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소연의 그린라이트㉙] 그깟 털, 다 밀어버려!
[안소연의 그린라이트㉙] 그깟 털, 다 밀어버려!
  • 안소연 칼럼니스트
  • 승인 2018.07.04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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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소연 칼럼니스트▷성우, 방송 MC, 수필가▷저서 안소연의 MC되는 법 안소연의 성우 되는 법
▲ 안소연 칼럼니스트
▷성우, 방송 MC, 수필가
▷저서<안소연의 MC되는 법> <안소연의 성우 되는 법>

바야흐로 노출의 계절, 샤워를 하며 핑크색 면도기를 집어 들다가 문득 내 암울했던 소녀 시절 생각이 났다.

누구에게나 흑역사가 있다. 스스로를 찌질하다고 여기는 때 말이다.

중2에서 중3으로 넘어가던 시절의 내가 그랬다.

나는 내 신체의 급격한 변화를 체념하듯 받아들이던 중이었다.

사춘기 무렵 눈에 띄게 예뻐지는 아이들도 더러 있지만 불균형한 호르몬 탓에 멀쩡하던 얼굴과 몸의 균형이 깨지면서 밉상이 되는 경우가 더 많다. 나도 그랬다. 급격히 살이 쪘고 얼굴도 팅팅 부었다. 초경이 시작된 후로는 온 몸 여기저기에 털도 났다.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였다.

받아들였다.

그런데! 종아리에 나는 털만은 참아내기가 힘들었다. 사내아이들 털처럼 굵은 털이 났던 것이다. (유전인지 나의 사촌들도 죄다 그렇다)

살아있다는 것에 늘 감사하는 나는 어떤 어려운 일을 겪을 때에도 죽음을 생각한 일이 없다. 유일한 예외가 바로 그 다리털이 처음 솟아난 사춘기 무렵이었다. 여학생 다리에 시커먼 남학생 털이라니! 정말 죽고 싶은 마음이었다.

인터넷 같은 건 상상도 못 하던 그 시절, 청소년 잡지 속 고민 상담을 뒤져보니 절대로 절대로 털을 밀면 안 된다고 쓰여 있었다. 그럼 더 굵고 강력한 털이 난다며.

결국 간단한 면도 작업을 포기하고 모근까지 녹여 주거나 뽑아준다는 광고 속 제품들을 구해 발라도 보고 붙여도 보았지만 종아리 피부만 화상 입은 것처럼 벌겋게 달아오를 뿐, 시커먼 다리털은 결코 말끔히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처럼 면도기로 슥슥 밀어버리면 되는 것을, 절대 면도기로 밀지 말라고, 그럼 더 굵은 털이 난다고 쓰인 말에 겁이 나 애꿎은 피부만 괴롭히다, 결국 짧은 옷을 입지 않기로 스스로 타협을 보고는 우울하게 십대를 보냈다.

겨드랑이고 종아리고 팔이고, (아, 코밑에 있는 수염, 눈썹도 마찬가지다.) 그깟 털, 보기 싫으면 쓱쓱 면도기로 밀어버리면 그만이다. 절대 더 굵게 나지 않는다. 털이 다시 자라면 잘린 단면 때문에 두꺼워 보이지만 그건 일종의 착시다. 자라면? 또 밀면 된다. 시중에 나와 있는 여성용 면도기들 성능이 참으로 좋다. 그걸 모르고 살만 태우는 제모제와 테이핑 용품에 없는 용돈 쏟아 붇고, 한 여름에도 다리 가리기만 급급했던 그 시절이 참 억울하다.

‘털을 밀면 그 자리에 더 굵은 털이 난다고?

웃기고 있네. 그깟 털 다 밀어버려!‘

ⓒ게티이미지뱅크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외침을 들으며 나를 겁주던 말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선배한테 한 번 찍히면 끝이야.

학부형 모임에 빠지면 아이가 왕따가 돼.

일터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이, 학부형 사회에 처음 들어갔을 때... 그런 얘기들을 들었었다.

처음이라 낯설고 겁먹어 있을 때, 우리는 그런 경고성 문구들을 듣게 된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다 맞는 말은 없다. 그러니 그런 말에 경도 되어 자기 자신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

‘선배건 상사건 밉게 볼 테면 보라지,’

‘뭐 좀 외로우면 어때? 어차피 크면 지가 알아서 친구 사귀겠지!’

왜 나는 그렇게 의연하게 살지 못했을까....

검증되지도 않은 겁주는 말들에 묶여 쓸 데 없이 마음 졸이며 산 세월이 아쉽다.

샤워하며 종아리 털을 밀다가 용기를 내본다.

쓸 데 없이 겁주는 말들

까짓 거 다 밀어버릴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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