은 지난달 26일 경기 안산시 초지동 홍 화백의 작업실을 찾았다. 3년 8개월이란 시간 동안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그날의 슬픔을 지켜보고 함께한 홍 화백이 바라본 ‘세월호 참사와 안산, 그리고 대한민국’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봤다.

▲ ⓒ뉴시스

Q. 세월호 참사 이후 3년 8개월이 흐른 안산은 어떤 모습인가.

세월호 참사 이후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변했을지 몰라도 우리의 삶은 바뀌지 않았다. 촛불집회를 거쳐 무능한 대통령을 탄핵하고 적폐청산 과정에 있지만 대한민국을 둘러싸고 있는 자본주의와 관련한 문제는 전혀 바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안산은 ‘세월호 안전공원’ 설립을 두고 해당 지역 주민들과 갈등을 빚고 있다. 혹시나 ‘집값이 떨어지지 않을까’하는 우려 때문인 듯하다. 그들은 (세월호 참사가) 본인들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월호 안전공원 문제를 보면서 우리의 삶이 과연 세월호 참사 이후 어디로 가고 있는지, 대단히 절망스럽다.

Q.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당일 무얼 하고 있었나.

평소와 마찬가지로 9시 정도에 출근해 컴퓨터를 켜고 메일을 확인했다. 그런데 인터넷 뉴스에서 제주로 가는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후 전원 구출됐다는 소식에 별일 없을 거라 생각하고 컴퓨터를 끄고 작업을 했다. 그런데 저녁에 작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뉴스를 보니 그게 아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깜짝 놀랐다.

Q. 본인의 작업실에서 아르바이트 하던 단원고 학생이 세월호 참사로 희생됐다고 하던데.

그렇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부터 주말에 하루 작업실에 와 그림도 배우고 일을 도왔다. 참사가 있기 일주일 전 그 여학생이 다음주에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간다고 하더라. 그래서 용돈으로 쓰라며 그 달에 지급할 월급을 미리 계산해 줬다. 그리고 제주도에 맛있는 음식이 많으니 사 먹으라며 3만원 정도를 더 쥐어줬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까지도 그 학생이 단원고에 다닌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내 주변 사람에게 뉴스에 나올 만큼 큰 불행이 닥칠 거라 생각 못했다. 이후 진도에 내려가 머무는 동안 유가족이 머물던 진도 실내체육관에서 그 학생 어머니를 만났다. ‘제 아이가 바닷속에 있잖아요’라고 하시더라. 그제야 알았다. 정말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투데이신문

Q. 참사 직후 본인이 목격한 진도 실내체육관과 팽목항은 어땠나.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유가족들끼리도 한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중구난방이었다. 유가족을 가장한 정보요원, 소위 '프락치'들이 유가족만큼이나 많았다. 2명씩 짝을 지어 다니고 핸드폰으로 어딘가에 보고하는 모습을 봤다. 보통 일이 아니다 싶었다. 당시 진도에 사는 지인에게 도움을 받아 늦은 밤 세월호 침몰 지점인 맹골수도에 가기도 했는데 가끔씩 조명탄만 터질 뿐 사람은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어떤 작업도 하지 않는데 조명탄을 쏜 이유를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그때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Q. 당시 진도를 방문한 박근혜 전 대통령의 무능력한 모습에 분노했다던데.

누구나 다 느꼈겠지만 당시 박 전 대통령은 자기 생각이 없는 꼭두각시일 뿐이었다. 그저 이리 오라면 오고 저리 가라면 가고, 누가 써준 글만 앞에 서서 읽고 있었다.

Q. 세월호가 인양되는 순간 눈물을 흘렸다던데 어떤 심경이었나.

녹슬고 구멍이 뻥뻥 뚫린 세월호 선체가 옆으로 누운 채 수면 위로 떠오르는데 그 모습이 마치 대한민국과 국민이 뽑은 박 전 대통령의 얼굴 같았다. 내 평생을 대한민국의 진보를 위해 싸워왔는데 겨우 이런 나라 밖에 만들지 못했다는 자괴감 때문에 눈물이 나더라.

▲ 걸개그림 ‘세월오월’ <사진 제공 = 홍성담의 그림창고>

Q. 참사 발생 1000일을 앞두고 세월호와 관련된 작품을 소개했다. 참사 당시 희생자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는데 이유가 있나.

‘잊지 않겠다’, ‘기다림’ 등과 같은 서정적인 구호들이 굉장히 힘들게 느껴졌다. 소통이라는 건 이해의 차원이 아니라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울부짖음에 대한 응답이라고 생각한다. 세월호에서 희생된 아이들이 어떤 고통 속에서 죽어갔는지 함께 감정 이입을 해야 한다. 세월호와 관련된 그림을 그려달라는 요청이 왔을 때 작업실에 유가족을 모셔 놓고 ‘나는 부모님들을 위로하는 그림은 그리지 않겠다’고 말했다. 아마 부모님들이 보기에는 굉장히 가슴 아플 수 있는 그림이다. 하지만 절체절명의 순간에 아이들이 어떤 고통 속에서 죽어갔는지, 그들이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전달하는 것이 내가 해야 될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Q. 그중 걸개그림 ‘세월오월’이 가장 주목을 받았는데, 그림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자면.

세월호 참사 역시 주체는 다르지만 5·18광주민주화운동과 마찬가지로 국가폭력이라고 본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은 권력과 욕망에 눈이 먼 신군부가 민주화를 부르짖던 광주 시민들에게 총과 칼을 겨눈 것이라면, 세월호 참사는 자본주의를 토대로 최소 자본을 투입해 최대 효과를 내려는 자본가들의 천박한 경영방식과 이를 유지하기 위한 세금 탈루와 관료들과의 부정비리, 즉 무능력한 정권과 한국의 자본가들이 함께 만든 국가폭력으로 규정했다. 때문에 똑같은 국가폭력의 연장선 위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영령들이 세월호를 불끈 들어 올리고 희생자들을 위로하는 장면을 담았다. 그리고 참사 전후 정치권력들의 음모와 결국 허수아비에 불과했던 박 전 대통령의 모습을 표현했다.

Q. 세월호 작품을 준비하면서 어떤 점이 가장 힘들었나.

그림을 그리면서 슬픔에 겨워 울었던 적이 한 번 있다. ‘친구와 마지막 셀카’라는 작품을 작업할 때다.  중앙부에 배가 기울은 상황에서 학생들이 어린 아이를 구해주고 있고 하단에는 학생 두명이 함께 마지막으로 셀카를 남기고 있는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자신들이 죽을 걸 알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부모님, 형제, 친구들 등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볼 마지막 모습을 웃으면서 남기는 모습을 그리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그림을 그리는 내내 아주 애통이 터졌다. 이 장면은 언젠가 영화로 만들어야겠다고도 생각했다.

▲ 마지막 숨소리(좌), 친구와 마지막 셀카(우) ©홍성담 화백

Q.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정치풍자 그림으로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오르기도 했는데.

이토록 비도덕적이고 정통성 없는 정권에서 사찰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박근혜 정권은 정말 상상 이상이었다. 상상력으로 먹고사는 예술가인 나보다 훨씬 더한 모습을 보여주니 더 이상 할 말이 없고 대안도 없더라. 다른 건 몰라도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예술 표현의 자유의 영역은 극대화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 정도의 역할을 내가 해낸다면 이 시대를 사는 예술가로서의 의무는 다하는 것 아닐까.

Q. 현재 진행하고 있거나 계획하는 또 다른 세월호 작품이 있나.

그리다가 창고 속에 넣은 그림이 있다. 맹골수도 바닷속에서 아이들이 소풍 나온 것처럼 재밌게 뛰어노는 모습을 담았다. 내 감정이 좀 더 냉정해질 때 다시 그릴 생각이다. 언제가 될지는 나 역시 잘 모르겠다.

▲ 홍성담 화백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Q.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오리무중에 빠졌다. 질문에 대한 답을 굳이 한다면 세월호 침몰 이후 지금까지 책임 있는 권력집단들의 행태를 보면 의도적으로 침몰시켰다고 밖에 이야기할 수 없다. 세월호가 어떤 이유로 침몰됐는지 밝혀지지 않았을뿐더러 자신들의 죄가 드러날까 봐 되레 감추려고 했다. (권력집단들의) 고의 침몰이었다고 생각한다.

Q. 세월호 참사 당시부터 현재까지 그동안의 상황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일단 유가족들이 튼튼하게 잘 버텨줬다. 그리고 국민들이 잘 뒷받침해줬다. 유가족들이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잘 버텨준다면 느리지만 언젠가는 진상규명이 반드시 이뤄질 것이다. 무엇보다 세월호 참사가 대한민국의 문명사적 전환점이 돼야만 한다. 그러지 못하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절망적일 거다.

Q. 5·18광주민주화운동과 세월호 참사를 모두 겪었다. 이런 끊이지 않는 비극적 역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역사의 비극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프랑스가 대혁명 이후 민주주의가 안착되기까지 200여년 가까이 걸렸다. 한국 사람들이 아무리 성격이 급하다고 한들 이런 문제들까지 빨리 해결할 수 있진 않을 거다.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Q. 사실 세월호 참사가 터지고 나서야 사회 곳곳에서 변화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지 않는가.

맞다. 변화를 시스템화하는 것은 정치인들의 몫이다. 문재인 정부를 포함해 정치인들이 지혜를 모아 이러한 변화를 시스템화할 수 있는 지혜를 모으길 바란다.

Q. 지난 1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예술가는 끊임없이 떠돌아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안산에 터를 잡은지 13년짼데, 이곳을 떠나지 않는건 세월호의 영향이 있나.

그렇다. 전라도 출생이기 때문에 경상도에 한 번쯤 살아보고 싶어 2014년 1월에 경주, 울산, 포항 중 한 곳으로 작업실을 옮길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사를 준비하던 중 세월호 참사가 벌어졌다. 이제는 거처를 옮겨도 될 것 같다. 하지만 세월호 그림은 완성해놓고 떠나야 하지 않을까.

Q. 세월호 참사가 본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나는 본래 탐미주의자, 모더니스트였다. 그런데 5·18광주민주화운동이 민중미술의 1세대로 이끌었다. 60대에 접어들면 민중미술을 접고 탐미주의자로 돌아가 그동안 그리지 못한 그림들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가 터지며 이제는 정치풍자 화가가 돼버렸다.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에는 진짜 정치풍자 화가가 없다. 오히려 만평이 훨씬 뛰어나다. 정치풍자화의 정점은 ‘포르노그래피’다. 이왕에 정치풍자 화가라고 불렸으니 포르노그래피로 정점을 찍어보려 한다. 이와 더불어 천박하고 미천하기 그지없는 대한민국의 자본주의를 그림으로 분석하는 게 내게 남은 과제다.

▲ 홍성담 화백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Q. 세월호 참사로 인한 상처를 앞으로 어떻게 치유해나가야 할까.

상처 치유, 즉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고통 속으로 과감하게 걸어가야 한다. 피해서는 안된다. 그러면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 세월호 참사로 영면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희생자들이 차디찬 물속에서 겪은 고통을 우리가 직면, 대면해야 한다.

Q. 세월호 참사를 함께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기억하는 노란리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끊임없는 담론이 필요하다. 그것이 노란리본의 역할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까지는 댓글 정도에 만족했다. 촛불로 새로운 정권을 만들어낸 것에 대해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손을 놔서는 안된다. 각계각층의 노란리본들이 치열한 토론으로 사회적 담론을 만들고 우리가 깨우쳐야 할 화두를 만들어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