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현 칼럼니스트
▲김종현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김종현 칼럼니스트】 일반적으로 금융서비스업이나 IT서비스업 등은 제조업에 비해 투자비용이 적게 든다고 말한다. 제조업은 때때로 수천억원 이상의 생산설비를 갖추고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서비스업은 적당한 사무공간과 컴퓨터 그리고 직원들만 있으면 된다고들 말한다.

사람의 가치가 돈으로 환산되는 시대다. 그리고 대부분 그 가격은 낮게 책정된다. 여기엔 물질과 인간을 자본이라는 하나의 기준으로 평가하는 자본주의 특유의 셈법이 존재한다. 다분히 씁쓸한 이야기다. 그런데 사람을 비용으로 바라보더라도 한 사람에게 매겨지는 비용이 낮다고 인식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일을 할 수 있는 성인 한 명을 길러내는 데에는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의 2017년 발표에 따르면, 한 사람을 대학 졸업 때까지 양육하는 비용이 교육비 포함 최대 3억원 이상이다. 최소로 해도 1억원이다. 물론 이건 가계당 들이는 비용이고, 아이가 성장하면서 이용하게 될 등하굣길의 도로, 대중교통, 전기, 학교와 같은 공공재에 들이는 비용들을 더하면 투자비용의 규모는 더욱 커진다.

이 뿐만이 아니다. 학생들은 다양한 인격을 지닌 여러 친구들과 한 데 모여 인간관계를 배운다. 그 경험에서 얻는 무형의 것들은 훗날 사회적 자본으로 작용한다. 경험에 필요한 시간도 비용이라면 비용이다. 또한 사회가 역사를 켜켜이 쌓으며 보여주는 여러 양태들의 목격은 무형의 교육이 되곤 하는데, 그 마디마디에 들어가는 사회적 비용 또한 상당히 크다.

이러한 유무형의 총합이 한 사회의 유지와 번영을 이루기 위해 한 사람에게 들이는 총 투자비용이다. 한 명의 성인은 부모세대의 성장기간을 포함해 그가 태어나기 최소한 30년 전에 시작된 산물이다. 과연 설비 투자비용 보다 사람에 대한 투자비용이 적다고 할 수 있을까. 세상일은 결국 사람의 일, 사회현상을 정량적으로 판단하려면 눈에 보이는 숫자 뒤의 보이지 않는 더 많은 항목들이 필요하다.

평창 동계올림픽이 끝났다. 이 국가적인 이벤트의 손익계산서를 두고 다양한 평가가 오간다. 간단히 말하자면 흑자냐 적자냐다. 인프라 투자비용은 회수 가능한가, 무엇이 수익이고 무엇이 투자인가 등에 이견들이 있다.

게다가 가리왕산 천혜의 삼림을 훼손하면서까지 이런 행사가 필요하냐는 의문에도 우리는 답을 찾아야 한다. 군사정권 시절에 88올림픽을 유치하고 치른 경험 때문에 올림픽을 국가중심주의의 쇼로 기억하는 이들도 많다. 어느 모로 보나 회의적인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우리는 왜 올림픽을 치러야 하는가. 어쩌면 이번 평창 동계올림픽은 그 답이 될지도 모르겠다.

평창 동계올림픽은 북한발 외교위기 속에서 마련됐다. 북미관계는 얼어붙고 정상들 간에는 툭하면 군사조치가 언급됐다. 관련한 강대국들의 국내 정치와 외교는 씨줄과 날줄이 되어 다양한 무늬의 방정식을 쏟아냈다. 우리나라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남북문제, 대미/대중/대일 외교는 국내의 경제, 이념, 정치지형 등에 영향을 끼쳤다.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 구성은 일종의 정치 샬레 역할을 했다. 스포츠와 정치라는 매우 이질적인 두 분야의 교차는 올림픽이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돌아보게 만든다.

그리고 지금 각자의 입맛에 맞게 계산서를 떼어보려는 시도들을 한다. 평창올림픽 조직위원회는 그래프를 동원해 흑자로 선전한다. 몇몇 매체에선 계산이 왜곡 됐다며 전형적인 적자올림픽이라 지적한다. 고속철도 건설비나 경기장 건설비, 대회운영비, 입장권 수입, 광고 집행 등의 숫자들이 복잡하게 얽힌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세상의 일부는 숫자로 표현될 수 있어도 숫자가 세상을 다 담을 순 없다. 혹자는 큰 행사를 훌륭히 치렀다는 자긍심이나 클리셰 같은 애국심 또는 정정당당한 경쟁의 감동 등을 무형의 수익으로 꼽을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 나름의 의미들이 있다. 하지만 그보다 우리는 이번 평창 동계올림픽이 증명한 어떤 현상을 바라볼 볼 필요가 있다.

미중간 패권경쟁의 큰 틀 아래에서 북미간 대립은 전쟁위기설을 몰고 왔다. 스포츠로 세계평화를 이룬다는 거창한 구호를 느끼기엔 위기의 당사자인 한국이 처한 현실은 너무 팍팍했다. 이 시점에서 대립하는 각국이 인류애와 평화라는 가치에 목메지 않아도 됐었다. 도덕적 우위나 명예 등은 첨예한 나라마다의 입장을 고려해 보면 사치에 가깝다. 그럼에도 그것이 실제로 현실외교의 장에서 중요한 지렛대가 된 장면을 우리는 보았다. 속셈이야 따로 있지만 북한은 평화의 기치를 내 건 올림픽 시즌에 대화국면으로의 전환을 시도했고, 미국은 세계여론에 떠밀려 대북 외교전의 양상을 조금은 수정해야 할지도 모를 상황이다. 싸우긴 싸우는데 자신이 훌륭한 인격임을 증명하는 구실이 필요하다니. 올림픽 기간 동안 정부는 선의를 추구하는 입장을 천명하는 행위에 주변의 지지를 이끌어 내는 기능이 있음을 보여줬다.

이번 평창 동계 올림픽은 오래전에 용도폐기된 줄로만 알았던 이상적인 가치 추구가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여전히 미래를 위한 주요 자산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일깨워 줬다. 이것은 어떤 계산서에도 숫자로 표기되지 않는다. 스포츠와 정치의 함수관계에 관한 이 경험, 현실에 그다지 쓸모없어 보였던 이상적인 명제가 때론 냉정하고 논리적인 수 계산의 변곡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어느 날 제 역할을 해내는 한 명의 직업인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외교의 해법도 한 차례의 행사로 주어지는 게 아니다. 지금의 경험을 키우고 가꿔야만 평창 동계올림픽이 제대로 된 역할을 완수 하는 날이 온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지금 따지고 싶어하는 올림픽의 손익계산서는 먼 훗날 발급될 것이다. 평창 동계올림픽은 30년 뒤의 사람들을 위해 우리시대가 내민 제안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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