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공·친미·경제성장’으로 담론 이끌어온 한국 보수
90년대 탈냉전 기류에도 이데올로기적 축은 강화
비판세력 부재 속에 철학적 발전 기반 붕괴
권위주의·전체주의적 관념서 헤어나지 못해

 

지난 1968년 1월 31일 촬영한 서울시청 앞 반공 궐기대회 모습 ⓒ뉴시스
지난 1968년 1월 31일 촬영한 서울시청 앞 반공 궐기대회 모습 ⓒ뉴시스

 

‘보수의 위기’라는 표현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국면과 2017년 대선을 거치며 보수의 위기가 찾아왔다는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박근혜 정권의 실패는 이명박 정권의 그것과 더해져 보수정권 10년의 실패로 커지면서 보수 적통을 자임하는 자유한국당 내에서조차 ‘보수 궤멸’에 대한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이에 <투데이신문>은 ‘보수는 지금’이라는 제목으로 3회에 걸쳐 관련 전문가들과 논문 등을 통해 현재 한국 보수의 상황을 되짚어보고, 앞으로 보수가 나아갈 길에 대해 살펴본다.

【투데이신문 남정호 기자】 한국 보수는 해방 이후부터 수십년간 정치·사회적 헤게모니를 놓치지 않아 왔다. DJ-노무현 정부 10년간 정권을 뺏기긴 했지만 그들은 반공과 친미, 경제성장을 주요 이념으로 한 주도권을 틀어쥐고 정권 교체를 이뤄냈다.

그랬던 보수가 최근 흔들리고 있다. 단순히 정권을 빼앗긴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지난 수십년간 이어온 정치·사회적 담론의 주도권을 놓치며 지방선거 이후 대대적인 정계개편 등 위기감이 확산되고 있는 형국이다.

지난 60여년간 보수는 어떻게 한국을 지배해왔고, 지금은 어떤 문제가 생겼을까.

한국 보수주의의 기반

한국의 보수주의는 반공과 친미, 경제성장제일주의 등을 사상적 기반으로 발전해왔다.

연세대 윤민재 연구교수는 논문 <한국 보수세력의 이념과 활동에 대한 정치사회학적 연구>에서 “해방 직후 한국 사회의 주축 지배세력은 반공과 친미, 경제성장제일주의와 안보이데올로기를 사상적 기반으로 하는 보수주의 세력이었다”고 설명했다.

윤 교수에 따르면 2차세계대전 직후 한반도의 분단질서는 더욱 고착화됐다. 반공과 친미 구도 속에서 보수세력은 남한사회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세계냉전질서를 흡수하면서 성장과 안보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기반을 지속 확충해 나갔다.

탈냉전 등 세계적 기류변화가 찾아온 1990년대 이후 대외적인 조건들을 급변했지만 한국 사회에서 보수세력의 사상적 기초는 변화하지 않았다. 1990년대 이후 민주화로의 진행과정을 통해 보수세력의 사상적 기반이 약화되고 보수세력 자체가 분화되고 있지만 그들의 이데올로기적 축은 오히려 사회의 주요 정치적 쟁점에 따라 더 강화되기도 했다.

윤 교수는 이 같은 시대 변화에도 보수세력이 그 사상적 기초를 견고하게 유지하는 밑바탕에는 대미대북관계에 대한 확고한 인식과 개혁과 진보에 대한 비판이 있다고 전했다. 이는 이상적 논리, 확고한 신념과 원칙이라기보다는 해방 직후부터 보수세력에게 이어져 온 ‘비정상적 마음의 습속(habits of the heart)’ 일 수 있다는 게 그의 견해다.

윤 교수는 “‘마음의 습속’을 현대적 의미로 해석하면 생각과 행동에서의 윤리적 일치성이라고 할 수 있다”며 “이것은 미국 사회에서 공리적 개인주의로 발전해 민주주의가 성숙될 수 있는 토양이자 사회문화적 기반으로 작용했다면, 한국 사회의 보수세력에게는 보수세력만의 집단적 이기주의에 빠져 민주주의의 정신을 후퇴시키고 경제성장과 안보의 논리만 강화시킨 비정상적 마음의 습속이라고 할 수 있다”고 꼬집었다.

지난 2016년 8월 15일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에서 열린 보수단체들의 사드배치지지 국민대회 ⓒ뉴시스
지난 2016년 8월 15일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에서 열린 보수단체들의 사드배치지지 국민대회 ⓒ뉴시스

한국 보수의 특성

그렇다면 한국 보수주의가 갖고 있는 특성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해 인천대 도시행정학과 신종화 교수는 논문 <신보수주의와 대비한 우리나라 보수주의의 특성>에서 “실망스럽게도 보수주의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찾는 것은 현재로서는 불가능할 수 있다고 답한다”고 밝혔다.

아직 한국 내 보수주의에 대한 통일된 의견도 마련돼 있지 않으며, 정치적 전통에서도 충분한 역사적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신 교수는 보수주의를 ‘모호한 개념’이라고 평가했다. 보수주의의 모호함은 보수주의란 특정의 변하지 않는 개념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사회정치적 변화에 연동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한국 보수주의의 성격과 특성에 관한 합의된 연구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은 그 철학적 기반이나 담론적 토대가 빈약하다는 반증일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이 같은 한국 보수의 이념적·철학적 빈곤의 원인에 대해서는 한국 보수와 진보는 상보적인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건전한 이념적 경쟁과 대립이 아니라 상대를 억누르고 비방하며 발전해 보수와 진보 모두 빈약한 토대만을 지니게 됐다고 지적했다.

연세대 윤민재 교수도 앞선 논문에서 “한국 사회에서 보수주의는 자생적이고 자율적인 이데올로기라기보다는 타율적이고 이율배반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서구의 보수주의가 근대화의 과정 속에서 다양한 정치적 이념과 사상을 반추하고 전통과 권위 역사의 개념을 중시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자율적으로 성장시킨 것에 반해, 한국사회의 보수주의는 세계냉전 질서 속에서 외부로부터 강하게 규정된 정치흐름을 성찰 없이 수용하고 그것을 권력의 획득과 유지를 위해 동원하고 편의주의적으로 이념을 만들어 내는 경향이 많았다”고 언급했다.

윤 교수에 따르면 보수세력은 비판세력이 부재한 가운데 반공과 친미의 구도 속에서만 보수주의의 이념을 파악했고, 이를 벗어난 사고방식과 행위는 반민족적 반민주적인 매우 위험한 것으로 취급했다. 또 자신들의 성찰과 거울상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비판세력을 한국의 사회지형에서 제거해 보수주의 철학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기반을 스스로 무너뜨렸다.

윤 교수는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보수주의 세력이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자유주의의 덕목은 매우 취약했고 자유주의와 보편적인 인간의 가치를 탈냉전 다원화 전 지구화라는 세계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사회원리로서 재구성하지 못했다”며 “오직 반공과 친미 왜곡된 보수이념만이 한국 사회의 기본적 양식이 됐다”고 꼬집었다.

아울러 보수와 진보세력의 정권획득도 각 세력 스스로의 노력과 업적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윤 교수는 “노무현 정부 시기에 뉴라이트에게 유리하게 전개된 상황은 보수주의의 주체적인 자성과 노력, 혁신의 모습을 통해 얻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상대방의 실책과 미국과 북한을 둘러싼 대외적 환경의 변화를 통해 얻어진 면이 강하다”고 평가했다.

이와 함께 신 교수는 한국의 보수주의는 과거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해야 하면서도 오히려 그것을 훼손하는 반공을 앞세워야 했던 것처럼 최근에는 복지국가를 경험한 적이 없으면서도 복지국가의 해체나 축소를 주장하는 신보수주의를 수용하고 따르는 모순 아닌 모순을 겪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신보수주의와 비교한 우리나라 보수주의의 성격과 특징으로 △보수주의가 보수하려는 도덕적 가치나 공동체의 덕성이 따로 없어 적극적 가치 실천 대신 회피 상태를 초래하는 부정적 정책들을 이전 상태로 되돌리려 노력한다는 점 △부국강병을 도모하고 민족적 발전과 성장을 목표로 해 성장주의를 전제한 발전국가가 필요하다고 보는 점 △작은 정부, 큰 시장을 이루는 것은 성장의 필요에 따른 선택적인 것이며, 복지국가에 대해서는 입장이 분명치 않다는 점 △성장을 위해 필요한 노동유연성의 증대 등은 필수적이나 노동조합 자체에 대한 입장이 모호하다는 점 △개인의 자유와 자율은 존중돼야 하지만 성장을 위해서는 제한될 수 있고 민주주의의 축소도 가능해 민주주의든 권위주의든 수단적 선택에 불과한 점을 꼽았다.

지난 5월 15일 광주 동구 옛 전남도청에서 열린 ‘가자, 도청으로-5월27일 이전과 이후, 그사이’ 특별기획전에 전시된 바퀴자국 선명하게 남아 있는 시민군 태극기 ⓒ뉴시스
지난 5월 15일 광주 동구 옛 전남도청에서 열린 ‘가자, 도청으로-5월27일 이전과 이후, 그사이’ 특별기획전에 전시된 바퀴자국 선명하게 남아 있는 시민군 태극기 ⓒ뉴시스

그간 보수의 사회정치 담론 전략

이러한 보수주의에 대한 철학적 빈곤 속에 그간 한국 보수세력은 자유주의·진보개혁 세력과 대화와 소통을 통한 합의가 아닌 그들에 맞선 ‘집합 정체성 구축’을 통해 그들을 압도하는 담론 전략을 구축해왔다.

충북대 사회학과 이항우 교수는 논문 <이념의 과잉-한국 보수세력의 사회정치 담론 전략(2005~2006년, 2008~2009년)>에서 “보수세력에게 ‘우리’와 ‘그들(자유주의·진보개혁 세력)’의 대립은 ‘내부·외부’ 구분법의 강화를 의미한다. 보수세력은 ‘그들’의 모든 문제를 항상 개인을 넘어선 집단의 문제로 전환시키는 상상력을 잘 발휘했다”며 이같이 밝혔다.

이를 통해 그간 보수세력은 자유주의·진보개혁 세력을 아마추어적인 주변부 별종으로 취급함으로써 동시에 자신들은 실력이나 연륜의 측면에서 항상 그들보다 낫다는 관념을 확산시키는 데도 성공했다는 게 이 교수의 설명이다.

이 교수에 따르면 보수세력은 ‘이율배반적 권력 집단’ 담론을 통해 흔히 진보개혁 세력의 장점으로 간주되는 도덕성을 직접 공격했다. 이를 통해 그들이 대중과는 유리된 권력 집단이라는 지배의 논리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또 ‘산업화·민주화·선진화’ 담론 역시 한국 현대사를 보수세력이 주도한 성공한 역사로 정당화하려는 작업의 일환으로 제시된 것으로, 다른 입장과 관점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거리의 세력’,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는 집단’, ‘친북좌파’, ‘반대한민국 세력’, ‘대한민국 정통성 부정 세력’이라는 적대성의 낙인을 찍어왔다고 부연했다.

이 교수는 보수세력의 이런 행태에는 모든 사회적 논란에 반공주의라는 이념을 덧씌우는 과잉 이념적 성향이 자리 잡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보수세력은 자신과는 다른 입장과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민주주의를 향한 정당한 경쟁자로 보기보다는, 국가 정체성을 위협하는 이질적 존재, 배제하고 절멸해야 할 ‘적’으로 보는 권위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사회정치 관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보수의 특징으로 본 현재 보수의 위기

이처럼 보수가 그간 지녀왔던 특성과 담론 전략에서 봤을 때, 현재 보수의 위기에 대해 전문가는 “지금까지 주류 보수들이 정치적으로 취했던 태도들, 해방 이후에는 빨갱이, 최근에는 종북이라고 몰아붙이는 등 북한 변수를 갖고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정당화·합리화 하려 했던 이념적 태도들이 한국정치 발전에 큰 질곡이 됐다”고 지적했다.

충북대 이항우 교수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현재 자유한국당의 담론전략은 거의 변함이 없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과거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 보수의 위기와 이명박 정권 말기에도 보수 내부의 위기라고 할 만한 분화가 일어났다”며 “그 상황에서도 개혁적·합리적 보수를 얘기하면서 보수의 새로운 가치와 이념을 정립해야 한다는 요구도 있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때마다 나타났던 ‘개혁적 보수’ 담론은 단지 보수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잠시 등장했다가 보수가 다시 안정되면 사라지는 등 범보수가 위기상황에서 사용하는 구호나 카드처럼 사용돼왔다는 게 이 교수의 견해다.

그는 “때문에 개혁적 보수가 한국에서 다수의 보수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는 보기 어려운 상황이다. 보수 내에 개혁적 보수가 주류가 될 만큼 힘이 있을까에 대해서는 회의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며 “해방 이후 지금까지 보수의 뿌리가 형성된 걸 생각해보면 개혁적 보수라는 건 주류의 보수로부터 지지받기가 쉽지 않은 스탠스”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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