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영방송 초토화·블랙리스트 작성 의혹

▲ 지난 10월 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KBS·MBC 공동파업승리 결의대회' ⓒ뉴시스

드러난 국정원 언론장악 시나리오
블랙·화이트리스트로 연예인 압박

최종 시나리오 작성자는 MB?
이동관-김재철 연결고리 주목

【투데이신문 남정호 기자】 2008년 8월 8일 KBS이사회에서 해임된 정연주 당시 KBS 사장은 경찰이 둘러싼 KBS를 초라히 떠났다. 뒤이어 2010년 2월에는 버티던 엄기영 전 MBC 사장도 자진 사퇴했다.

MB정부 하에 진행됐던 공영방송 장악은 그렇게 시작됐다. MB정부의 공영방송 장악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화이트리스트 작성은 2008년 광우병 파동과 대규모 촛불집회와 관련 깊다.

MB정부 초기 최대 위기였던 광우병 파동 당시 MBC PD수첩은 미국산 소고기의 광우병 위험성에 대해 보도했다. 이는 시민사회를 큰 파장을 남기며 대규모 촛불집회로 이어졌다. 결국 이 전 대통령은 두 차례에 걸쳐 국민에게 고개를 숙이고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취임 초기부터 정권이 흔들릴만한 거대 위기를 겪은 MB정부는 방송과 문화예술계 관리에 나섰다. 광우병 파동으로 좌파로 분류된 방송프로그램과 기자, PD, 문화예술계 인사들을 ‘건전 성향’ 인물들로 대체하겠다는 게 이 사업의 목적이었다.

그렇게 MB정부부터 시작해 박근혜 정부까지 9년여간 이어져온 공영방송 장악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의 서막이 올랐다.

좌편향 인물 퇴출시켜라

지난 9월 국정원 적폐청산TF는 MB정부 시절 국정원에서 작성된 언론장악 문건을 전달받아 국정원이 공영방송을 장악하기 위해 PD와 기자 등을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관리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2010년 3월과 6월에 각각 만들어진 ‘MBC 정상화 전략 및 추진 방안’과 ‘KBS 조직개편 이후 인적쇄신 추진방안’ 문건에는 MBC와 KBS에 좌편향 인물의 퇴출과 인적쇄신, 노조 무력화 등 원세훈 전 국정원장 당시 국정원이 공영방송 경영에 개입한 정황이 담겨있다.

해당 문건에서 밝혀진 국정원의 공영방송 장악 시나리오는 치밀했다.

국정원은 MBC에 대해 신임 사장 취임을 계기로 노영(勞營)방송의 잔재를 청산하고, 고강도 인적쇄신을 통해 편파프로그램의 퇴출에 맞춰 근본적인 체질개선을 추진했다.

그들은 당시 MBC가 좌파세력에 영합하는 편파보도로 여론을 호도해 국론분열에 앞장서고 있으며, 좌편향 출연자들을 편중 섭외하고 왜곡보도 하는 악순환에 빠져있다고 진단했다.

이를 타계하게 위한 방법으로 국정원은 △지방MBC와 자회사 사장단의 재신임 여부를 검토해 노조 배후인물과 전임사장 인맥 일소 △제작 보도 편성본부 국장급 간부 전원을 교체하고 건전성향의 인사 전진배치 등을 제시했다.

KBS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국정원은 KBS에도 사원행동 가담자, 언론노조 KBS본부 조합원, 편파방송 전력자를 배제하라고 주문했다.

▲ 지난 10월 28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정문 앞에서 배우 문성근과 방송인 김미화 등이 MB정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국가배상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

좌파로 낙인찍힌 인사들

이와 함께 MB정부는 광우병 파동과 촛불집회에서 확인한 정권에 비판적인 문화예술계 연예인들을 블랙리스트로 낙인찍고 배제시켰다.

당시 촛불집회에 참여하거나 비판적인 발언을 한 이외수, 문성근, 김미화, 김규리(개명 전 김민선) 등 총 82명의 문화예술인·연예인들이 MB정권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정권을 비판하는 이들 인사들의 파급력 차단이 목표였다.

적폐청산TF에 따르면 2009년 7월 MB정부 당시 국정원은 ‘좌파 연예인 대응 TF’를 꾸렸다. 해당 TF의 목적은 정권에 비판적인 연예인들을 좌파로 낙인찍고 블랙리스트를 만드는 것이었다. 국정원은 이를 토대로 해당 연예인들을 배제하기 위해 소속사 세무조사, 프로그램 편성 관계자 인사 조치 유도 등 전방위적인 퇴출 압박을 벌였다.

또 국정원은 블랙리스트에 오른 인사들에 대해 철저한 공작에 나섰다. 대표적으로 문성근, 김여진씨의 합성 나체 사진을 만들어 극우 인터넷사이트에 유포시켰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노제 사회를 본 김제동씨는 각종 외압에 시달렸고 그의 소속사는 2009년과 2011년 두 차례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받기도 했다.

이 같은 블랙리스트에 대한 탄압과 함께 MB정부는 이른바 ‘건전 성향’의 연예인들을 육성하기 위한 화이트리스트도 꾸렸다.

2010년말 국정원에서 생산된 ‘연예계 좌파실태 및 순환 방안’이라는 보고서에는 친정부 성향의 연예인을 육성하려는 계획이 들어있었다.

해당 보고서에는 일부 연예인들의 실명과 함께 이들을 중심으로 우파 연예인을 양성, 조직해야 한다며 이들을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정부나 공공기관 공익 광고에 우선 섭외하는 등 지원 방안이 제안돼 있다.

이렇듯 MB정부는 정권에 대한 쓴소리를 막기 위해 힘썼다. 정권에 비판 목소리를 내는 방송과 언론인, 인사들을 배제하기 위해 좌파라는 낙인이 사용됐다. 좌파로 분류된 이들의 목소리를 반정부적이라 규정하고 이를 지우기 위해 정권이 앞장서 공영방송과 민간인에 대한 공작을 벌여온 것이다.

▲ 지난 10월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한 김재철 전 MBC 사장이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시스

“MB, 다 책임져야”

MB정부의 공영방송 장악 사건에 대해 검찰은 지난 10월 30일 김재철 전 MBC 사장과 백종문 부사장, 전영배 전 기획조정실장 등 3명의 주거지와 당시 MBC 담당 국정원 직원과 방송문화진흥회 사무실 등을 압수수색하며 수사를 이어가고 있다.

또한 당시 블랙리스트로 인해 피해를 입었던 MBC 최승호 사장, 한학수 전 PD수첩 PD 등 언론인과 김미화·문성근씨 등 문화예술계 연예인들을 참고인으로 불러 조사하기도 했다.

최승호 사장은 검찰에 출석한 자리에서 “최종 시나리오의 작성자는 결국 이명박 전 대통령일 수밖에 없다”며 “대통령의 지시가 아니면 어떻게 공영 방송에 그렇게 할 수 있었겠냐. 이 전 대통령이 다 책임져야한다”고 강조했다.

검찰은 김 전 사장이 국정원의 ‘MBC 정상화 전략 및 추진방안’ 문건에 작성된 로드맵을 받아들여 정부 비판적인 프로그램에 대해 제작진과 진행자, 출연진 등의 교체 및 방영 보류, 제작 중단 등을 주도했고, 노조 운영에 개입한 혐의가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11월 10일 김 전 사장에 대한 검찰의 구속영장이 기각되면서 검찰의 수사는 어려움에 봉착했다.

현재 검찰은 김 전 사장과 이동관 전 청와대 홍보수석의 ‘부적절한 만남’을 의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김 전 사장이 청와대에서 식사비를 대접한 횟수가 93차례에 이르고 김 전 사장의 운전기사가 ‘청와대 관계자들과 만나 PD수첩 등 대책을 논의했다’고 진술한 점 등을 근거로 청와대가 공영방송 장악에 개입한 정황을 파악하고 수사력을 모으고 있다.

이처럼 검찰이 공영방송 장악과 문화예술계 연예인 블랙리스트와 관련해 청와대 인사들의 개입을 들여다보고 있는 상황에서 이 전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길이 발견될지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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