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석재 칼럼니스트
▲ 이석재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이석재 칼럼니스트】  깡!

야구공 하나가 알루미늄 배트 특유의 금속음과 함께 야구장 외야로 날아올랐다. 높이 솟아오른 타구는 생각보다 쭉쭉 뻗어나갔다. 최종 종착지는 우측 외야의 경계이자 담장 역할을 하고 있던 나무들 사이였다. 아마추어 우타자가 우중간 쪽으로 홈런을 치는 일은 매우 드물었기에 나무들 사이에 떨어진 타구는 어떤 판정을 받을지 궁금했다. 투수 뒤에 서 있던 주심도 이런 케이스는 처음인 것 같았다. 판정은 바로 나오지 못했다. 심판은 잠시 고심하더니 이내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손가락을 하늘 방향으로 휘휘 돌렸다. 홈런이었다.

홈런을 친 타자는 여유로운 걸음으로 베이스를 돌았다. 팀원들은 그의 홈런을 축하해주기 위해 홈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의 타순은 6번, 이름은 ‘이석재’ 바로 내 이름이었다. 그렇지만 베이스를 돌고 있던 자랑스러운 남자는 내가 아니었다. 

팀을 주도하던 선배들은 그날의 승부에서 반드시 이기고자 졸업생 선배를 불렀고 그가 내 이름으로 경기에 출전했다. 게다가 입고 있던 운동복마저 실력은 좋지만 준비성은 그렇지 못했던 후배에게 넘겨줘야 했다. 물론 나를 위한 배려나 사과는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바보처럼 야구장 한 쪽의 돌담 위에 앉아 그날의 경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결과는 한 점차 역전패였다. 모두들 분한 표정으로 자기 짐들을 챙겨 그라운드를 떠났다. 사람들이 떠난 뒤에 여기저기 널브러진 야구장비들을 챙겼던 것은 한 후배였다. 그날 졸업생 선배는 둘이 뛰었다. 한 명은 나의 이름으로, 다른 한 명은 그 후배의 이름으로. 후배는 묵묵히 장비들을 챙기고 나더니 돌담 위에서 멍하니 운동장을 쳐다보고 있던 내 앞으로 다가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형. 억울해요.  

사람은 조직을 위한 자신의 헌신을 실제보다 과장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당시의 내가 억울했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기억의 왜곡일 수 있다. 그렇지만 타인에 대한 평가는 그렇지 않다. 그 후배는 충분히 억울해 할 만한 자격이 있었다. 자격이 있다는 말이 우습기는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약자가 억울함을 입 밖에 내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자격이 필요하다. 

그는 연습을 위해 야구장을 예약하는 일, 체육관에서 야구장비들을 빌리는 일, 경기일정 및 변동사항을 체크하고 전파하는 일, 그라운드에서 장비들을 정돈하고 챙기는 일 등 팀의 유지와 승리를 위해 필요한 장면들마다 늘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해냈다. 내가 그날 수모를 당하면서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았던 것은 그 후배 때문이었다. 나보다 더 열심히 했던 이도 남아있는데 내가 떠나서야 되겠는가.

후배의 어두운 표정과 텅 비어버린 운동장 그리고 흩어져 있는 장비들을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야구팀을 만들어야겠다. 눈앞의 승리에 급급하지 않고, 묵묵히 헌신하는 이들에게 출전기회를 보장하는 그런 야구팀을 만들어야겠다. 1999년 초여름의 일이다.

그런 마음으로 시작했던 야구팀의 창단 20주년 기념행사가 지난 일요일 저녁에 있었다. 처음에는 행사에 참석하고픈 마음이 별로 없었다. 바쁘기도 했고, 개인적으로 복잡한 심사도 엮여 있었다. 그렇지만 무려 1년 가까이 행사를 준비해왔으며, 중간에 지속적으로 참석 여부를 체크해왔던 후배들의 노고 때문에 차마 빠지겠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10년, 20년 선배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 실은 그 얼마나 부담스러운 일이겠는가. 모르기는 몰라도 분명 싸늘하고 퉁명스레 전화를 받는 선배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참석하는 것도 부담스러운 판에 스피치까지 부탁을 받았다. 창단 멤버이자 초대 감독의 자격이었기에, 이 역시도 행사에서의 상징성을 생각해보면 거절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행사를 준비하는 후배들의 진지한 모습 앞에서 대충 준비해 갈 수도 없었다. 가끔씩 스피치 생각만 하면 가슴이 답답해졌다. 결국 행사가 시작되기 몇 시간 전 내용을 결정했다. 

어줍지 않은 비전이나 교훈을 제시하기보다, 그동안 부끄러워서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했던 팀 창단의 계기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것이 팀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끈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가 20년 전에 야구팀을 만들기로 하고 첫 연습을 잡았던 그날, 아침 운동장에는 나를 포함해 불과 네 명밖에 참석하지 않았다. 개인 장비도 없어서 체육관 운동용구실에서 실밥 한쪽이 풀린 야구공 등 낡은 장비들 몇 개만 간신히 빌렸을 뿐이다. 그렇게 無에서 출발했던 팀은 이후 여러 대회를 우승하는 강팀이 되었고, 20년 동안이나 튼튼하게 이어져왔다.

나는 성적보다 팀의 지속에 방점을 찍고 싶었다. 팀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그라운드 밖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여러 궂은 일들을 해야 한다. 그리고 팀이 계속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헌신하는 이들이 계속 등장해야 하고, 그런 이들이 계속 발굴되기 위해서는 다른 구성원들이 그에 걸맞은 존중을 보여줘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많은 이들이 서로의 짐을 나눠들고 협조해야만 팀의 장기적 지속이 가능해진다. 그렇기에 창단 20주년 행사를 튼실하게 준비했다는 것 자체가 이 팀이 위의 여러 조건들을 갖추고 있음을 증명했다. 

이런 생각들을 연단 위에서 나누었고,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이런 행사를 준비해줘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그리고 마이크를 사회자에게 건네주고 자리로 돌아왔다. 얼굴은 잘 모르지만 역사로 이어져 있는 많은 후배들의 박수가 이어졌다. 야구장 돌담 위에 고독하게 앉아있던 나의 20대도 그 박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