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강의전담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산 채로 잡아들여서, 죽을 때까지 퇴직을 윤허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최근 청와대 “국민청원 및 제안 게시판”에 유시민 작가의 청원이 큰 화제다. 요지는 ‘학생 수 감소에 따라 생기는 초등학교의 여유 공간 일부를, 다시 말해서 지금 특활공간으로만 사용하고 있는 교실의 일부를 공공보육시설로 활용할 것을 청원’하는 내용이었다. 이 청원은 2017년 12월 14일 오후 2시 12분 현재 49,435명의 참여를 받고 있고, 지지하는 댓글도 상당수 존재한다. 심지어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의 지지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반대하는 몇몇 청원도 있지만, 이것은 유시민 작가의 인지도에 따른 것이 많고, 지지도 높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유시민 작가를 다시 장관으로 기용해야 된다는 청원까지 올라왔다. 그 청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 유시민 작가는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거나, 대중을 위한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청원한 내용을 자기가 제일 잘 해결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무매몽지한 대중들을 선동하여, 다른 사람에게 그 어려움을 처리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유시민 작가는 지난 참여정부에서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하여, 그 능력도 이미 인정받았습니다. 또한 요즘에는 각종 예능 방송에 출연함으로서, 대중들의 인지도도 여타 허접한 정치인, 국회의원들보다 월등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보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들을 위해 생각하고, 살아오고, 행동해왔습니다. -(중략)- 산 채로 잡아들여서죽을 때까지 퇴직을 윤허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댓글도 만만치 않다. ‘삼고초려’, ‘답답너뛰(“답답하면 네가 뛰어라!”라는 뜻으로 보인다. 필자 주.)’, 심지어 ‘거부하면 곤장 50대가 마땅한 줄 아뢰오.’ 등 살벌한(?) 댓글도 등장하고 있다. 아! 이 얼마나 흥이 많은 사람들인가!

위의 청원문에서 밑줄 친 부분을 본 순간 생각난 인물이 있었다. 바로 우리나라 최고의 명재상으로 꼽히는 황희(黃喜, 1363~1452)였다. 황희는 널리 알려진대로 명재상이자 청백리의 대표 인물이다.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 한 사람의 아랫사람이며 많은 사람의 윗사람이라는 뜻으로, 한 나라의 재상을 뜻함. 필자 주.)인 영의정임에도 비가 새는 집에서 거친 밥을 먹었고, 집에는 몇 권의 책과 거적 한 장 깔려있었다는 것은 황희의 청렴한 모습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한 일찍부터 조선 초기 명 장수이며 충신의 상징으로 꼽히는 김종서를 눈여겨보고, 그의 급한 성격을 고치기 위해 노력했다는 일화는 그의 사람의 능력을 알아보는 능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김종서를 발탁해서 4군과 6진을 개척하는 등 국방을 강화하고 국경을 넓히고 확정짓는 일도 황희의 주도 아래 있었다. 또한 뽕나무 심기를 장려하고 개량된 종자를 보급해서 농업 발전에도 기여했고, 천첩(賤妾) 소생의 천역(賤役)도 면제해 주었다. 이에 비해 ‘네 말도 옳다, 네 말도 옳다.’라는 일화로 대표되는 소통과 관용의 리더십, 양녕대군의 폐위를 끝까지 반대하다가 귀양을 가는 모습에서 나타나는 소신과 원칙을 중요시 여기는 모습도 확인된다. 이러한 넓은 스펙트럼은 그가 조선 최장수 재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많이 밝혀졌지만 황희가 처음부터 청백리는 아니었다. 대사헌 시절 뇌물 수수 때문에 “황금대사헌(黃金大司憲)”이라는 비난을 받을 정도였고, 스스로 대사헌 직에서 사직을 요청했다. 이 과정에서 사관(史官)은 종을 죽이고 그 시체를 은폐한 박포의 아내를 숨겨주고, 그녀와 간통을 했다는 것도 기록하였다. 그리고 황희가 아버지와 장인에게 물려받은 노비가 많지 않은데, 실제 그의 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이상하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황희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청백리로 거듭난 것인지, 아니면 실제 청백리가 아니었는데 “청백리의 신화”로 만들어진 인물인지 여부는 조금 더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인물됨이나 업무 능력을 엿볼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것은 그가 태종~세종대까지 최장수 재상이었다는 것이 아닐까? 수차례 나이와 병을 이유로 사직을 요청했으나, 태종은 어의를 보내서 병을 치료시키고 복직시켰고, 세종은 그의 사직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요즈음 사람들은 이것을 세종의 노동착취 사례로 제시하는 경우도 있다. 어느 블로거가 정리한 황희가 사직을 요청했을 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기록들을 제시한다.

세종 13년 (1431년) 9월 10일 황희가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
세종 14년 4월 20일 황희가 고령을 이유로 사직하자 허락하지 않다
세종 14년 12월 7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하니, 윤허하지 아니하다
세종 17년 3월 29일 영의정부사 황희가 전을 올려 노쇠함으로 사직하기를 청하니 이를 허락치 않다
세종 18년 6월 2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하나 윤허하지 아니하다
세종 20년 11월 19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을 청하니 허락치 않다
세종 21년 6월 11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할 것을 청하다
세종 21년 6월 12일 황희의 사직을 반대하다
세종 22년 12월 21일 영의정부사 황희가 자신의 파면을 아뢰다
세종 25년 12월 4일 영의정 황희가 연로함을 이유로 해면을 청하나 듣지 않다

마지막으로 청와대의 국민청원 및 제안 게시판에 대하여 언급한다. 유시민 작가 스스로도 청원글에 ‘대통령, 국무총리, 청와대 참모들을 많이 알지만 직접 청원하는 것이 낫겠다.’고 적었다. 대의 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의 가장 이상적이 형태라고 주장하는 일부 국회의원이 있는데, 대의 민주주의도 완벽한 제도는 아니다. 또한 대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했다면, 국정농단, 사자방 비리 등 각종 문제들은 왜 생겼는가? 대의 민주주의와 직접 민주주의가 서로의 장단점을 보완하는 시스템으로 청와대의 국민청원 및 제안 게시판은 잘 작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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