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와 평화로 가는 길] 제주4.3사건, 엉킨 실타래로 평화의 옷을 짓다
[화해와 평화로 가는 길] 제주4.3사건, 엉킨 실타래로 평화의 옷을 짓다
  • 박애경 발행인
  • 승인 2018.04.02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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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2월 22일 제주, 아직 자리를 내어주지 않은 겨울 대지에 틈틈이 비집고 고개 내미는 봄이 그곳에 있었다. 모슬포 섯알오름으로 향하는 길은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을 비웃듯 바람이 미쳐 날뛰었다. 멀찌감치 보이는 학살터 입구에 자리 잡은 대나무 조형물에 매인 노란리본이 바람 따라 꺼이꺼이 울어댄다. 울음은 1950년 뜨거운 여름날,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 이유 없이 죽어간 원혼들의 비명처럼 들렸다. 바람 넘어 알뜨르 비행장의 격납고들이 산방산을 등지고 흉물스러운 모습으로 초라하게 서있다.
 

 

바람과 햇살이 함께 나뒹구는 옛 활주로 터를 따라 예비검속자들이 집단 학살된 처절한 현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누군가 추모비 앞에 두고 간 검정고무신 두 켤레가 가슴을 먹먹하게 쓸어내린다. 준비 없이 맞이한 죽음 앞에 공포에 떠는 눈빛으로 서있는 열일곱 소년의 맨발이 오버랩 된다. 총을 겨눈 이도, 꽃다운 나이를 탄약고 터에 묻어버린 맨발의 소년도, 그저 동네 아저씨요 이웃집 아이였을 그들의 슬픈 눈빛이 진녹색 웅덩이에 박혀있다.

 

이름 짓지 못한 역사, 제주4.3사건

218명의 희생자(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확인한 희생자 수)를 낸 제주예비검속 섯알오름사건을 말하기 전, 먼저 제주4.3사건을 들여다보아야한다. 우리 역사는 왜 제주도민 3만 여명의 희생을 요구했는지, 제주도가 왜 좌익의 상징 ‘빨간 섬’으로 낙인찍혀야 했는지를 이제는 말해야한다. 소설가 김석범 씨의 말처럼 입 밖에 내놓지도, 알고서도 몰라야 하는, 기억을 말살당한 4.3사건을 비록 ‘민족의 흑역사’로 기록될지라도 기억을 복원시켜야 한다. 그리고 역사가 주는 메시지에 귀 기울이고 마음에 새겨야 한다.

2018년 4월 3일이면 제주4.3사건은 70년의 세월을 뒤로하지만 여전히 제주도민들의 마음엔 한(恨)으로 서려있다. 당시 어린나이였던 희생자 가족들은 이미 노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날의 공포와 참혹한 기억에 갇혀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다. 눈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슬픔 그 이상의 상처가 그들의 마음을 짓누르며 용서할 수 없는 증오로 아물어 가는 것이다. 곪은 상태로 아문 상처는 다시 들여다보고 치료해야 한다. 그래야 건강한 대한민국 역사를 기대할 수 있다. 이제부터 제주4.3사건의 진실 속을 들여다보려 한다.

 

사건의 배경

4.3사건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사건의 뿌리는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된 직후 불어 닥친 복잡미묘한 정국(政局)에서 찾아야한다.

1945년 8월 15일은 우리 민족이 35년간의 일본 제국주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감격의 날이다. 일본제국의 억압을 피해 고국을 떠났던 이들이 해방의 기쁨과 삶의 희망을 안고 하나둘 돌아왔다. 제주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제강점기에 돈 벌러 일본으로 건너갔던 사람들이 귀향하면서 당시 20만 남짓이었던 제주 주민이 무려 6만 명이 더 늘어났다. 갑자기 늘어난 인구에 일자리가 부족했고, 콜레라에 흉년까지 겹치면서 먹고사는 게 갈수록 피폐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제강점기에 부와 명예를 누렸던 일제부역자들이 그대로 미국 군사정부(미군정) 하에 앉아 부정부패를 일삼으면서 사회는 점점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일제부역자들이 미군정 하에서 다시 관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지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명분으로 미군정이 과거 일제통치기관에서 일했던 관료들을 대거 등용했기 때문이다. 해방은 되었지만 온전한 해방이 아닌 것이다. 38도선 북쪽은 소련군이, 남쪽은 미군이 통치함으로써 독립국가로서의 위치에 설 수 없었다.

이에 자주적이며 통일된 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한 열망으로 여운형 등을 중심으로 ‘건국준비위원회’가 전국적으로 조직됐다. 건국준비위원회는 곧이어 ‘인민위원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당시 ‘인민’이라는 용어는 국민, 시민보다 더 흔하게 쓰였다. 그러나 미군은 인민위원회에서 만든 우리의 국가를 인정하지 않았다. 오로지 ‘미군정’만을 이남의 합법정부라 선포하고, 자신의 통치를 위해 인민위원회를 강제로 해산시켜야했다. 이때 미군정은 일제부역자들을 자신의 손발로 활용한 것이다. 필연적으로 갈등이 뒤따랐다.

 

제주에서도 대정면을 시작으로 1945년 9월 10일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고, 이어 9월 23일 제주도인민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제주도인민위원회의 역할은 주로 치안활동과 교육사업, 그리고 마을의 행정을 주도했다. 미군정의 탄압으로 다른 지역의 인민위원회가 소멸되거나 이름을 바꿀 때에도, 계급대립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제주도의 인민위원회는 촌락공동체가 강하게 뿌리내려 자치조직으로서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제주도인민위원회를 인정하지 않고 일제부역자 등 우익인사들을 조직화시켜 인민위원회를 대항할 세력을 키워갔다. 그리고 1946년 8월 1일 우익세력이 주장해온 제주도(島)의 도(道) 승격이 실현됨으로써 우익의 입지가 강화됐다. 이때부터 도(道) 규모에 맞는 경찰병력이 증강되고 조선경비대대9연대가 창설되는 등 공권력이 강화됐다. 마침내 1946년 말부터 인민위원회에 대한 직접 탄압이 시작된 것이다. 미군정과 인민위원회의 대립, 앞서 말한 피폐한 경제상황이 겹쳐 도민의 불만은 점점 커져갔다.

 

사건의 도화선, 3.1절 발포사건

갈등은 1947년 3.1절 기념대회에서 표출됐다. 소위 제주4.3사건의 도화선이 된 것이다.

오후 2시 45분께 제주읍 관덕정 앞에서 날카로운 총성이 울렸다. 이날 기념행사를 구경하고 있던 주민들을 향한 미군정 경찰의 총성이었다. 경찰의 총탄에 6명이 죽고 8명이 부상을 당했다. 아기를 업은 여성과 학생들이 등 뒤에서 날아 온 총탄에 피범벅이 된 채 쓰러져 죽어갔다. 경찰은 왜 무고한 이들의 등을 향해 발포했을까?

해방 후 두 번째 맞는 3.1절 기념행사를 서울은 좌익과 우익이 서로 나눠 진행했다. 좌익의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은 남산공원에서 ‘3.1절 기념 시민대회’라는 이름으로 개최했고, 우익진영은 ‘기미선언 전국대회’라는 이름으로 서울운동장에서 열었다. 제주에서는 서울처럼 두 개로 나누지 않고 좌익진영의 제주 민전이 주최하는 하나의 행사로 치러졌다. 진정한 자주독립과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열망으로 제주읍, 애월면, 조천면 주민 3만 여명이 제주 북국민학교에 모였다. 미국과 소련이라는 외세에 의해 한반도가 두 개로 쪼개질 위기와 그것으로 인한 전쟁 발발을 걱정하는 3만 여명은 “3.1정신으로 통일 독립을 전취하자”고 외쳤다.

관덕정 뒤편에 위치한 북국민학교에 모인 군중들은 오후 2시 행사가 끝나자 가두시위에 나섰다. 이때 행사 구경에 나온 어린아이가 부근에 있던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치어 다치는 사태가 발생했다. 다친 아이를 그냥 두고 가는 기마대에 화가 난 군중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했다.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한 경찰이 방아쇠를 당겼다. 이날의 죽음은 항의에 대한 과도한 대가였다. 경찰은 발포로 끝내지 않았다. 3.1절 집회를 주도했던 사람들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민심이 들끓었다. 이어 3월 10일부터 22일까지 제주도청을 시발로 민·관 총파업에 들어갔다. 학생들은 등교를 거부하고, 시장상인들도 가게 문을 닫고 생계를 포기하면서까지 3.1절 발포에 항의했다. 하지만 미군정은 제주도민의 마음을 읽으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규정하고 당시 미군정 경무부장인 조병옥을 앞세워 강경대응에 나섰다. 파업을 주도한 혐의로 민전 간부들을 연행하기 시작해 이듬해 4.3사건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명을 검속했다.

특히 미군정이 끌어들인 ‘서북청년회(서청)’와 응원경찰대의 횡포와 만행으로 민심은 더 흉흉해졌다. 서청과 경찰은 좌익척결이라는 명분으로 무수히 많은 학생들과 농민들을 혹독한 고문으로 죽게 했고, 약탈도 서슴지 않았다. 이들의 폭력은 법 위에 군림했다. 마침내 궁지에 몰린 제주 좌익진영이 무장투쟁을 결의한다. 남쪽만의 단독 선거로 치러지는 5.10선거를 막아보자는 명분과 함께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의 주도로 무장봉기가 일어난다. 이날 350명의 무장대는 도내 24개 중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하고, 경찰과 서청 숙소, 독립촉성국민회와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습격했다. 이로 인해 경찰 4명과 민간인 8명, 무장대 2명이 사망했다.

미군정 경찰은 4.3사건을 ‘북한과 연계된 공산주의자들의 난동’이라고 선전하고, 제주비상경비사령부을 설치, 응원경찰과 서청 단원들을 증원했다. 반면 경찰에 비해 민족적 성향이 강했던 모슬포 주둔 국방경비대 9연대는 사태의 본질을 제주도민과 경찰·서청 사이의 충돌이라고 판단해 무장대와 평화적으로 해결하길 원했다. 그리고 마침내 4월 28일 평화협상을 성사시켰다. 하지만 미군정의 무력진압 결정과 방해공작으로 평화협상은 물거품이 된다.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사건이 바로 ‘오라리 방화사건’이다.

 

모략으로 점철된 오라리 방화사건

5월 1일, 제주시 오라동 연미마을에 무장대를 가장한 괴청년들이 몰려와 불을 지르고 난동을 일으켰다. 미군정은 이 장면을 하늘과 땅에서 입체적으로 촬영해 ‘제주도의 메이데이(May Day on Cheju-Do)'라는 선전용 기록영화를 제작했다. 무장대가 방화한 것으로 조작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결국 이날의 방화는 우익 청년들의 소행으로 밝혀졌지만, 배후에는 평화협상을 깨뜨리려는 미군정이 있었다.

오라리 방화사건 이틀 후인 5월 3일 평화협상을 믿고 산에서 내려오던 민간인들에게 총격을 가하는 등 미군정은 강경진압으로 선회했다. 무장대도 다시 강공모드로 돌아섰다. 무장대의 4.3사건의 주된 명분이었던 5.10 남한 단독 선거를 거부하는 투쟁이 전개됐다. 5월 7일부터 10일까지 선거사무소를 집중 공격하고, 관련 공무원을 납치 또는 살해, 선거인명부를 탈취하는 등 강공을 펼쳤다. 선거 당일 무장대는 중문‧표선‧조천 등지에서 투표소를 공격하고, 많은 주민들이 무장대에 동조해 입산, 투표를 거부했다. 결국 3개의 제주도 선거구중 2개의 선거구가 투표율 저조로 무효처리가 됐다. 이후 6월 23일 재선거를 치르려 했지만 이마저도 무산됐다. 제주도민의 선거 거부는 미군정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져 더 큰 탄압으로 이어졌다.

 

광기의 시대

1948년 8월 15일 남한에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9월 9일 북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우리가 그토록 갈망했던 통일된 독립국가는 이룰 수 없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정부는 정부 수립 후 자신의 정통성에 걸림돌이 되는 요소들을 하나둘씩 제거하기 시작했다. 그 요소들 중 하나가 바로 남한 단독 선거를 거부한 제주도였다. 이승만 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군병력을 증파했다. 그해 12월에 유엔으로부터 새 정부 승인을 받으려는 이승만 정부와 1948년 말까지 한반도를 떠나야하는 미군정의 조급함이 ‘제주도 완전 섬멸’을 선택하게 된다.

10월 17일부터 강력한 토벌이 시작됐다. 토벌 사령관인 9연대장 송요찬은 해안선에서 5㎞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적성구역으로 간주하고 그곳을 출입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사살하겠다는 포고령을 내렸다. 이후 11월 17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중산간마을을 불사르고, 그곳 주민들을 사살했다. 일명 ‘초토화 작전’은 이듬해 1949년 3월까지 약 5개월 동안 행해졌다. 500여명의 무장대를 토벌하기 위해 무려 3만 명을 희생시켰다. 이때 자행됐던 갖가지 불법 학살은 인간으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한편 무장대의 보복 습격도 끊이지 않았다. ‘토벌대 진영’으로 간주되는 세화·성읍·남원 등의 주민들을 무차별 살해했다. 정부에서 이 지역 사람들을 길잡이로 내세워 토벌대 소탕에 나서면 그 당사자와 가족에 대해 잔인한 보복을 행했다. 또한 굶주림에 식량을 약탈하러 갔다가 보초 서던 주민을 살해하기도 했다. 보복의 형태는 4.3이 길어질수록 더 무자비해졌다. 그야말로 토벌대도 무장대도 폭도가 되어 서로 미쳐가고 있었다.

12월 31일 계엄령이 해제되고, 이듬해 3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의 선무작전에 따라 많은 산사람들이 귀순해 왔다. 귀순자들은 남녀노소 모두 제주읍내와 서귀포의 임시수용소에 가둬졌다. 당시 작전 과정에서 희생된 민간인과 자진 귀순하거나 체포되어 포로가 된 사람들을 합쳐 거의 1만 명에 달했다. 그리고 마침내 1949년 6월 7일, 무장대 총책인 이덕구가 사살되면서 사실상 무장대는 소멸됐다.

 

또 하나의 비극

1950년 6·25전쟁은 또 다시 제주에 비극을 안겨줬다. 보도연맹 가입자와 요시찰자 그리고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검속되어 처형당했고,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됐다. 희생자는 30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1950년 8월 17일 당시 제주도내 예비검속된 자의 수는 1120명이었다. 대부분 7월 29일, 8월 4일, 8월 20일에 각각 서귀포, 제주항 앞바다, 제주읍 비행장, 송악산 섯알오름 등지에서 집단 수장되거나 총살‧암매장됐다.

6.25전쟁 직후 4.3과 관련된 살상은 제주 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육지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수천 명의 제주 출신 재소자들이 죽어갔다. 이념이라는 굴레 속에 세계 냉전 구도가 빚어낸 엄청난 비극이었다.

 

평화의 섬으로 거듭나다

전쟁의 소용돌이가 지나고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됨에 따라 4.3사건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까지 긴 여정이 필요했다. 이유는 우리 사회 기득권 세력이 이 사건에 직‧간접으로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1960년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몰락하자 4.3사건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하지만 다음해에 일어난 5.16 군사쿠데타로 다시 중단됐고, 이후 20여 년간의 군사정권 하에서 4.3사건에 대한 논의가 금기시됐다. 반공법, 국가보안법, 연좌제 등이 서슬 시퍼렇게 자리한 그 당시에는 발설조차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다 1978년 현기영의 ‘순이삼촌’이라는 소설을 통해 잊히던 4.3사건이 대중의 관심 속에 들어왔다. 소설가 현기영은 이 작품으로 정보기관에 연행되어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후 참담한 역사 4.3사건이 1987년 6월항쟁 민주화 열기와 함께 활발히 논의되기 시작했다. 마침내 1989년 4월 3일 제주시민회관에서 첫 공개 추모행사가 열렸고, 이후 2000년에 4.3특별법이 제정, 공포된다.

故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는 4.3사건의 본질을 명확히 했으며, 4.3유족과 제주도민을 짓눌러왔던 이념적 멍에를 내려놓게 했다. 그리고 제주도가 인권의 상징이자 평화의 섬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됐다. 역사적 아픔을 딛고 진실과 화해의 과정을 극복해가는 제주도는 2005년 1월 27일 ‘세계평화의 섬’으로 거듭났다.

에필로그

송악산 섯알오름의 미친바람이 해안 가까이서 잦아든다. 두 개로 나뉜 바위를 감싸고 있는 바다가 평온하다. 거센 물결은 심연에 가두고 푸르디푸른 하늘을 머금은 저 바다와 참혹함을 진흙 속에 묻고 마르지 않는 진녹색 눈물을 보이는 섯알오름의 학살터 웅덩이가 닮은 듯하다.

제주의 거센 바람 속에 척박한 농토를 함께 일구며 소소한 밥상을 나눈 이웃들이 어느 날 무장대와 토벌대로 만나 서로에게 광기어린 총칼을 휘둘렀다. 이들에게 민주주의나 공산주의 같은 이념은 없었다. 그저 나의 부모, 형제자매가 무참히 학살당하는 처참한 슬픔만이 가슴에 남았다. 무차별 쏘아대는 총과 미친 듯 휘둘러대던 창과 칼은 슬픔에 대한 분노이자 한 서린 복수였다. 이들의 절절한 분노와 슬픔을 짓밟고 외면하면서 국가는 이념정치라는 허울로 군림했다. 이게 바로 70년 전 제주4.3사건의 본모습이다.

 

70년의 세월은 제주도민을 성숙하게 했다. 죽일 만큼의 미움도 죽을 만큼의 슬픔도 용서와 화해로 녹여냈다. 서로 조화를 이루며 서있는 저기 저 두 개의 바위처럼 아름답고 평화로운 제주바다를 지켜내고 있다. 촛불과 태극기로 갈린 작금의 세태가 70년 전 제주와 다르지 않다. 총성만 들리지 않을 뿐 이념이라는 추상적인 어휘에 휘둘려 서로를 향해 비난의 칼을 들이대고 있는 것이다. 바라건대, 70주년을 맞는 4.3사건을 타산지석 삼아 대한국인(大韓國人) 모두가 화해와 평화의 길을 향해 걸어가길 바란다. 이것이 4.3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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