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소연 칼럼니스트<br>▷성우, 방송 MC, 수필가<br>▷저서 <안소연의 MC되는 법> <안소연의 성우 되는 법>
▲ 안소연 칼럼니스트
▷성우, 방송 MC, 수필가
▷저서 <안소연의 MC되는 법> <안소연의 성우 되는 법>

층간 소음 걱정 없는 곳에서 아들을 맘껏 뛰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살던 아파트를 세놓고 전세를 다닌 지 어언 8년.

‘손바닥만 하더라도 마당이 있는 1층일 것’이 집 찾기의 유일한 조건이었다.

내가 사는 세검정엔 그런 집들이 많아 집구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다만 집주인이 갑자기 나가라고 하면 답이 없다는 것이 함정.

지난 봄, 계약 기간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무작정 비워달라는 집주인의 요구에, 5년간 정든 -개천에서 청둥오리가 헤엄치고 거실 소파에 앉아 백로가 날아가는 것을 볼 수 있는- 북한산 계곡을 떠나 이사를 왔다.

숲 속에서 살던 기쁨은 사라졌지만 아이가 걸어서 학교에 갈 수 있고, 신축 빌라라 깨끗한데다 창이 많아 일출부터 일몰까지 계속 해가 드는, 전망까지 좋은 집이다! 당연히 자그마한 마당도 있다. 그러나 작은 문제가 있다. 새 집이 지난 번 집 반쪽보다도 작다는 것.

옛 집은 북한산 입구 외진 곳에 있어서 집 크기에 비해 전세 값이 터무니없이 쌌다. 아이가 복도를 걷기가 귀찮아 퀵 보드를 타고 다녀야 했을 만큼 널찍하던 그곳에서 우리 부부는 5년 동안 엄청난 짐을 쌓아왔다. 저장 강박증이 아닐까 싶게 물건 버리는 걸 못하는 우리 부부에게 그 집은 더 없이 완벽한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지난 석 달 동안 이삿짐 트럭 하나는 족히 될 많은 짐을 줄였건만 여전히 차고 넘친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오늘은 이삿짐 푼 지 나흘 째 되는 날.

나는 <아무 것도 버리지 못 하는 사람>이란 책을 떠올리며 목하 짐정리 중이다. 동양의 풍수지리가 서양으로 건너갔다 되돌아 온 퓨전 풍수책 <아무 것도 버리지 못 하는 사람>은 기의 흐름을 막는 모든 물건을 아낌없이 버리고 비우면 막혔던 인생이 뻥 뚫린다고 주장한다.

“선배님, 꼭 읽어보세요. 정말 좋아요. 게다가 돈 벌리는 비결도 나와요.”

이 책을 선물해 준 후배 L양은 큰 비밀이라도 되는 양 속삭였다.

당시 나는 경제적으로 굉장히 쪼들린 상태였다. 고정 프로그램 4개가 갑자기 없어지면서 거의 백수 상태가 되어 대학원 학비 걱정에 마음이 무겁던 차였다. 평소에는 책날개부터 꼼꼼히 읽는 편이지만 돈이 벌린다는 얘기에 어디에 그런 비결이 있나 휙휙 넘기며 해당 부분을 찾아냈다.

아하, 집의 남쪽을 정리 정돈하라 이거지?!

마침 한 없이 한가하던 나는 집의 남쪽 부분을 (남향집이라 거의 집 전부) 열심히 치우고 쓸 데 없는 물건들을 내다 버렸다.

그런데!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거짓말처럼 대학원 등록금만큼의 돈이 들어왔다.

그로부터 얼마 후, 나의 전도로 책을 읽은 사람들의 성공담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반가웠던 건, 20년 가까이 완전한 싱글을 자랑하던 친구 J가 평생의 배필을 만난 것이다.

그녀는 십대 시절의 첫사랑을 잊지 못했다. 20년 가까이 그녀의 모든 비밀 번호는 십대 때 잠깐 만났던 남자 친구의 생일이었다고 하니 누가 봐도 좀 심하다 싶은 집착이었다.

J는 그 책을 읽고 나서 자기 방을 둘러봤다고 한다. 그러자 하얀 도자기 화병 하나가 클로즈업되어 들어왔단다. 고향을 떠나 서울살이를 하던 J는 이사가 잦은 편이었다. 그런데도 십대 시절 남자 친구가 선물해 준 도자기 화병을 예쁘다는 핑계로 그때 까지 끼고 살고 있었던 것. 그녀는 모든 비밀 번호를 바꾸고, 마침 박살내기 좋은 그 도자기 화병을 콘크리트 바닥에 힘껏 내던져 산산조각 냈다. 그날의 ‘박살내기 의식’을 치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지금의 남편을 소개 받았고 6개월 만에 결혼해서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

정말로 기의 흐름이라는 것이 있는지 어떤지는 알 방법이 없다.

나와 J의 예만 가지고 그 책의 주장이 모두 맞다는 주장을 펴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정리 정돈은 분명히 좋은 것이다. -다들 아시겠지만 정돈은 있는 물건을 가지런하게 하는 것일 뿐, 버린다는 개념은 없다. 정리는 그 과정에서 버릴 것을 버리는 것을 말한다. 정리 정돈은 버릴 건 버리고 꼭 필요한 물건만 예쁘게 놓는 것이다.-

쓸 데 없는 물건을 버리고 나면 기분이 산뜻해진다.

빈자리가 생겨야 새 물건도, 새 사람도 들어온다.

쓰지도 않을 물건을 부둥켜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참 많다. 쓸 데 없는 걱정과 쓸 데 없는 욕심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람 둘 고르라면 우리 부부를 꼽아야 마땅하겠지만... 적어도 나는 이번 이사를 계기로 그런 걱정과 욕심에서 벗어나 보려고 한다.

나를 둘러 싼 환경이 꼭 필요한 물건들로만 깔끔하게 정돈된다면 내 안에서만큼은 좋은 기가 생겨나지 않을까?

혹시라도 아직 옛 사랑의 기억에서 헤매는 누군가가 있다면 집 안을 둘러보시길 바란다. 믿거나 말거나 지금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정리 정돈!

관련기사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