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철학박사▸ 서울대학교 연구원

칼럼 첫 회부터 독자들에게 소위 ‘공부 잘 하는 비결’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어린 시절 필자는 주간학습지를 정기 구독해서 공부를 했었다. 그 주간학습지의 사은품 가운데 공부 잘 하는 방법을 내용으로 하는 만화책이 있었다. 공부 잘 하는 방법을 만화로 가르쳐준다고 하니, 인제 중학생이 된 나에게는 딱 맞는 공부 방법 전수였다. 물론 방법만 전수 받고 이것 역시 제대로 실천은 못했고, 그 학습지도 밀려서 부모님께 매타작을 받기 일쑤였다.

이 만화 속에서 눈길을 끄는 그림이 하나 있었는데, 그 그림은 대략 ‘공부 잘하는 아이의 방에는 참고서는 적고 사전과 공책이 많다.’는 것이었다. 아마 풀이 방법과 답안만을 제공하는 참고서보다는 사전을 찾으면서 스스로 공부하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중학생이 된 나에게는 작은 영어사전이나 옥편(玉篇)에서 단어나 글자의 뜻을 찾는 것은 귀찮고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 영어의 전치사나 한자 가운데 여러 가지 뜻이 있는 글자의 경우 한 단어, 한 글자가 사전 분량 중 몇 장을 차지하는 경우도 많았다. 어린 나에게는 사전을 보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내가 사전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즐기기 시작한 것은 대학원에 진학해서였다. 영문 논문을 보면서, 그리고 한문 고전을 보면서 영어 한 단어, 한문 한 글자가 가진 다양한 뜻을 적용해보고 적합한 뜻을 찾아서 문장 전체를 해석해내고, 단어나 글자가 가진 뉘앙스를 파악하는 것은 느리고 힘들긴 하지만, 마치 퍼즐을 맞추는 것 같은 즐거움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나의 좁은 학문 범위가 조금은 넓고 풍성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사전(辭典, dictionary)의 정의는 ‘단어를 알파벳순·가나다순 등 일정한 순서에 따라 정리 배열하고 그 표기법·발음·품사·의미·용법·용례·어원 등을 설명한 책’이다. 사전이 처음 생겼을 때, 여러 의미 가운데 만든 기관과 사람의 주관에 맞는 뜻만 썼고, 그 결과 언어의 고정화(固定化)에 협력했다고 한다. 이후 사전은 단어의 본질이나 발달을 무시한 이와 같은 주관적인 태도는 쇠퇴하고, 사전은 일부 사람이 좋다고 생각하는 어휘만을 수록하는 것이 아니라 일찍이 사용하였고 현재 사용되고 있는 모든 어휘를 기록해야 하며, 그것도 단순한 기록이 아닌 역사적 변천과정을 조사하여 밝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압도하게 되었다. 그 결과 사전은 단순히 단어나 글자의 뜻 몇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닌 한 단어와 글자의 거의 모든 의미와 그 단어가 형성되고 발달한 과정까지 수록하게 되었다.

사전을 찾는 것은 한 단어나 글자의 뜻을 비롯한 그 단어나 글자의 역사, 맥락을 모두 아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사용하는 글자와 단어 하나하나는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단어나 글자는 모두 나름의 맥락과 의미를 가지고 생겨났으며, 사용되는 것 역시 그러한 맥락과 의미에 부합되게 사용되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떤 단어가 무슨 뜻인지, 어떤 의미와 맥락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고, 특히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단어를 독점하려는 경우도 있는 듯하다. 예를 들어서 기독교(基督敎)라는 단어에서 ‘기독(基督)’은 ‘그리스도’의 음역어이다. ‘그리스도’는 ‘머리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며, 이것은 ‘구세주’라는 뜻이다. 결국 ‘기독교’라는 단어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는 종교’를 뜻할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라는 단어는 개신교의 전유물이 되었고, 천주교에서는 한사코 ‘기독교’라는 말 대신 ‘그리스도교’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 결과 ‘기독교=개신교, 천주교는 그냥 천주교’라는 인식이 생겼고, 천주교가 마치 새로운 종교인 양 인식될 우려까지 낳게 되었다. 결국 둘 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는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여기에는 ‘정통 기독교’의 자리를 놓고 서로가 서로를 일정 부분 부정하고 배타하며, ‘기독교 내부’에서 정통성을 주장하고자 하는 의도가 들어있지 않은가 생각된다.

사전을 찾는 것은 단순하게는 어떤 단어나 글자의 뜻을 찾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그 단어나 글자가 가진 역사와 맥락을 탐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그 단어나 글자의 의미, 그리고 이러한 탐구의 과정을 스스로의 머리와 몸에 배게 하는 것이다. 즉 사전 하나 찾는 것이 자신의 행동까지 바꿀 수 있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지난 4월 1일, 한 사립대학교의 일부 학생들이 욱일승천기(旭日昇天旗)와 유사한 문양을 배경으로 ‘하일(heil - ’만세‘라는 뜻의 독일어) 히틀러’를 외치면서 하는 나치식 거수경례를 한 사진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올려서 큰 논란이 되었다. 그 학생들이 욱일승천기가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이며, 거수경례가 독일 나치의 인사법이라는 것, 그리고 그 일본 군국주의와 나치가 의미하는 것을 알았다면 그러한 사진을 올렸을까? 그 학생들이 사전 찾기나 인터넷 검색이라도 한 번이라도 했으면 그런 사진을 올렸을까? 결국 사진 속의, 그리고 사진 찍고 편집한 학생들 스스로가 자신의 수준을 만방에 과시한 사건인 동시에, 우리나라의 교육과 일부 대학생들의 교양 수준을 보여준 씁쓸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것 모르는 것이 무슨 큰 문제인가?’라고 묻는 분이 계신다면, 그 사진을 프랑스 사람에게 보여주고 반응을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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