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소연 칼럼니스트
▷성우, 방송 MC, 수필가
▷저서 <안소연의 MC되는 법> <안소연의 성우 되는 법>

입시철을 맞아, 나의 고3 겨울로 잠시 되돌아가볼까 한다. 몸도 마음도 몹시 추웠던, 처음으로 운명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던 30년 전 그때로.

1986년 겨울, 점쟁이는 ‘이 아이가 사람을 몰고 다니는 운이라 어디에 원서를 넣어도 떨어질 거’라고 예언을 했다. 그깟 운명론에 굴한 것은 아니지만 정말이지 공부가 싫어서 재수만은 피하고 싶었던 나는 엄청난 하향 안전 지원을 했다. 그런데도! 그 해 유독 내가 지원한 학과에만 벌떼처럼 학생이 몰려 그만 똑 떨어지고 말았다.

서로의 절망을 숨긴 채, 엄마와 나는 짧은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목적지는 당시 아빠가 근무하고 계시던 춘천. 물론 참가자 전원에게 내키지 않는 여행이었지만 그때의 우리에겐 뭐랄까.... 의식이 필요했다. 고3과 재수라는, 전혀 다를 바 없으나 엄청나게 달라 보이는 두 시간 사이에 찍어야만 할 마침표 같은 것. 그렇게 선택된 것이 바로 그 여행이었다. 당초에는 대입 축하 여행으로 계획되었던.

집에 한 대뿐인 차는 아빠가 춘천으로 가지고 가 계셨으므로 엄마와 나는 청량리역에 가서 경춘선을 타기 위해 버스를 탔다.

‘아, 이 여행에서 돌아오면 재수생이 돼야한단 말이지... 한심하다... 아, 끔찍해...’

한숨을 내쉬며 무심히 차창 밖을 내다보는데 고궁 담벼락을 낀 보도 위에 아! 그 애가 있었다.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정식으로 데이트란 걸 했던(딱 한 달 반이었다), 처음으로 손을 잡고 길을 걸었던(그 애 집 앞 횡단보도를 뛰어 건넜던 3초쯤이었다), 십대 후반 내내 마음속에 걸어두었던 아이.

재수생이 된 나와 달리 그 애는 명문 S대에 입학이 결정된 상태였다. 그래서일까? 푹 썩은 나와 달리 그 애의 얼굴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추운 겨울아침, 찬바람 부는 거리에서 이를 다 드러내고 활짝 웃고 있는 그 애... 아, 합격의 기쁨만은 아니었다. 그 애 곁에는 긴 생머리의 여자아이가 있었다. 손을 맞잡고 다정히 걷고 있는...

나는 그 날 그 순간 그 자리에서 그 아이들을 본 것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 Ⓒ게티이미지뱅크

원래는 평범한 교회 친구였던 그 애와 내가 한 달여의 짧은 데이트를 했던 건 고1 겨울방학 무렵이었다.

몹시 엄한 부모님 밑에서 자라던 나의 ‘그 애’는 집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방학 동안 학교에서 하는 보충수업을 신청했다. 나 역시 공부할 맘도 없으면서 그 애 학교 앞에 있는 독서실을 끊고는 날마다 그 애의 보충수업이 끝나는 12시를 기다렸다.

그 애의 귀가 시간인 오후 2시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끽해야 한 시간 반. 낡고 추운 분식점에서 점심을 먹고 버스 정류장까지 있는 힘껏 천천히 걸어가는 게 다인 단조로운 데이트였지만 그것은 내게 매일 매일의 찬란한 축제였다.

그렇게 꿈결 같은 한 달이 가고 마지막 보충수업이 있던 날. 무슨 일인지 나타날 시각이 한참 지났는데도 그 애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저 여자 아이는 뭔가, 호기심 가득한 시선의 쓰나미를 낯 뜨겁게 견디고 견디고... 뭉텅이로 쏟아져 나오던 사내아이들의 숫자가 점점 줄어 더 이상 아무도 지나가지 않게 될 때까지 기다렸건만... 그날 그 애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몇 달 뒤, 그 애의 친구로부터 이런 얘길 전해 들었다.

문제의 마지막 보충수업 전날, 누군가 내 이름을 대고 그 애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단다. 엄격하신 그 애의 어머닌 여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기함을 하셨고 급기야 아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 강경책을 쓰게 되었던 거라고.

하지만 그 누가 뭐라고 대신 변명을 해준대도 그 아이는 나와 계속 갈 마음이 없었던 거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든 연락을 취해 사과하고 모든 걸 원 상태로 돌려놓았을 테니까. 그 아이는 미안한 표정으로 멀찍이서 나를 바라본 것 외엔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 믿음을 확인 시켜준 것이 바로 그날, 그 아이 옆에 있던 긴 생머리의 여자아이다. 같은 교회에 다녔던 1년 후배 여자아이... 그때 내 이름을 팔아 전화를 건 것이 그 여자아이일 거라고 내가 의심해왔던...

나는 이 글을 써내려가면서 30년이나 지난 그때의 일을, 그 아이에 대한 내 마음을 여전히 중언부언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상당히 놀랐다. 아, 아직도 그때 일로 이토록 마음이 어지럽고 아플 수 있다니.

아마도 그건 어린 소년 소녀의 풋사랑이란 감정을 넘어 우리 사회에서 대학, 혹은 학벌이라는 것이 가지는 과도한 의미들이 덧씌워져서가 아닐까? 그 아이에 대한 쓸데 없는 집착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재수 따위 하지도 않았을 거고, 재수까지 하고도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하는 일도 없었을 거고, 그 이후의 모든 일들이 어쩌면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만약에... 게임’ 같은 것.

하지만 알고 있다. ‘만약에... 게임’은 바보들이나 하는 거라는 걸.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날 이후의 몇 년간 세월이 어찌되었든 지금의 나는 지금의 내가 참 좋다. 내가 처한 상황, 위치, 역할... 그런 모든 것들이.

그러니 아무런 통보도 없이 나를 ‘팽’한 그 애를 이제는 용서하기로 한다. 어쨌든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게 한 하나의 통과 지점이 되어준 고마운 사람인 걸로, 그렇게 정리하자고.

다만 아물지 않은 채, 그냥 묻어두고 살아 온 상처가 내게 있었다는 사실만은 많이 놀랍다. 인생이 원래 그런 건지, 오로지 나라는 사람의 옹졸함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