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번역을 위하여②] “번역은 지식산업의 근간”…정부 지원 확대 필요성 제기돼
[더 나은 번역을 위하여②] “번역은 지식산업의 근간”…정부 지원 확대 필요성 제기돼
  • 김도양 기자
  • 승인 2018.07.09 14:1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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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처우 개선돼야 번역의 질적 향상 기대할 수 있어
‘번역청을 설립하라’ 청와대 국민청원에 9000여명 호응해
문화예술계 전반의 열악한 환경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도
“번역료 지급 안전장치 만들고 번역 가치 높은 책 지원해야”

소통의 수단인 언어는 때로 장벽이 되기도 한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이들은 번역과 통역이라는 절차를 거쳐야 상대의 말과 글을 이해하고 대화할 수 있다. 특히 번역은 일상의 수준을 넘어 학문과 지식의 교류에 있어 여러 언어권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한다. 

그런데 언어 간 차이를 완전히 극복할 수 없다 보니 시각에 따라 의견이 갈리고 ‘오역’이라는 비난이 쏟아진다. 번역의 방향은 번역가의 해석에 좌우되는 만큼 ‘옳은 번역’을 판정할 기준이 없어 논쟁은 미궁에 빠지기 일쑤다. 실제로 번역 과정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알려지지 않아 번역가와 대중의 입장 차이도 좁혀지지 않는 실정이다.

<투데이신문>은 번역 환경의 개선을 모색하며 ‘더 나은 번역을 위하여’를 기획했다. 먼저 오역 논란이 불거지는 원인을 분석한 뒤 번역이 나아지기 위한 방법으로 번역가의 처우 문제를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활발히 활동 중인 번역가의 인터뷰를 통해 실제 현장의 목소리를 전하려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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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신문 김도양 기자】 더 좋은 번역을 바라는 사회적 요구는 날로 커지고 있다. 하지만 지난 편에서 살펴봤듯 오역 등의 번역 오류를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번역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러한 가운데 번역 관련 전문가들은 번역가의 처우를 개선하는 등의 환경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번역가가 자신의 작업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다면 번역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또한 정부 차원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지만 시장성이 낮다는 이유로 출간되지 못 하는 책을 지원하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양질의 번역서가 늘어나면 번역업계가 활성화하는 상승작용을 일으킬 것이라는 기대다. 지난 4월 ‘번역청’ 설립을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까지 제기되면서 국가가 지원하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번역계 열악한 처우 심각해
“사명감 없으면 못 하는 일”

번역가 중에는 낮은 번역료 때문에 번역 작업으로는 생활을 유지하기 힘든 경우가 허다하다. 경력이 적은 초보 번역가는 물론이고 수십년간 번역을 해온 베테랑들도 같은 문제를 겪고 있다. 

번역 계약의 기본은 ‘매절계약’이다. 한번에 번역대금을 지불하고 인세는 지급하지 않는 형태다. 출판번역의 경우 경력에 따라 원고지 1매당 3500~5000원 수준이 지급되는데 400쪽짜리 책은 원고지 1000매에 해당돼 400만원가량을 받는다. 번역 기한이 3~6개월, 길게는 1년 이상도 걸리는 것을 고려하면 매우 적은 금액이다.

영상 번역은 편차가 더 크다. 지난 2016년 씨네21 기사에서 영화 한 편당 번역료에 대해 윤혜진 번역가는 “경력과 회사에 따라 천차만별이며 나의 경우 평균 150만~200만원”이라 밝혔다. 정구웅 번역가는 일이 끊기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한 달을 꼬박 매달려도 수입이 200만원을 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많은 번역가가 다양한 부업을 병행하면서 번역 경력을 이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20년 넘게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며 50여권의 번역서를 출간한 김택규 번역가는 저서 <번역가 되는 법>에서 “나는 번역을 많이 하지 않는다. 번역만 하면 생활이 어려지기 때문”이라며 “번역을 하기 위해 번역만큼이나 많은 시간을 할애해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해 왔다”고 밝혔다. 

김 번역가는 이어 “번역가는 기업이나 대학에 임시직으로라도 취직할 가능성이 전무한, 그야말로 골수 프리랜서이니 그들(지식산업종사자) 중에서도 형편이 가장 안 좋기 십상이다”라며 “주변의 번역가 지망생에게 번역가가 되고 싶으면 평생 독신으로 살거나, 고정 수입이 있는 반려자와 결혼해 맞벌이 생활을 하라고 권유한다”고 덧붙였다.

수요가 적은 인문학술 분야는 사정이 더 열악하다. 철학자 김재인 박사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프랑스어 원서 500쪽, 한글본으로 700여쪽 분량의 들뢰즈·과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를 10여년에 걸려 번역했는데 받은 번역 원고료는 330만원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는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인문서의 번역자가 받는 대가는 그야말로 초라하다”라며 “언어 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해당 분야에 대한 고도의 학문적 역량 없이는 손도 댈 수 없는 책을 번역한 대가로는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라고 강조했다.

김 대표는 이어 “그렇다고 이를 학문적인 업적으로 평가해주는 것도 아니다. 한국연구재단과 대학 업적 평가에서 번역은 점수가 없다”라며 “그래서일까, 일부 인문서의 번역은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다. 가뜩이나 쉽지 않은 내용이 번역을 거치고 나면 해독이 불가능한 암호문으로 바뀐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이런 와중에도 좋은 번역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일부 학자들의 학문적 소명감 덕분”이라고 덧붙였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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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업계 높은 진입장벽도 문제
초보 번역가 성장할 무대 없어

이렇듯 번역 업계의 사정이 열악하다 보니 신규 인력이 유입되는 경로도 좁은 실정이다. 경력이 없는 번역가는 일거리를 구하기 힘들고 기회를 잡더라도 저임금과 높은 노동강도를 감수해야 한다. 이는 곧 번역 시장의 발전 가능성이 줄어들고 있음을 뜻한다.

인터넷 광고 등에서 접할 수 있는 번역가 자격증 취득도 방법이 될 수 있으나 이는 번역 에이전시에 지원할 때 스펙 정도로 활용될 뿐 시장에서 번역가로 인정받는 의미는 아니라는 설명이다. 번역 에이전시는 번역 대행을 원하는 기업과 프리랜서 번역가를 연결해주고 수수료를 버는 업체로, 주로 업무 서류, 제품 매뉴얼 등의 서류·기술번역과 관련된다.

김택규 번역가는 본지와 만나 “번역 자격증이 있으면 번역 에이전시에서 테스트를 받아 일감을 얻을 수 있다”라며 “하지만 한 달에 50만원조차 못 버는 상태로 2~3년을 버티며 신뢰를 쌓아야 점차 큰 프로젝트를 맡을 수 있다”고 말했다. 

김 번역가는 이어 “자리를 잡기까지 오래 걸리는 데다가 굉장히 힘겨운 과정”이라면서 “한 달에 50만원도 채 못 받고 2~3년을 일해야 하고 점차 큰 프로젝트에 투입되면서 경력을 쌓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많은 번역가들이 꿈꾸는 출판번역은 주로 소개를 통해 이뤄진다. 김 번역가는 “친분 있는 사람의 소개로 번역가가 되는 것은 아무리 따로 객관적인 평가를 거치더라도 다소 운이 작용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번역청을 설립하라’ 국민청원
정부 차원의 지원 요구 제기돼

이러한 가운데 열악한 번역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국가 차원의 지원을 요구하는 주장이 제기됐다. 지난 1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번역청을 설립하라’는 글이 올라와 9417명의 지지를 받았다. 이 글을 올린 우석대 역사교육과 박상익 교수는 같은 달 동명의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박 교수는 지식산업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사회 흐름에 발맞춰 번역을 도로, 항만, 철도, 통신 같은 사회간접자본으로 보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정부가 번역청을 설립해 국가 차원에서 번역을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해당 청원 글에서 “번역을 시장에 맡길 수 없다”면서 “번역에 뜻을 둔 우수 인력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으며 적극적인 정부 개입과 지원만이 악순환에 빠진 번역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청와대 홈페이지 국민청원게시판 캡처
ⓒ청와대 홈페이지 국민청원게시판 캡처

이와 관련해 번역가들은 번역청의 실효성에 대해서는 입장이 분분했으나 국가 차원에서 번역을 지원해야 한다는 취지에는 대체로 의견을 같이했다.

영화번역가로 10여년째 일하고 있는 황석희 번역가는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번역을 시장에 맡겨둘 수 없으니 번역청을 세워 번역을 사회간접자본처럼 관리해야 한다는 주장은 극단적이고 허황하기 때문에 반론을 따로 적진 않지만 번역가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공감한다”라며 “번역 단가는 갈수록 바닥을 치고 베테랑 번역가들도 일이 없어 번역을 접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출판번역만이 아니라 기술, 영상 등 모든 번역 분야에 걸쳐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밝혔다.

황 번역가는 이어 “번역의 질과 번역가 처우는 직결된 문제다. 번역가 처우가 올라가면 원칙적으론 번역의 질도 올라간다”며 “번역가 처우가 엉망인 지금 번역의 질이 그나마 이 정도까지 유지되는 것은 감히 말하건대 번역가들의 희생 덕분이다. 자기 결과물에 대한 자긍심과 번역이란 행위에서 오는 보람으로 착취에 가까운 시스템을 죽기 살기로 버텨내고 있다는 얘기”라고 주장했다.

번역 지원을 위한 새로운 제도를 마련하기에 앞서 공공기관이 발주하는 번역료부터 현실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 불문과 최미경 교수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국회, 서울시, 한국관광공사 등 여러 공공기관에서 번역 입찰을 하는데 시중 가격을 고려할 때 번역료를 매우 저렴하게 주는 편”이라며 “나라에서 예산이 적다며 번역료를 깎는 상황에서 민간 번역 에이전시에게 번역료를 올리라고 요구할 수 있겠나”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번역가에 국한할 것이 아니라 시야를 넓혀 열악한 문화예술계 종사자 전체를 포괄하는 지원 제도를 구상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 번역학과 정영목 교수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번역가를 포함해 문화예술계 전반의 열악한 환경에 주목해야 한다”면서 “번역가를 특별히 대접하는 것보다는 이들 모두의 복지를 어떻게 향상시킬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는 시각을 내놓았다.

김택규 번역가도 “처우 문제는 프리랜서 신분의 예술가가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어려움”이라면서 “예술인 활동증명이나 예술인 산재보험 등의 복지제도를 확대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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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료 지급 보장하는 안전장치 마련해야
가치 있는 번역서 출간 돕는 지원 요구도

그렇다면 번역가의 처우를 개선하고 번역의 질을 증진하기 위해 필요한 제도는 무엇일까. 번역가들은 공통적으로 번역료 지급을 담보하는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한다.

황석희 번역가는 “번역 질을 올리는 방법은 정말 간단하다”며 “‘번역가에게 충분한 번역 납기 일정을 보장하고 그 작업 일정에 합당한 보수를 안전히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할 것’. 번역가로 10여 년을 살아오며 느낀 대로 말하자면 이게 정답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황 번역가는 이어 “돈이든 저작권이든 떼이지 않게 강력한 법적 장치를 만들어 주면 된다”면서 “이것만 실현돼도 번역가들이 숨은 쉴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번역단가 지원의 필요성에 공감하면서도 형평성 등의 문제를 고려해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김택규 번역가는 “번역가가 제일 힘들어하는 건 번역료 지급 시점이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라며 “많은 번역 계약이 계약금으로 10~20%를 받은 뒤 잔금은 ‘책이 나오고 한 달 내’에 받도록 규정하는데 책이 언제 출간될지 알 수 없다 보니 수입 관리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밝혔다.

김 번역가는 이어 “정부가 이러한 계약 사항을 불공정 계약으로 못 박을 필요가 있다”면서 “출판사 사정을 고려해야 하지만 책을 언제까지 꼭 내야 한다는 조항을 계약서에 포함하는 방법도 있다”고 말했다.

문화 발전에 도움이 되는 번역서를 늘리기 위해 공적 영역에 대해 지원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양질의 번역서가 늘어나면 번역업계가 발전하고 이는 곧 번역가의 처우를 개선하는 선순환을 일으킬 것이라는 기대에서다.

정영목 교수는 “번역은 사회적 기능을 갖지만 기본적으로 영리활동이라는 점에서 사적 영역에 속한다”며 “시장에 내놨을 때 판매는 저조할 수 있어도 사회에 필요한 번역서를 지원해 번역가를 공적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정 교수는 이어 “정부에서 공적 가치가 높은 번역을 좋은 조건에 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면 능력 있는 번역가들이 관심을 가질 것”이라며 “그러면 시장에서도 실력 있는 번역가를 잡기 위해 조건을 맞추려고 노력하면서 선순환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최미경 교수는 “인문학술서 번역을 위한 기초학문 연구가 부진하다 보니 관련 연구와 번역을 함께하는 한국고전번역원 같은 기관이 생겨 창구를 일원화하면 좋을 것 같다”며 “중요한 책이지만 방대하고 어려워서 번역되지 않은 책을 번역하면 번역서가 풍부해질 것”이라는 전망을 제시했다.

번역 전반의 질을 높이는 것은 개별 번역가의 노력만으로는 역부족이라는 점에서 정부 차원의 지원책 마련이 필요한 상황이다. 번역은 문화와 학술 분야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는 만큼 사회의 기반을 다지는 근간 산업으로 육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 이유다.