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현 칼럼니스트
▲ 김종현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김종현 칼럼니스트】 스테인리스 프라이팬이 있다. 자주 쓰지는 않는다. 다른 코팅 프라이팬들을 죄다 꺼내 쓰다가 미처 설거지를 하지 못해서 당장 쓸 팬이 부족 할 때 쓰게 된다. 바꿔 말하면 스테인리스 프라이팬은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고 해야겠다. 

스테인리스 프라이팬은 녹이 잘 슬지 않고 잘 부식되지 않는다. 열전도율이 좋고 그 온도가 일정하게 오래 간다. 때문에 다른 보통의 프라이팬 보다 적은 열 에너지와 약간의 기름만 있어도 조리하기가 쉽다. 코팅 프라이팬의 코팅 성분 위해성 논란으로부터 빗겨나 있으며, 코팅이 벗겨질 염려가 없어 내구성이 뛰어나다. 게다가 좀 아름다운가. 번쩍거리는 재질과 적당한 무게 그리고 팬에 얇게 깔리는 기름막을 보노라면 묘한 감성이 인다. 그럼에도 음식 할 때 자주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잦은 온도 조절 실패 때문이다. 그 좋은 열 전도율이 양날의 검이다.

이 아름다운 은색 조리도구는 반드시 예열이 필수인 까다로운 상대다. 센불에 가열했다가 불을 끄고 잠시 기다리며 열이 골고루 퍼져 식는 시간을 두어야 한다. 그리고 다시 약불 – 우리집 가스렌지로는 극미세 약불 – 에서 조리를 해야 한다. 재료가 열에 반응하는 걸 묵묵히 바라보며 온도를 예측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한다. 이 초반 과정에서 실패하면 음식은 대책없이 눌러 붙고, 윤이 나던 스테인리스 표면에는 지옥에서 배어 나온 진갈색 무늬들이 용춤을 추면서 나의 동공은 진도 7.0 상태가 된다. 아, 오늘도 실패로군. 

사실 처음에 몇 번 사용해 보니 금세 익숙해지긴 했었다. 얼만큼의 시간동안 어떤 세기의 불로 하면 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코팅 프라이팬은 가스렌지에 올려 놓고 막바로 조리 하면 되는데 비해, 스테인리스 프라이팬은 예열 같은 번거로운 과정에 들이는 시간이 되려 사람을 조급하게 만들어서 점차 쓰지 않게 됐다. 그러다 보니 어쩌다 스테인리스 프라이팬을 꺼내면 이전에 기억해 놨던 불의 세기나 감각 등을 무시하고 대충 다루게 되면서 참사가 발생하곤 하는 것이다. 점점 더 멀리하고, 멀리하니까 더욱 꼬인다.

하지만 스테인리스 프라이팬을 제대로 썼을 때의 잡내 없이 깔끔하게 완성된 음식에 대한 기억이 다시 희망을 갖게 만든다. 좋은 음식을 만들 수 있을 거란 욕망과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사이에서, 역시 가장 좋은 해결책은 조급해 하지 말고 한번 더 생각 한 다음 사용법 대로 알맞게 예열 해 잘 사용하는 게 맞겠다. 어차피 잘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게 해주는 좋은 도구가 있음에도 매번 거무튀튀하게 눌러 붙도록 만들 수야 없는 노릇 아닌가.

스테인리스 프라이팬에 담긴 채 이번에도 한 쪽이 약간 눌러 붙은 계란 프라이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우리 사는 세상사도 똑같다고. 우리는 불조절에 자주 실패하며 성급한 탓에 적당한 지점을 찾지 못하고, 좋은 도구를 가지고 있지만 마구잡이로 다루어 종내에는 난처함에 휩싸이곤 한다.

최저임금 인상은 제대로 시행해도 자영업자들의 아우성을 무시할 수 없고, 현실적인 이유로 물러서도 노동자들의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제주도에 들어온 예맨 난민 500여명을 받지 말라며 반문명적 이유를 대는 것에는 반대하지만, 무지의 소산이든 무엇이든 외부의 집단에 반감을 가지는 인간의 특성을 다루는 것 또한 정치의 한 영역이다. 개인의 사생활과 정치인의 권력태도 관계를 감별하는 건 시민의 당연한 정치적 권리임에도논란 자체를 혐오스럽게 매도해 버리는 반이성의 증기가 매캐하다. 최악의 패배를 한 거대야당은 여전히 논쟁적 이슈몰이에 관심있고, 스포츠 댓글란에선 월드컵 축구 경기의 죄인을 물색한다. 옳은 이야기를 하든 비판을 하든, 가장 이상적인 온도를 예의주시하는 치열함 대신 갈짓자 짓는 감정의 향방이 그 자리를 메꾼다.

우리에겐 좋은 스테인리스 프라이팬이 있다. 잘 가꿔 놓은 제도들이 있고, 긴 시간 동안 이를 운용하며 쌓아 놓은 시민사회의 경험들이 있다. 그럼에도 어떤 논란들은 불 조절부터 실패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이성과 감각은 하나의 몸 안에서 얼마든지 양립할 수 있다. 밀리그램 단위까지 상세히 적힌 레시피로 조리를 하면서도 감성과 직관으로 음식의 풍미를 완성하는 것과 같다. 이성과 감성이 어우러지는 알맞는 온도를 무시할 때 야만이 된다. 야만은 야만스러운 생각 때문에 야만이 아니라, 야만성을 그냥 두기에 야만이다.

이게 다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일인데, 좋은 도구를 구비 해 놓고 매번 지옥도 같이 눌러 붙은 무늬만 그려내는 것은 지나친 자기 방치 아닌가. 먹는 거든 사회적 합의든 다 행복하자고 하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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