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소연 칼럼니스트
▷성우, 방송 MC, 수필가
▷저서 <안소연의 MC되는 법> <안소연의 성우 되는 법>

아직은 외모에 신경을 꽤 쓰던 삼십대 중반, 서울에 있는 모 대학 방송연예학과에서 신입생들을 지도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매번 잡지책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차림새로 수업에 들어오는 남학생이 있었다. 그 애의 패션이 어찌나 감각 있고 세련됐던지 그 애 옆에 다가서면 괜히 주눅이 들 정도였다. 그래도 선생 체면에 기가 죽긴 싫어서 애써 외면하며 한 학기를 보냈다.

가을이 되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이미 대학생활 한 학기를 보낸 그 애의 세련미는 더욱 농익어 갔다.

결국 어느 날, 말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어서 용기를 냈다.

“너는 정말 옷을 잘 입는구나.”

동시에 내 입을 틀어막지 못한 나를 원망했다.

저렇게 멋진 애에게 감히 나같이 촌스런 여자가 패션을 논하다니!

‘허 참 내, 당신 같은 사람 칭찬 들으려고 내가 이렇게 차려 입고 다니는 줄 알아요?!’ 하고 면박이라도 주면 어쩌지?

그런데 웬걸, 수줍은 새색시 미소를 짓는 그 애, 목까지 새빨개지는 게 아닌가.

그 순간 깨달았다.

이 아이는 이런 칭찬을 처음 들어보는구나!

다들 나처럼 ‘감히 내가...’ 하는 마음에 그 애의 패션에 대해 좋다 나쁘다 언급해준 적이 없었던 거구나.

같은 과 동급생들도 그 애 눈치를 보더니 슬금슬금 한 두 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정말이에요. 아무개 멋져요...

나는 그 날 용기에 대해 생각했다. 일상에서의 용기,

그 날 그 학생을 칭찬한 것처럼, 데이트 신청을 한다거나 누군가에게 가벼운 부탁을 할 때 필요한 용기 말이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오늘은 데이트에서의 용기에 대해서만 얘기해 보자.

연기를 전공하는 젊은 학생들과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누면서 내가 20대 시절에 알지 못했던 남녀의 심리를 알게 된 것이 많다.

그 중 대표적인 두 가지.

먼저, 소개 받은 여자가 맘에 들었다고 모든 남자가 다음 데이트 신청 전화를 거는 건 아니라는 사실. (적어도 내가 대화를 나눈 남학생은 절반 정도만 전화를 걸었다.)

두 번째, 우리가 가끔 만나는 아주 예쁘고 매력적인 여자들 중 데이트 신청을 거의 받아보지 못해 속으로 기가 죽어 있는 이가 상당히 많다는 사실.

첫 만남인데도 술술 대화가 풀려 분명히 마음이 통했다고 생각했던 남학생으로부터 다시 만나자는 전화가 걸려오지 않아 마음 상했던 기억을 거의 모든 여자들이 가지고 있다.

그녀가 적어 준 전화번호를 만지작거리기만 하다가 끝끝내 던져버린 기억을 거의 모든 남자들이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둘은 상대방의 번민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 채 살아간다.

거절당할 두려움에 접어 넣은 작은 용기 하나가 얼마나 큰 비극을 잉태했는지 알지 못한 채...

그가 그녀에게 용기 내어 전화를 했더라면(혹은 그녀가 그에게) 그 둘은 연인이 되어 사랑하고 아기를 낳고 한평생 잘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 아기가 자라 대한민국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가 되었을지도 모르고...

첫 만남을 위한 전화는 어떤 싹이 터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지를 알 수 없는 작은 씨앗과도 같다. 그러나 그 씨앗 속에는 우주가 들어있는 것!

삼복더위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지금도 옆구리가 시린 이 시대의 싱글 남녀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용기가 아닐까?

뭐, 거절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가?

그 사람에게 전화하기 전에도 그는 나의 연인이 아니었고

전화하고 난 지금도 그 사람은 나의 연인이 아니다.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전화를 하는 순간엔 얻는 것이 있다.

그가 내 인연이 될 수도 있다는 50%의 가능성!

새로운 우주를 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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