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현 칼럼니스트
▲ 김종현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김종현 칼럼니스트】 초인의 힘을 가진 영웅들이 처음엔 범죄를 막고 전쟁을 막더니, 나중엔 지구를 구하고 급기야 우주마저 구하러 목숨을 걸고 뛰어든다. 미국의 코믹스, 즉 만화 속 세계관에서 출발한 영화 ‘어벤져스 : 인피니티 워’는 영웅들이 만들어 온 역사의 결말부에 해당한다. 무려 10여년에 걸친 세계관을 매듭 짓는 중이다.

원래 만화를 출판하던 마블은 영화 시리즈를 통해 방대한 만화 속 내용을 압축해서 보여줘 왔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마블의 영화는 큰 인기다. 이번 ‘인피니티 워’는 그간의 여러 영웅들이 함께 악의 최종 보스와 싸우는 줄거리인 데다, 단순한 액션영화를 넘어 존재와 공존에 대한 철학적 감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 덕에 개봉 5일만에 누적관객자 수가 500만명에 육박하는 인기를 끌고 있다. 당연히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사람들은 먼저 본 사람들이 결말을 누설할까봐 노심초사 중이다.

요즘 영화의 흥행을 이끄는 공간은 SNS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확인하고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서인데, 반면에 중요한 내용을 미리 알고 싶지 않다면 그만큼 위험한 곳이기도 하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후기를 쓸 때 내용 누설 즉 ‘스포일러(spoiler)’가 없다는 말머리를 달지 않으면 여간 타박을 받는 게 아니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관객들이 인터넷에서 스포일러 지뢰밭을 애써 피해 다니는 모습이 애잔할 지경이다. 

사람들은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 영화의 전개를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내용을 모르고 있을 때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가 다가오는 동안 현재의 감정이 영향을 받고, 이는 곧 현실의 감각이 된다. 비록 수시간 동안이지만 관객은 그렇게 영화 속 등장인물들과 함께 상황을 판단하고 감정을 겪으며 점차 영화 속 사건에 동참해 간다. 그리하여 허구를 실재하는 세계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내용을 미리 알면 영화 속 이야기에 몰입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내용을 미리 알면 관람은 이미 결정된 세계의 확인에 불과해진다. 감각은 현재를 잃어버리고 가짜가 된다. 그러니 이야기 체험자 입장에서 실제와 허구를 가르는 경계는 그 이야기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감정을 담지하고 있는가 아닌가에 있다. 비록 지어낸 이야기더라도 우리는 아직 오지 않은 감정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다가 몸소 체감할 때 현실로 인식한다. 상업영화의 미덕은 바로 이 점, 모든 기술을 총동원 해 관객의 인식 속에서 허구의 서사마저 실현하도록 해 주는 것에 있다.

안타깝게도 이번 ‘인피니티 워’의 번역에는 잘못 번역 된 대사가 몇 개 있어 비난이 일고 있다. 단순 오류나 좋은 위트가 무미건조하게 옮겨진 정도가 아니라, 등장인물과 극의 흐름 이해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대사를 정 반대로 잘못 번역 해 문제가 됐다. 

이 번역 오류의 가장 큰 문제는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에게 그 오류를 말해주면 영화의 결말을 누설하는 게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여기서도 쓸 수가 없다. 이 사실을 모르는 관객은 영화 속 인물의 생각을 오해하고, 영화의 결말과 의미마저 오해하게 된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한들, 번역자의 개입 행위는 마블과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이야기의 진실을 관객이 잘못 받아들이도록 이끌었다. 이로써 관객은 서사의 현실성을 얻는데 실패하고 왜곡된 인식의 엉뚱한 현상만을 2시간 40분 동안 접한 게 됐다. 관객이 판가름 하기 이전에 번역자가 장중한 서사의 의미와 가치를 추락시킨 것이다. 스포일러가 결정적 세계관을 강제함으로써 이야기를 가짜로 만든다면, 잘못된 번역은 왜곡된 세계를 강제함으로써 관객의 인식이 가짜가 되도록 조장한다.

스크린 위 현상의 실재성을 중계하는 게 번역이란 점에서, 이야기의 중계자 또한 현실의 감각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다. 사람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결론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미지의 미래를 맞이한다. 그리고 주체적인 당사자로서 미래를 헤쳐 나아가는 그 순간이 실재한다면 그 자체로 의미 있는 현실로 인식한다. 때문에 그것을 현실로 인식하게 해주는 중계자도 그만큼 중요한 요소다. 현실을 중계하는 것은 정보의 전달자들이다. 영화 ‘매트릭스’의 등장인물들이 정보시스템을 상대로 괜히 ‘무엇을 현실로 수용할 것인가’로 갈등 하는 게 아니다. 요컨대, 어떤 현상의 관찰이 인간의 감각에 의한 인식의 결과라면, 해당 정보를 구성하는 모든 것은 미래를 위해 특정한 방향의 스포일러와 왜곡된 중계를 배제시켜야 한다. 미래는 오로지 체험자 자신의 주체적인 판단에 맡겨야 한다.

오랫동안 익숙한 현실이라고 여겨왔던 남북의 갈등과 북미의 꼬인 관계가 서서히 풀릴 조짐이다. 시종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진행된 남북정상회담은 대한민국의 국민들에게 오늘 선택 할 수 있는 현실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아직 미래를 알 수 없는 지금 이 순간, 이 현실을 체험하고 있는 직접당사자의 판단으로 미래는 열리게 되어있다. 아직 오지 않은 결말을 만들어내는 것은 등장인물들이다.

그럼에도 망국적 결말이라는 근거 없는 스포일러를 하고 싶어 안달 난 야당인사들이 눈에 들어온다. 자유한국당 나경원 의원은 ‘어처구니 없다’고 했고, 홍준표 대표는 ‘위장평화 쇼’라고 했다. 또한 바른 정보의 전달 보다는 자의식을 투영시켜 번역하듯 왜곡시키는 보수언론들도 본다. 정상회담 직전까지 야당의 정치공세 옮겨 적기에 바빴다가, 정작 정상회담 때엔 한걸음 전진하는 한반도평화 대신 핵문제 해결의 성과측정을 하겠다는 태도에 방점을 두어 회담의 의미를 애써 축소하려 했다.

물론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 영화는 현실이 아니다. 하지만 영화 속 서사를 방해하는 것과 현실 속 우리가 가꿔가야 할 서사를 방해하는 것은 놀랍도록 비슷하다. 미래는 당사자들이 만들어 간다. 그렇다면 지금 누가 미래의 당사자가 아닌지 우리는 알아 볼 수 있다. 물론, 이 글을 읽는 분들을 위해 여기에 ‘스포일러’를 적진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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