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석재 칼럼니스트
▲ 이석재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이석재 칼럼니스트】 서점에 가면 들러보는 섹션이 있다.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책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사람이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는 것은 사회적 인간으로서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항상 문제가 생겨나고, 그에 관한 책들은 언제나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다. 서점에서도 그런 책들을 따로 모아놓은 공간을 가판대 한 곳에 마련해둔다. 상처받지 않는 법을 비롯해, 말싸움에서 이기는 기술과 주도권을 장악하는 방법 등 사람들이 평소 고민하는 것들에 대한 거의 모든 전형과 해결책들이 고전과 신간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기다린다. 

나 역시도 사람들 사이의 문제로 마음이 무거워지거나 내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서인지, 서점에 가면 관련 책들을 찾을 때가 많다. 그런데 그런 책들을 읽어갈수록 지식은 분명 높아가는 것 같은데, 실제 생활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가끔, 어느 정도 신뢰가 있고 서로를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한다고 ‘나 혼자 생각했던’ 사람과의 관계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무시를 당하거나, 일상적인 이견 와중에 모욕적인 언사를 듣거나, 뜬금없이 핀잔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저 당황스럽고 무안해서, 얼굴만 벌게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시간이 좀 지나고 진정이 되고 나서야 내가 무슨 일을 당한 것인지 차분히 복기를 해보지만, 그러고 나서 남는 것이라곤 그때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한 나에 대한 자책뿐이다. 뒤늦게 화를 내고, 시나리오를 다시 그려보는 내 자신이 좀 한심해 보인다고 할까. 그러게 나는 왜, 그때 그렇게 말하지 못했을까.

관계에서 생겨나는 문제라는 것들이 대개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사소하고, 내가 왜 그때 상대의 무례함에 아무런 말을 못하다가 이제 와서 뒷북이나 치고 있는지 설명하려면 여러 맥락을 이해시켜야 하는데, 그건 부부나 애인이 아니고서야 상대를 붙잡고 한참이나 시간을 빼앗고 있기에는 사뭇 민망한 일이기에 결국 홀로 삭히게 된다. 그렇게 나만 지지고 볶고 밤잠을 설치다 보면, 상대는 어느 순간 멀쩡한 얼굴로 다시 돌아오고, 나도 어리숙하니 일상으로 편입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상대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같은 행위를 반복하고, 나는 그동안의 독서와 이미지 트레이닝이 무색하게 같은 방식으로 바보가 된다.

내가 독서가 부족하고, 사색이 부족하고, 훈련이 부족해서 그런 것일까. 똑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고 보면 나는 그동안 계속 상대를 원망하거나 나 자신의 바보 같은 대응을 자책하는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해왔다. 당연히 해결된 것은 없었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 문제가 되는 관계들을 다른 각도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내가 얻은 잠정적 결론은 다음과 같다. 

서로가 생각하는 관계의 기울기가 다르다. 

다시 말하면 서로가 관계에 부여하는 가치 자체가 다르다. 상대의 느닷없는 무례함에 나는 “계속 봐야 할 사이면서 어떻게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지”라고 속으로 의아해 하다가 반박을 할 타이밍을 놓칠 때가 많았는데, 요즘 들어 곰곰이 생각해보니 전제 자체가 틀렸다. 상대는 ‘계속 봐야 할 사이’라는 전제에 그렇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던 듯싶다. 그러니 내가 생각하는 선을 쉽게 넘나들었던 것이다. 내가 그 순간에 같은 수위로 받아치지 못했던 것은 순발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관계가 깨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소한 사안으로 관계를 끊어도 되는 것인가. 딱 들어맞는 비유는 아니지만, 연인 사이에서 더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인 것처럼 서로의 고리를 과감히 끊지 못하는 이가 약자일 수밖에 없다.

그동안 나를 불편하게 했던 이들과 나의 관계를 돌아보면, 나라는 사람은 그들의 삶에서 딱히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다. 설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상호간의 신뢰와 배려는 후순위인 경우가 많았다. 당장의 말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상대를 감정적으로 흔들고, 끝없이 상대의 말꼬리를 잡아 핀잔을 주며 대화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서로가 생각하는 관계의 기울기가 다르고, 게임의 규칙이 달랐던 것이다. 그리고 같은 상황이 몇 번 반복되면 나는 함부로 대해도 괜찮은 사람으로 규정되었다. 그렇게 해도 관계가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내 무덤을 팠던 사람은 다름 아닌 내 자신이었다.

물론 트러블이 있을 때마다 매번 절교를 할 수는 없다. 모든 관계가 평등한 것은 아니며, 그래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럴 수도 없다. 그렇지만 일방이 스트레스를 받는 관계라면, 상대의 행위가 아닌 서로의 관계 자체를 조망해볼 필요가 있다. 경험상 한 번 크게 기울어진 관계는 다시는 처음의 기울기로 복원되지 않는다. 시중에 나와 있는 처세에 관한 수많은 책들은 지금 나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가를 깨닫게 해주기에는 용이하지만, 이미 기울어진 관계를 어떻게 뒤집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답을 주지는 못한다. 그것은 책들의 문제가 아니라 원래부터  답이 없는 부분이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글쎄,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왜, 그때 그렇게 말하지 못했을까”라는 질문에 이제 더 이상, 상대를 미워하거나 내 자신을 자책하는 식으로 답을 찾지는 않는다. 관계의 사소함에 집착하지 않는 것, 거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출발선을 다시 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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