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철학박사▸상지대학교 강의전담교수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강의전담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조선의 통치 방식은 전제군주(專制君主) 제도였다. 즉 군주가 절대 권력을 가지고 통치를 하는 시스템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조선의 전제군주를 우리가 사극에서 접할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 되었다. 과거를 통해 선발된 유신(儒臣)들과 끊임없이 토론을 했고, 특히 의정부(議政府)라는 조선시대 신료들의 최고위 기관과의 합의는 필수였다. 그리고 왕의 곁에서 간언(諫言-임금에게 하는 충고)과 왕명 출납을 담당하는 기관인 삼사(三司-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일컬음)까지 있었으니, 왕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특히 삼사의 경우 합사복합(合司伏閤), 즉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하여 삼사의 전관원이 대궐문 앞에 꿇어 앉아 국왕의 허락을 강력하게 요청하는 경우도 있었다. 오늘날로 치면 연좌데모라고 할 수 있다. 이 삼사 가운데 왕에게 간언을 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기관이 바로 사간원(司諫院)이었다. 

사간원의 시작은 중국에서 찾을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 진(秦)과 그 이후 한(漢)대에도 그 연원을 찾을 수 있고, 당(唐)과 송(宋)대에 이 제도가 체계적으로 변했다. 우리 역사에서는 고려 때 당과 송의 제도를 본받아 간언을 전문으로 하는 관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선이 건국한 이후 사간원이 의정부 안에 포함되었으나,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완비되면서, 독립적인 기관이 되었다.

사간원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바로 간언과 탄핵이었다. 간언은 왕이 잘못된 행동이나 통치를 수행할 때 이것에 대한 비판, 탄핵은 부적절한 인사에 대한 비판이다. 이 모든 것의 배경은 민심과 유교적인 덕(德)에 부합하느냐 부합하지 못하느냐의 여부였다. 지금으로 치면 언론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직제(職制)를 고려했을 때 사간원을 비롯한 삼사의 품계는 그렇게 높은 것이 아니었다. 이 가운데 사간원의 수장인 대사헌(大司憲)은 정3품에 속했고, 그 이하의 신하들의 품계는 더 낮았다. 판서나 정승에 비해서는 낮은 직책이었다. 그러나 삼사, 특히 사간원의 신하가 된다는 것은 가문의 자랑이었고, 자부심을 가질 직책이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사간원의 신하들 역시 조선의 신료 중 하나였기 때문에 대신들 사이의 위계질서는 엄격했지만, 사간원에 속한 신하들 끼리 직급이 높은 신하가 낮은 신하에게 반말을 하거나, 낮은 신하가 높은 신하에게 존대를 하는 경우가 없었다고 한다. 특히, 직무 중 술을 취하도록 마셔도 문책하는 경우가 없었다는 것이 이채롭다. 그리고 사간원 관리를 선발할 때 학문이 뛰어나고 인품이 강직한 사람을 선발했다. 또한 교체할 때 지방관으로 강등하여 보내지 않았고, 승진할 때는 파직되었던 기간도 일한 일수로 합산하여 평가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특수성은 평소에 목숨을 걸고 간언을 하는 직무의 위험성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사간원의 활동 가운데 재미있는 것은 바로 “풍문탄핵(風聞彈劾)”이었다. 이것은 말 그대로 들리는 소문만으로도 탄핵을 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서울대 규장각 연구소 연구원인 송웅섭이 『서울신문』에 투고한 기사에 따르면, 성종 때부터 언론이 활성화되면서 풍문에 입각한 탄핵활동이 늘어났다. 급기야 대간에서는 “풍문탄핵이 조정 기강을 위해 꼭 필요하다”는 입장을 강변하면서 점차 일상적 언론활동으로 자리매김했다. 풍문탄핵이 늘면서 ‘언근불문’(言根不問-취재 출처를 묻지 않는 것)의 기치 또한 강조됐다. 풍문탄핵의 근거가 무엇인지 추궁하는 국왕과 대신들에 맞서 대간에서는 “말(言)의 근거(根)를 캐는 일은 언로를 막히게 하는 처사”라며 강하게 맞섰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언론의 모습에서도 찾을 수 있다. 사간원 내부에서는 상하간에 존대나 반말을 하지 않는 것은 기자들이 선배 기자나 데스크에게 “님”자를 붙이지 않는 모습과 비슷하다. 또한 언론에게 강력한 힘을 실어주는 것은 언론이 민심을 전달하고, 정치권을 견제한다. 오늘날 언론을 소위 “제4부”의 역할을 한다는 평가는 아마 이러한 모습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언론은 이러한 힘을 잘 사용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정 정치세력에게는 풍문탄핵을 자행하고, 자신들의 지향점이 맞는 세력의 잘못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소위 “내로남불”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 대부분의 언론의 데스크는 삼성이었다.’는 최근의 보도는 돈의 힘 앞에서 한없이 약해지고, 스스로의 역할마저 포기하는 언론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불편부당(不偏不黨)하고 민심을 대변한다는 자평을 언론은 이행해주길 바란다. 부당한 것에 대해서는 권력과 돈의 힘에 굴하지 않고,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정치적 욕망에 굴복하지 않고 ‘아니되옵니다!’라고 보도할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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