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와 평화로 가는 길] 4‧19혁명, 평화의 촛불로 맥을 잇다
[화해와 평화로 가는 길] 4‧19혁명, 평화의 촛불로 맥을 잇다
  • 박애경 발행인
  • 승인 2018.04.18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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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이다-정의를 위한 서울대학교 시위대의 행진/사진제공=4·19혁명기념도서관
전진이다-정의를 위한 서울대학교 시위대의 행진/사진제공=4·19혁명기념도서관

4월은 우리에게 기억과 다짐을 부탁한다. 올해 70주년을 맞은 4·3제주사건과 4년 전 304명의 목숨을 차디찬 진도 바다에 수장시킨 4·16세월호참사, 그리고 1960년 4월 19일 부조리, 불합리, 부당함에 맞선 민중봉기 4·19혁명이 그러하다. 우리의 4월 역사는 아픔을 동반했다. 4·3도 4·16도 4·19도 무수한 무고의 희생을 요구했다. 가슴 아프지만, 우리는 그들의 희생을 기억해야한다. 그리고 절대 기억으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보편적이며 상식적인 삶이 통하는 세상, 민(民)이 주(主)가 되는 세상을 위해 4월 역사의 가치를 되새기고 또 다짐해야한다. 아픈 역사가 또다시 되풀이되지 않기를...

 

4월,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4월 13일,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 자리 잡은 국립4·19민주묘지에는 얼마 남지 않은 4·19혁명을 기념하고 추모하려는 학생과 시민들로 활기를 띠고 있었다. 필자도 그들처럼 기념탑 앞에서 잠시 묵념으로 예를 올렸다. 감은 눈이 마치 귀가 되어 ‘독재타도’를 외쳤던 그날의 함성 소리를 듣는 듯했다. 알 수 없는 뜨거움과 감사함이 마음속에 일렁였다.

맑은 하늘, 맑은 바람이 묘지를 에워싼다. 이제 막 봉오리를 터트리려는 철쭉과 이미 떠날 길을 재촉하는 개나리, 벚꽃, 목련 등 이른 봄꽃들이 맑은 바람에 업혀 묘지를 장식한다. 꽃바람 따라 걷다가 무심히 멈춘 곳. 서울대학교 안승준 학생의 묘이다.

<1938년 6월 26일 서울출생(남), 서울대학교 상대 3년 재학, 1960년 4월 19일 중앙청 앞 시위 중 총상, 같은 날 서울대학병원에서 사망>이라고 새겨있는 비석 뒤편에 함께 각인된 이름. 바로 아버지 안천순, 어머니 김입분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스러운, 또 자랑스러운 아들을 가슴 속에 묻어야만 했던 그들의 애통함이 가감 없이 전해진다.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야속할 만큼 봄빛이 찬란하다.

무엇이 여리디 여린 학생들을 거리로 나오게 했는가? 무엇이 아들딸의 죽음으로 부모의 심장에 대못을 박았는가? 바로 민주주의라는 거창한 이념을 넘어 선, 도리에 어긋난 부조리, 그리고 이치에 맞지 않은 불합리에 대한 인간 본연의 저항이 그들을 투사로 만들었다. 초등학생부터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그저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빠 이념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소시민부터 교수 등 사회지도층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외쳤던 함성, ‘자유, 민주, 정의’였다. 그들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민주주의가 허울뿐인 껍데기가 아닌 속이 꽉 찬 알맹이로 대한민국에 자리 잡기를 염원한 것이다. 1960년 4월 19일 그날의 외침 속으로 들어가 본다.

 

4·19혁명의 시대적 배경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됐지만, 또다시 남과 북이 갈리면서 남쪽에는 미국의 도움으로 이승만 정부가 세워지고, 북쪽은 김일성이 소련의 지원으로 공산정권을 세운다. 그리고 예견된 비극, 6.25전쟁이 발발한다. 이 전쟁으로 450만 명의 사망자와 1000만 명의 이산가족, 10만 명의 전쟁고아가 발생했고, 전 국토는 폐허로 변했다. 전쟁은 국토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경제적·정신적 삶도 폐허로 만들었다. 이 와중에도 이승만 정부는 대통령 친위조직을 방위군 고위직에 임명하고 예산과 물자를 빼돌려 9만 명이 굶거나 얼어 죽게 만들었다. 이후 국회가 진상규명에 나서자 정부는 이를 ‘불순분자의 책동’이라며 은폐하려 했다. 이것이 바로 ‘국민방위군 사건’이다. 이승만 정부의 국민에 대한 무례함은 계속 이어진다. 1951년 2월 북한군 빨치산을 색출·소탕하는 과정에서 경상남도 거창의 민간인들이 빨치산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무차별 학살을 당했다. 이에 국회가 조사단을 파견하자 정부는 국군 1개 소대를 북한 공비로 가장해 조사단에 총격을 가했다. 이를 주모한 사람들은 군법회의에서 실형을 받았지만 모두 석방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한다.

부정선거에 대한 응징/사진제공=4·19혁명기념도서관
부정선거에 대한 응징/사진제공=4·19혁명기념도서관

이러한 일련의 일들로 민심은 이승만 정부에게서 등을 돌렸다. 결과는 이승만 정권의 국회의원 선거 패배로 나타났다. 2대 대통령 당선이 어렵게 된 이승만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 카드를 내밀었으나 국회에서 부결시켰다. 그러자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야당 국회의원 10여 명을 국제공산당 관련 혐의로 구속했고, 야당 회의장을 습격하고 국회의원 80여 명을 연금하는 등 온갖 탄압을 자행해 결국 대통령 직선제로 헌법을 바꾸었다. 이 헌법 개정은 정부안과 국회안의 일부를 발췌했다하여 ‘발췌개헌’이라고 한다. 결국 이승만은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킨 지 1주일 만에 대통령 후보등록을 마감하고 10일 만에 선거를 치러 2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승만의 정권장악 욕심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또다시 개헌안에 손을 댔다. 대통령을 두 번 지낸 사람은 더 이상 대통령에 출마할 수 없다는 기존 헌법을 자신의 종신 집권을 위해 ‘초대에 한해서는 중임제한을 철폐한다’라는 내용의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당시 가결 정족수는 국회의원 203명의 2/3인 135.33..명으로 136표를 얻어야하지만, 135명의 찬성표를 얻어 부결됐다. 그러자 다음날 4사5입의 수학적 원리를 적용해 개헌안을 불법 통과시켰다. 이것이 바로 1954년 ‘4사5입 개헌’이다. 이승만의 막무가내 개헌은 또다시 그를 대한민국 3대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했다.

그러나 유권자들의 염증은 나날이 곪아 가고 있었다. 고름은 1958년 이승만의 자유당이 국회의원 선거에서 참패로 터져 나왔다. 그러자 이승만 정부는 ‘국가 보안법’을 만들어 언론을 규제하고, 야당탄압의 법적근거를 마련하고, 정부에 반하는 자는 모두 공산당으로 몰고 갔으며, 비판적인 신문은 폐간시켰다. 이승만 정부의 발악이 극에 달하면서 시간은 혁명의 날로 향하고 있었다.

학원의 정치도구화 반대를 외치며 데모하는 경북고교생들/사진제공=4·19혁명기념도서관
학원의 정치도구화 반대를 외치며 데모하는 경북고교생들/사진제공=4·19혁명기념도서관

혁명의 도화선은 대구에서 시작됐다. 1960년 3월 15일 제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 부통령 후보인 장면의 대구유세가 2월 28일 예정되어 있었다. 정부는 유세장에 시민이 모이는 것을 막고자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대구지역 중·고등학생을 시험, 영화 관람, 토끼사냥 등의 핑계를 대며 학교에 등교시키라고 지시했다. 이에 학생들은 “학생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며 시위를 벌였다. 대구 시위는 3월 14일까지 전국으로 확산됐다. 여론이 심상치 않게 흘러가자 이승만 정권은 선거 조작을 계획했다. 야당의 조병옥 후보가 신병 치료차 미국으로 떠나자 선거일을 2개월이나 앞당겼으나, 조 후보가 미국에서 갑자기 사망해 이승만의 4선은 거의 확실시 됐다. 이에 자유당은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켜 당시 85세 고령의 이승만 대통령이 사망하면 모든 권력을 물려받을 수 있도록 공무원을 총동원해 ‘선거운동망’을 조직하고, 40% 사전투표 및 투표함 바꿔치기, 유권자 명부 조작 및 대리투표, 득표수 조작 및 반공개투표, 야당참관인 축출, 자유당 완장부대와 깡패를 동원해 유권자를 위협하는 등 온갖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심지어 개표과정에서 이기붕 부통령 후보의 표가 100% 가까이 나오자 내무부 장권은 득표수를 줄여서 발표하도록 했다. 결국 이승만 963만 표(85%), 이기붕 833만 표(73%)로 당선자가 발표됐다. 그야말로 자유민주주의 정신이 말살된 작태였다.

인양된 김주열군-얼굴에 최루탄이 박힌 채 숨진 처참한 모습/사진제공=4·19혁명기념도서관
인양된 김주열군-얼굴에 최루탄이 박힌 채 숨진 처참한 모습/사진제공=4·19혁명기념도서관

3·15 부정선거는 국민의 공분을 사기에 마땅했다. 먼저 3월 15일 마산에서 시민과 학생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를 강제 해산시키기 위해 경찰이 총격과 폭력으로 진압해 10여 명이 사망하고 87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그리고 자유당 정권은 이 시위를 어김없이 이념적으로 해석하고 몰고 갔다. 시민과 학생의 자발적 의지를 공산당 지하조직에 의한 폭동으로 치부한 것이다.

이후 4월 11일, 시위 중 행방불명된 16세 김주열 군의 시신이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모습으로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자 분노한 시민들의 2차 시위가 일어났다. 이때도 경찰이 쏜 총에 2명이 사망하자 시위는 대규모로 번져갔다. 이윽고 이승만 정권은 4월 12일 전국에 등교 중지령을 내리고 이 사태를 공산계열의 책동으로 몰아가려 했다.

 

혁명의 뜨거운 함성 속으로

전진이다-정의를 위한 서울대학교 시위대의 행진/사진제공=4·19혁명기념도서관
전진이다-정의를 위한 서울대학교 시위대의 행진/사진제공=4·19혁명기념도서관

마산 시위에서 벌어진 정부 대응에 대한 분노는 당시 지성인이었던 대학생들의 폭발로 급물살을 타게 된다. 4월 18일 고려대학교 3000여 명의 학생들은 “기성세대는 반성하라! 마산 사건의 책임자를 즉각 처단하라!”를 외치며 국회 앞에서 평화적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평화적 시위마저도 강경진압으로 맞선 이승만 정권의 정치깡패 ‘반공청년단’의 습격으로 200여 명의 고려대 학생이 다치면서 시민과 학생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마침내 4월 19일 혁명의 날이 밝았다.

전국의 수많은 대학생, 고등학생, 중학생, 심지어 초등학생까지 잠시 가방을 내려놓고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부르짖었다. 시민들 역시 한마음으로 울부짖었다. 외침은 서울뿐 아니라 인천, 수원, 부산, 광주 등 전국에서 울렸다. 하지만 이들의 외침에 대해 이승만 정권은 귀를 닫고 총칼을 앞세운 무력 탄압으로 일관했다. 무력충돌로 인해 이날 전국적으로 시위대와 경찰 등 115명이 사망하고 727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그러자 이승만 정권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4월 19일 시민과 학생들의 분노한 눈빛은 이승만 정권을 위협하기에 충분했다. 이로 인해 당시 국무위원과 부통령이 사표를 냈고, 이기붕 부통령 당선자는 사퇴를 고려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당 총재직만 내려놓겠다고 해 자유당 정권의 통치체제는 그대로 유지되는 듯했다. 이러한 태도에 교수단이 들고일어났다. 4월 25일 전국 27개 대학 교수단 258명은 시국선언문을 채택하고 학생 시민들과 시위에 동참했다. 교수단 시위는 소강상태에 있던 4‧19혁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마침내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이 원하면 물러나겠다”는 명대사를 남기고 하야했다. 이승만과 함께 자유당도 무너졌다. 시민혁명의 값진 결과였다. 1960년 4월은 그렇게 역사를 기록했다.

 

4‧19정신과 촛불혁명, 그리고 태극기

‘추모와 계승은 역사적 진실을 확인하고 기억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4.19기념관 입구에서 만나는 글귀가 마음에 닿는다. 2018년 4월 19일을 보내는 우리 모두가 되새김해야할 말이다.

지난 2016년 10월 29일 많은 시민들이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며 촛불을 밝혔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부실한 행적에 많은 이들이 분노했다. 2014년 세월호참사로 시작된 박근혜 정부에 대한 불만이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으로 봇물처럼 터졌다. 많은 이들이 촛불로 부패와 부조리에 항의의 뜻을 전했고, 평화적이며 질서 있는 모습으로 무게감을 더했다. 천만이 밝힌 촛불은 광화문 밤하늘을 달구었으며 매서운 겨울바람도 이겨냈다. 그리고 이듬해 이른 봄 박근혜 대통령은 파면된다. 우리는 이러한 시민들의 행동을 촛불혁명이라고 부른다. 혁명이란 추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 속에서 응결된 분노와 증오의 집단적 폭발이다. 이러한 폭발이 촛불혁명에서는 광기어린 몸짓으로 표출된 것이 아니라, 그저 작은 촛불하나에 의지해 보다 나은 삶을 위한 기도로 나타났다. 1960년 4월의 정신을 보다 더 값지게 승화시킨 행동이었다.

반면 촛불에 대해 부정하는 또 다른 민심도 있다. 그들은 성조기와 태극기를 앞세우며 촛불 속에서 좌익이라는 이념을 끄집어낸다. 촛불이 사그라진 자리에 성조기와 태극기 그리고 무수한 욕설이 흔들린다. 이미 감정의 골은 깊어질 대로 깊어져 갔다.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세세토록 기득권을 차지하려는 몰염치한 정치인들의 욕심에서 불거진 부정부패를 더 이상 간과할 수 없어 들었던 1960년 4월 19일의 태극기와 성조기와 함께 나부끼는 지금의 태극기가 과연 같은 의미이고 가치인지 한번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