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현 칼럼니스트
▲ 김종현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김종현 칼럼니스트】 머리를 기른 적이 있었다. 적당히 조금 기른 게 아니라 아주 많이, 등을 반절 이상 덮을 만큼 길러서 묶고 다녔다. 20대 청년 시절이다.

내 머리는 곱슬이라서 서부영화 속의 황야를 굴러다니는 마른 덤불 같았다. 친구들로부터 자주 놀림감이 됐다. 친구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몰랐지만, 여러 종류의 조롱과 비하가 곱슬머리에 쏟아졌다. 외모에 관심 많던 청소년기엔 말 안 듣는 머리카락을 적잖이 원망했다. 성인이 되고 나서 한을 풀 듯 머리를 왕창 기르고, 스트레이트 파마를 했다. 가끔은 묶은 머리가 불편해서 풀 때도 있었다. 원체 강한 곱슬이라 그럴 땐 영락없이 파마 한 머리 같았다. 야성적인 남자로 보일 거라는 주관적 감상과는 달리, 당시엔 깡마르고 체구도 작아서 뒤에서 보면 영락없이 키 큰 여자였다.

어느 날 밤, 여자친구를 집에 데려다 주는 길에 술집 앞에서 웬 취한 남자가 우리에게 집적댄 적이 있다. 그 남자는 나도 여자로 생각했는지 함께 술을 마시자고 질척거리려는 중이었다. 그 순간 내가 앞으로 나서며 막아섰다. 술집의 환한 조명에 내 얼굴이 또렷이 드러났다. 여기서 잠깐. 이 글에 함께 실린 내 얼굴 사진을 잠시 보고 오시길 바란다.

그 남자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이내 비실비실 웃으며 사과했다. 취기가 섞인 그의 사과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으레 여자한테 하듯 건들거렸다. 무시당하는 느낌이었다. 그 때의 감정은 이전까지 내가 남자들의 세계에서 남자로서 대접 받을 때와 달랐다.

언젠가 겨울,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난 긴 코트에 머리를 풀고 있었다. 휴대전화가 보편화 되기 전이었는데, 도중에 약속장소를 찾기 어려워 공중전화를 쓰게 됐다.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가 문을 닫고 수화기 너머로 신호음이 가려는 찰나. 누군가 뒤에서 공중전화 부스를 힘껏 발길질 했다. 명백히 감정이 실렸음을 느꼈다. 뒤를 홱 돌아보며 문을 열었다. 웬 퉁퉁한 남자가 거만한 자세로 서서 빨리 나오라는 입모양을 막 하려는 참이었다. , 다시 한번 내 얼굴 사진을 보고 오시라.

그 남자는 눈이 마주치자 마자 , 죄송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급히 공손한 표정이 되었다. 내가 무슨 짓이냐는 말을 채 하기도 전이었다.

가장 복잡한 심정이 들었던 건 밤 늦게 좌석버스를 타고 집에 가던 때였다. 그날따라 피곤했기 때문에 눈을 감고 자고 싶은데 버스 안 밝은 조명이 성가셨다. 머리를 풀고 고개를 숙여서 커튼처럼 빛을 차단했다. 내 얼굴도 완벽히 가려졌다. 한참동안 맥없이 목을 흔들거리며 가고 있는데 어느 정류장에선가 내 옆에 남자승객이 앉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의 허벅지가 내 허벅지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 커튼 속에서 눈을 떠 내려다보니 그의 다리가 묘한 간격으로 밀착돼 있다.

이번에도 겨울이었고, 두툼한 외투 아래 달라붙는 청바지 속 깡마른 나의 다리는 여자 다리로 보였을 터.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커튼을 걷고 얼굴을 보여주며 뭐라고 한마디 할까? 이 남자의 접촉은 정말 의도적인가? 생각 없이 하체에 힘을 푼 거라면 불필요한 싸움이 될지도 모른다. 내가 다리를 오므릴까? 가만,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몸을 움츠려야 하지? 그냥 조용히 남자 목소리로 ‘XX’이라고 말하고 시비를 붙일까 말까. 내가 지나치게 예민한 걸 수도, 그냥 두기엔 불의를 참는 것일 수도 있었다. 상황의 실체를 모르는 그 짧은 순간의 고민과 갈등 속에 생각보다 입은 재빨리 떨어지지 않았다.

20대의 나는 언제나 자랑스레 남성으로서의 호기를 부리며 살았다. 하지만 수많은 생각의 가지가 뻗는 그 순간엔 대번에 반응하지 못했다. 그 때의 심경은 직접 겪기 전엔 모른다. 마땅히 화를 내야 하는 순간에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고, 그러면서 내가 대체 왜 이러고 있나 싶어 스스로 당혹스럽다.

간혹 성폭력 피해자에게 사람들이 쉽게 하는 말 중에 실소가 나오는 게 있다. “당하지만 말고 싸워요.”, “문제가 있는 남자와는 얼른 헤어지세요.”, “왜 그 때 저항하지 않았어?”, “제대로 대응했어야지.”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상황이 닥치면 테스토스테론이 흘러 넘치는 얼굴과 성정을 가지고도 어찌해야 할지 머릿속이 얼어붙는 경우가 있다. 사람 사이에는 그 밖에 넘쳐나는 수많은 고려들이 있고, 인간은 저마다 역치와 능력치가 다르다. 그 때의 경험 이후로 위와 같은 말을 하지 않는다.

나는 그나마 우리사회가 보장해 주는 남성적 위계에 기대 상황을 물리적으로 풀 수 있는 배경이라도 있었다. 그 배경은 모든 남자들 사이에서 일종의 공유 코드와 같다. 폭력으로 번지기 전에 서로 무리하지 않는다는 묵계다. 그러나 그러한 활로가 없는 여성들의 분노는 세상에 대한 배반감과 좌절감으로 고착화 될 수 밖에 없었으리란 걸 알게 됐다. 특히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직장과 조직에서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을 때 여성이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근래에 서지현 검사가 자신이 겪은 검찰 내 성희롱 문제를 폭로했다. 한 장례식장에서 안태근 전 법무부 감찰국장이 그의 몸에 손을 댔다고 주장했다. 사건이 있은 지 8년이나 지났지만, 그 시간 동안 잊혀질 수 없는 경험이었다는 증거다. 대한민국 최고 권력기관에 다니는 현직 검사마저 여성이 겪는 좌절에 예외 없음을 보여준다.

이는 비단 여성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같은 양상은 남성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남자들은 남자답다라는 하나의 틀 안에 자신을 욱여넣길 강요당한다. 강요된 남성성에 복무하여 계급 상승을 꾀하면서 획일화 된 남성상을 흉내 낸다. 그 하위에 남자가 여자를 어떻게 대해야 남자들의 세계에서 추앙 받는지에 대한 매뉴얼이 존재한다. 남자들은 친구와 선배들로부터 보다 많은 여성과 교제하고, 보다 많은 성경험을 하고, 보다 과감하게 여성을 복종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숱하게 듣는다.

직장에서 이런 기조는 상명하복과 유능함으로 포장된다. “역시 남자답게 군말없이 일처리 시원하네”, “사회생활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남자가 쪼잔하게등이다. 이런 언어 속에선 개인은 사라지고 오로지 가상의 남성만이 존재한다. 거기에 미달할 때 사내 녀석이라는 말로 기준에 맞추지 못하는 자신을 열패감의 늪에 빠트린다. 이른바 남성 위주의 세상은 숱한 남성들에게도 올무가 되어 살 속을 파고 든다. 머리를 기르고 다니던 시절 불쾌했던 남자들에게 제 때 화를 내지 못했던 게 내내 기억에 남는 것에는, 당시에 강한 남성성을 가진 남자인 내가 제대로 대우 받지 못했던 불만 또한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더 따지고 들어가보면 우리사회가 여성들을 낮은 존재로 비하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가혹한 환경이 근본 원인이다. 개인이 개인으로 대우 받지 못하고 특정한 여성/남성의 상을 강요 받는 게 당연시 되기에 벌어지는 일들이다. 20대의 내가 머리를 길러서 거친 표상을 구현하려 했던 것은, 강한 남성상을 갈구하던 끝에 나온 코스프레였다. 나는 부드럽게 흔들거리는 남자인 나를 주체로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놀림감이 될 만한 비표준이라는 강요에 어느새 순응하여 나의 곱슬머리를 원망했던 것처럼.

술 집 앞에서 별거 아니란 투로 사과하던 남자의 풀어진 얼굴 위로 흐르던 웃음기는 매우 견고한 벽이었다. 그 술 취한 남자에게, 전화 부스 앞에 있던 남자에게, 버스 옆 자리 승객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왜 여자라고 해서 함부로 대합니까?”

지나고 나서 한참 뒤 돌이켜 보았더니 그 때 그러지 못했던 게 늘 짐처럼 남았다. 그 때 더 당당했어야 했고, 그 때 더 똑바로 말했어야 했다. 어느 순간이 되자 그러지 못했던 자신을 책망하기에 이르렀다. 겨우 몇번의 경험으로도 이렇다. 그러니 이런 사건들이 일상화 된 세상에서 살고 있는 여성들에겐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 자체가 감정의 감옥일 수 있다. 긴 시간 동안 피해 당사자는 자신을 향해 풀어지지 않는 살풀이를 해야 한다. 내가 잘못한 걸까, 그 때 왜 당당하게 말하지 못했을까. 나도 결국 별 수 없는 사람인가. 다는 모르겠지만 서검사의 8년은 그렇게 흘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감정의 감옥에선 자신을 불행하게 여기고 나아가 스스로에게 미안해 하고, 모든 잘못이 당당하지 못했던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여기게 되는 삶이 이어진다. 자괴감이 뒤덮는 일상을 상식으로 여기는 세상에서, 자신을 스스로 불행하게 만든 사람으로 보지 않으려는 노력은 한 개인에게 쉽게 주문하기 힘들다. 비뚤어져 있는 세상에서 남녀를 떠나 모두가 모두에게 힘이 되어주어야 한다.

미국영화 ‘G.I. JANE(1997)’은 미 해군 특수부대 훈련을 통과하는 한 여성의 고군분투를 그린다. 주인공인 데미 무어는 남자들의 시각으로 가득 찬 세계를 저항하며 헤쳐 나가 결국 한 명의 특수부대원으로서 우뚝 선다. 영화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야생동물은 스스로를 동정하지 않는다. 동사해 가지에서 떨어지는 새 조차도 자신을 동정하지 않는다.”

이 대사는 D. H. 로렌스의 자기연민(Self-pity)’이라는 시에서 따왔다. 동정 보다는 가엾게 여긴다혹은 딱하게 여긴다는 뜻이 문맥상 더 잘 어울릴 듯하다. 자신을 끊임없이 위축시키도록 만드는 이 시대의 우리가 서로를 향한 응원의 말로 쓸 수 있지 싶다.

Self-pity

I never saw a wild thing 
sorry for itself. 
A small bird will drop frozen dead from a bough
without ever having felt sorry for itself.

<D. H. Law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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